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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오래
2023_이야챌린지_103
by
이야
Dec 26. 2023
임시 표지
사르륵.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이사 가기 전.
정리하던 책장 속 한편에 놓인 공책.
홀린 듯 읽던 오래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집중한 두 눈이 살짝 커지기도 했다.
마주한 과거의 산물은 잊고 있던 기억을 자극했다.
그녀가 한창 글을 읽고 있을 무렵.
평소처럼 놀러 온 요나는 오래의 방으로 향했다.
"이삿짐 챙기느라 바쁘다더니, 뭐 하고 있어?"
방문이 열려있어 바로 오래를 발견한 요나가 물었다.
그제야 시선을 뗀 오래가 황급히 책을 덮었다.
그것을 수상쩍게 여긴 요나의 눈이 좁혀졌다.
"뭐지? 뭔데 숨기지?"
"어휴~ 정리할 게 왜 이렇게 많냐."
티 나게 말을 돌린 오래를 흘깃 봤지만,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부산스럽게 상자에 짐을 담는 오래를 따라 정리를 돕는 요나.
한창 둘이 힘을 쓰고 있자 소원이 방에 찾아왔다.
"요나가 와서 도우니까 빨리하네."
"잘 먹겠습니다."
"내가 더 많이 정리했거든?"
"며칠 전부터 해두라니까 이제 하는 거면서?"
"큼. 나도 마실래!"
곧 요나에게 내밀어져 있던 음료들 중 남은 하나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저만치 물러난 오래는 바쁜 척 몸을 움직였다.
"아휴, 정리할 게 산더미네!"
그런 딸을 지켜본 소원은 고개를 내젓다 요나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둘에게 먹을 것을 전한 소원이 외출하자 집에는 둘만이 남았다.
"그래도 이사 오면 우리 집하고 더 가까워지잖아."
"그치. 그러니 이제 합법적으로 가출을 해보겠어."
"누가 받아준대?"
"와, 신요나. 나에 대한 사랑이 고작 그거뿐이야?"
지이익.
박스 테이프를 뜯은 오래가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요나를 쳐다봤다.
상자를 잡고 있던 요나가 작게 혀를 찼다.
"그러는 너는 우리 사이에 대체 뭘 숨긴 거래?"
"악. 갑자기 그걸 얘기한다고?"
헛기침을 해대며 답을 피한 오래는 테이프를 붙였다.
잘 붙도록 고정시켜준 요나가 어이없는 눈길을 보내도 끄떡없었다.
"하, 쌀쌀해지니까 감기가 막 걸리나 보네."
"웃기지 마시고요. 아까 저기다 밀었나?"
"아- 그, 이미 내가 다 넣었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기어코 침대 밑에서 꺼낸 공책을 흔드는 요나.
그 손을 본 오래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야, 뭐 그런 걸 다 보려고 하냐."
"이게 뭔데? 어? 아~ 이거 그거네."
타다닷.
공책을 빠르게 훑어본 요나가 기억을 떠올렸다.
뒤늦게 뺏으려 팔을 뻗어도 오래의 키는 훨씬 작았다.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간신히 입-"
"아악. 그걸 소리 내서 읽는다고?"
"뭐 어때? 난 이미 읽은 거잖아."
"썼을 당시에나 봤잖아."
옥신각신.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졌으나.
여전히 공책은 요나에게 있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축객령을-"
"안 들린다아아아-"
"왜 부끄러워하지?"
"흑역사니까 당연한 거 아님? 내놔!"
우당탕.
침대에 올라간 오래가 몸을 날리자 두 사람이 한데 엉켰다.
비로소 빼앗는 데 성공한 오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멀어졌다.
짓누르는 무게가 사라지자 편안해진 요나가 물었다.
"5년 전에 쓴 거였던가?"
"아마 그 정도? 아. 4년 전 일 듯."
"1년 동안 꾸준히 썼는데 왜 지금은 안 쓴대?"
"…몰라."
아직 마감하지 않은 상자에 넣고 테이프를 든 오래가 뒤늦게 대답했다.
찌익.
요나는 상자에 두른 테이프를 입으로 끊는 그녀를 지켜봤다.
"그때 많이 쓰지 않았어? 백…"
"104편. 본편 100편에 특별편 4편까지, 그만큼 썼었지."
"아. 맞다. 딱 너 생일만큼 썼다고 했지? 1월 4일.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네?"
손가락을 접던 요나가 며칠이 남았는지 헤아렸다.
열 손가락이 다 접히자 계산을 끝낸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오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건 알지?"
