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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의 유리
2023_이야챌린지_102
by
이야
Dec 25. 2023
임시 표지
성휘고등학교.
정문 앞.
선도부인 다온은 등교하는 학생들을 예리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에게 붙잡힌 이들이 불퉁한 얼굴로 반과 이름을 읊고 있을 때.
백옥의 피부를 지닌 유리도 다온에게 불렸다.
"너, 넥타이 안 했어."
"아."
그 지적에 고개를 내린 그녀가 목을 살피고는 시인했다.
"놓고 왔네."
"반하고 번호, 불러."
명찰을 본 그가 명단에 그녀의 이름을 적으며 말했다.
그러나 한창 답이 없자 펜을 누른 다온이 고개를 들었다.
"반, 번호-"
"오늘 전학 와서 아직 몰라. 좀 이따 알려줄게."
한 번 더 말하자 그제야 답하는 그녀.
하지만 시선은 다온에게 있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을 눈으로 좇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진 다온도 시선의 주인을 알아챘다.
'유나은? 아는 사이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그녀를 보내주고 다시 정문을 살폈다.
한편 선도부에게 풀려난 유리는 눈길이 가는 여자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여자를 따라가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서너 명의 학생들이 여자를 에워싸자 눈살을 찌푸린 유리가 걸음을 멈췄다.
"뭐, 기회는 지금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대로 돌아선 그녀는 원래의 목적지인 교무실로 향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유리를 알아본 선생이 손짓했다.
"우린 2반이고, 잠깐 여기 앉아 있으렴. 조회 시간에 같이 들어가자."
"네."
그녀를 앉혀두고 제 할 일을 하는 담임.
개의치 않은 유리는 창밖 너머 운동장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축구하는 남학생들 몇몇.
얼마 뒤, 종이 울리자 떼거지로 건물에 들어간다.
멀리 정문에서도 선도부들이 지각생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게 보였다.
"우리도 슬슬 갈까?"
다른 선생들이 교무실에서 빠져나가자 일에서 손을 뗀 담임이 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너희 교실로 안 돌아가니?"
"지금 들어갈게요~"
시끌벅적한 복도를 지나, 2반의 문 앞에 선 유리는 멀뚱히 등을 바라봤다.
담임을 따라 교실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말소리가 줄었다.
"전학생이에요?"
"그래. 자, 인사하자."
누군가 묻자 간단한 대답이 이어지고, 교탁까지 도달한 유리는 내부를 살펴봤다.
호기심 어린 눈부터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숙인 고개까지.
가지각색의 아이들이 있는 교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단유리라고 해. 사정이 있어 중간에 전학 왔지만, 친하게 지내면 좋겠어."
"그러면 빈자리가-"
"저기요. 저기 앉아도 되죠?"
"어, 아. 나은이 옆자리가 비었지? 그래. 그렇게 하자. 별다른 소식은 오늘 없으니까 바로 1교시 준비하고."
"네!"
유리가 자리를 찾아 들어가자 빠르게 조회를 마친 담임이 교실을 나갔다.
교실의 문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모여드는 학생들.
유리는 다가오는 이들보다도 옆에서 몸을 수그린 나은을 넌지시 바라봤다.
"이름이 단유리라고 했나? 너, 좀 이쁘다? 틴트, 뭐 써?"
"이거."
"비싼 거 쓰네~ 하긴. 신발이랑 가방도- 아, 나은아. 우리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야지?"
유리에게 관심을 갖던 예슬은 그 뒤에 있던 나은을 짚었다.
움찔.
향수 냄새가 풍기는 여학생의 질문에 몸을 떠는 나은을 보자 유리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거 급한 거야?"
"응?"
"얘, 내가 좀 빌려야겠는데."
"뭐?"
"교과서 가지러 가야 하거든. 아. 네가 갈래?"
예슬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자리에서 일어선 유리는 나은을 데리고 나왔다.
그녀에게 끌려 따라나온 나은은 쭈뼛대며 유리의 곁에 붙었다.
"저기- 나랑 지내면 안 좋아."
"괴롭힘 때문에?"
"그냥 같이 있으면 위험-"
"아. 너랑 계약한 마왕이 질투해서?"
유리의 질문을 들은 나은이 놀란 눈으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물음.
"어떻게-?"
"마계가 참 많아. 덕분에 내가 사냥할 마왕도 많지."