"그날 와서 도와준 건 알지?"
"큽. 어제 놀면서 약속했잖아~"
"하긴.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야자하기보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야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결국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자정의 설렘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야."
"그게 야자였어? 밸런스 게임에서 야근으로 봤던 것 같은데."
정돈된 박스들을 한쪽으로 옮긴 오래가 반문했다.
"야근이 맞을걸. 근데 우리 이제 고등학생 되니까 야자로 바꿔봄."
"난 안 할 거임."
"학원도 안 다니잖아."
"…해야겠네."
요나는 맥없이 침대에 걸터 앉는 오래를 보며 웃었다.
반면 오래는 힘없이 내려뒀던 컵을 잡았다.
"하. 세월, 빠르다."
"애늙은이야, 뭐야. 아무튼 생일 선물, 뭐 가질래?"
"너의 눈물."
"그려줄 순 있어."
"페이스 페인팅은 지겨워."
오래의 답에 고개를 젓는 요나였다.
"그러면서 매번 달래."
"나도 티어 트럼프가 되겠다 이거야."
"네가 인간으로 태어난 걸 어떡해?"
"확 그냥 연구소에 신고해버린다."
"응~ 하트 트럼프 집합소죠?"
허공에 발길질을 한 오래가 힘에 겨워 쓰러졌다.
"이 정도로 체력이 없으면 너무한 거 아니야? 아빠가 태권도 관장이잖아."
"아빠가 나한테 물러서 그래."
"그래도 너무 약한 거 아니야?"
흔들흔들.
저항 없이 움직이는 오래의 사지였다.
"그만해주시죠. 티어 트럼프도 약하잖아요."
"아닌데요. 튼튼한데요."
"넌 돌연변이야."
"나밖에 없는데 뭔 소리야."
"어떻게 루다이모를 벌써 잊을 수가 있어!"
한참 흔들리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잘 있거든."
"그니까 티어 트럼프는 둘이잖아."
"트럼프 역사에 따르면 최초의 트럼프는 포함하지 않는다고."
"그래도오 루다이모나 티어 트럼프는 안 알려졌잖아."
"요즘은 그렇지도 않잖아. 교류원에서 꽤 만났으니까."
모든 이에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듯 요나의 존재는 차츰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나랑 안 놀아주고 교류원만 다녔지."
"방문일수는 네가 더 많을걸?"
"큼. 크리스마스 영화나 볼까?"
"어휴. 그래. 이번에 특집으로 나온 거, 보자."
거실로 나온 둘은 아직 설치된 티비를 틀었다.
단말기와 연결한 그들은 큰 화면으로 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역시 심장은 두 개여야 해."
"나는 하나거든?"
"차라리 시계 모양으로, 타임 트럼프나 하지. 그러면 완전 사기겠다."
"오. 그걸로 써보든지. 예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각색해서 쓰겠다 했잖아."
"악. 영화나 봐!"
주제를 회피한 오래가 영상에 집중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던 요나는 과거 신나서 떠들던 그녀가 떠올랐다.
'후후. 이제 내 창작 스탯은 50인 거임. 그리고 50마다 체감이 나는 거야. 그런 고로 난 첫 성장을 이룬 거지. 삼천까지 달릴 거임. 만큼 사랑해 함께 내려왔으니까 말이야!'
어느 영화에서 꼭 그만큼만 사랑한다 했고.
우리나라 선조는 그만큼 함께 내려왔다며 동서양의 조화로 결정한 숫자를 선택한 오래.
오래의 목표는 확실했지만.
지금은 손을 놓은 채 그저 영상을 보는 그녀.
'하긴. 노력해서 썼는데, 성과가 없으니까 흥미를 잃은 거겠지.'
오래의 옆얼굴을 보던 요나도 이내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봤다.
한편 영화를 재밌게 보던 오래는 마치 그때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저런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
잠시 피어올랐지만.
아까 보던 공책의 내용이 생각난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씹었다.
'내 재능으로는-'
어딘가에 고여버린 자신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대로 묻히는 게 더 마땅했다.
그런데도 마저 덮을 수 없다면-
"31일에 만날 거야?"
"어, 일단은."
몇 시간 후.
요나를 배웅한 오래는 방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빈 노트를 바라봤다.
-이대로 마루를 놓아준다, 다시 마루를 꺼내본다.
코카콜라는 결정하게 했다.
어느 쪽에 멈춰 서도 결국 오래의 선택은 한결같았다.
쏟아내야 시원한 저 하늘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어느 날.
따뜻한 손길에 맡겨진 펜은 할 일을 찾아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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