"사-냥한다고?"
"뭐. 부담되긴 해. 계약으로 오가는 것보다는 훨씬 제약도 많고. 하지만 내 목표는 뚜렷해서."
말을 마친 유리가 팔을 뻗자 뒤로 물러선 나은이었지만.
붙잡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깨를 내어준 나은은 셔츠 아래 새겨진 문양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유리의 손톱이 점차 살갗을 파고들 무렵.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래. 날 무찌르고 황위에 올라설 생각이었나 본데-]
"버논? 윽-"
"너뿐만 아니라 모든 마왕을 죽일 예정이지."
[확실히 인간의 육체로 꽤나 강한 마기를 두른 듯하지만. 그래봤자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우웅.
파리한 흑색 피부 위로, 고귀한 정복을 입은 남자가 고고하게 떠오른 채였다.
계약자의 피를 매개체로 급하게 소환된 버논이 여유롭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리는 기절한 나은을 복도 한쪽으로 밀쳐냈다.
"내 계약자를 살살 다루지, 그래."
"글쎄. 나 이전에 이미 험하게 다뤄졌던데."
"크읏. 안 그래도 이렇게 소환된 김에 너는 물론이고, 그년들도-"
분함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버논이 방심한 틈을 타 뛰어오른 유리가 일격을 날렸다.
생각보다 날렵한 움직임에 한편을 내어준 그가 충격적인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그 무기를 어디서-"
"아무렴 마왕을 상대하는 데 준비도 안 했을까. 이제 네가 마족이란 건 내 앞에서 강점이 아니라 흠이야."
"그거라면 자신할만하군. 결국 본신의 전투력만으로 승부를 내야겠군."
유리의 무기로부터 장점을 잃은 버논이었지만, 여전히 투쟁심을 불태웠다.
이번에는 그의 반격이 시작되려 했으나-
"비겁한!"
"너 같은 경우가 참 애매하긴 해. 계약자가 인질이 되는 경우엔, 괜히 내가 악역 같잖아."
"갑자기 나타나서 죽이려고 들었으면 충분히 악역이 아닌가!"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난 '마왕'을 죽이면 돼."
그를 빠르게 무력화시키고, 나은을 품에 안은 유리가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계약자를 위해 순순히 힘을 뺀 버논이 죽음을 직감했다.
"잠만. 지금 뭔-"
"마왕을 죽이겠다 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아니면 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인간이-! 설마 그 무기에 대한 전설이 사실이었던 건가?"
"그런 셈이지. 그보다 이제 네가 날 대신하면 돼."
"무슨-"
딱.
마기에 잠식되어 틀어진 시공간이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유리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복도에는 나은과 버논, 둘뿐이었다.
"교과서 가지러 안 가?"
그에게 이끌려 나온 나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딘지 모르겠다."
"아. 우리 학교, 구조가 좀 헷갈리지? 나도 2개월 전만 해도-"
앞서 이동하던 나은은 그에게 살갑게 말을 건넸다.
버논은 그녀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조용히 따랐다.
"앗. 내가 너무 내 말만 했지? 그러고 보니까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명찰이 없어서-"
모습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 달라진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맑았다.
항상 마계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눈앞에 생생히 있자 감상에 젖은 그는 팔이 흔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버논."
"맞아.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영어 이름이라 바로 안 붙었네."
나은이 웃으며 돌아섰다.
한편 그 둘을 두고 학교를 빠져나온 유리는,
"이딴 규칙이 뭐라고."
바람에 넥타이를 맡기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마왕이 있고.
저마다 달랐다.
엄청 나쁜 녀석도.
꽤나 로맨틱한 녀석도.
또 허접하기도 했고, 혹은 착실하기도 했다.
"그래도 실험은 계속되어야겠지."
세상을 비추는 창으로 쓰이기 좋은, 이 책 너머의 세계로.
여행하는 그녀는 하루빨리 재회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이런 능력을 부여하고 떠난-
"리테스터, 반드시 보여주겠어."
툭.
그녀가 사라지자 떨어진 책 한 권이 바닥에 남았다.
우연히 손에 넣은 다온은 그것과 함께 붉은색 넥타이를 쳐다봤다.
"누가 자꾸 버리는 건지."
불만스럽게 돌아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처 펼치지 않은 책 속의 활자들은 새로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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