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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쭉 올라가는 지수

2024_이야챌린지_003

by 이야
임시 표지

본편은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를 기반으로 작성한 2차 창작물(비영리)입니다. 네이버웹툰 '이제 곧 죽습니다'와 티빙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의 설정과 내용 등을 일부 포함하고 있으니 감상에 유의 바랍니다.


"남행복! 빨리 나와!"


연습장에 한창 그림을 그리던 예찬의 손이 멈췄다.
펜을 내려놓은 그녀가 곧 미술책을 들고는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시간 많잖아."
"애들은 이미 다 이동했거든?"
"네가 문 잠그겠다고 내쫓으니까 그렇지."
"그러면 순순히 협력하시죠, 남행복 씨?"

열쇠를 들고 있는 친구와 잠시 실랑이를 벌인 예찬은 문턱을 넘었다.
탁.
그제야 교실문을 온전히 잠근 두영은 예찬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빠르게 이동합시다."
"알았으니까 밀지 마, 뚝딱아."
"너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면서 미술실은 왜 이렇게 늦게 가는 거야?"
"내가 하는 활동이랑 교과서적 미술은 분명한 차이가 있어…"

두영은 자신이 직접 물었지만, 진지한 예찬의 눈빛에 아차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복도를 지나는 내내 그녀의 철학적 사고를 한바탕 들은 두영이 질린 얼굴로 미술실 문을 열었다.

"물어본 내가 잘못했네."

지정된 자리에 앉아야 하는 수업 특성상 그제야 예찬과 떨어진 두영은 아직도 울리는 소리를 덮기 위해 귀를 문질렀다.
한편, 다음 쉬는 시간에 더 얘기해 줄 것을 다짐한 예찬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녀가 책상에 책을 내려놓자 마침 종이 딱 맞게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선생님이 들어왔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말했던 대로 시험 관련-"

미술 선생님인 현정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예찬이 책 아래 놓은 연습장에 스케치를 마저 그렸다.
슥슥.
기말고사와 관련된 주요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듯했지만, 예찬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그림에 몰두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몇 차례 중요성을 강조한 선생님의 톤만을 배경 삼아 보냈던 시간 끝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너무 수업 안 듣는 거 아니야?"
"어차피 미술은 대충 봐도 되잖아."
"하긴. 넌 엄빠가 다 유명하니까 걱정할 게 없겠다~"
"그거랑은 상관없거든? 그보다 일찍 안 가도 돼? 문 열어야 하잖아."

자신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걷는 두영을 알아챈 예찬이 물었다.
그에 두영의 입가가 뿌듯하게 올라갔다.

"서승찬한테 부탁했지. 그리고 뭐가 상관이 없어? 부모님 두 분 다 대중이 다 아는 작가에, 감독인데~"
"맨날 승찬이한테 떠넘기는 거, 완전 직무 태반이야."
"걔 발이 빠르니까 그렇지. 그보다 넌 진짜 앞날이 창창하니 부럽다."
"아니~ 엄빠랑은 상관이 없대도. 내 길은 알아서-"

예찬이 두영의 말에 반박했지만, 두영은 미술책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어허. 남행복 씨가 스트레스 없는 삶을 보내는 게 다 지원받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지원? 네가 우리 집을 와야 알 텐데. 엄마는 엄청 냉정하고, 아빠 이야기는 너도 알잖아. 난 알아서 살아야 해."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게다가 너희 아빠 얘기 보면 결국 어머니의 사랑이 인생을 바꾼 거나 다름없는데, 너한테 야박하게 구시겠냐구."

두영이 하는 소리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더 이상의 반박은 하지 않고 조용히 교실로 들어가는 예찬이었다.
아빠의 엉터리 삶도 충분한 이야기가 되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샀지만.
아쉽게도 예찬에게만큼은 아니었다.

'그래. 나도 내가 유전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유리하게 물려받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문제였다.
재능, 부모님이 내려주고 키워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건 맞지만 그것과 함께 자리 잡은 것도 있었다.

부담감.
처음에는 분명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샌가 쫓기듯이 하는 자신이, 만족보다는 더한 자극을 좇아놓고는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은 실력이 다 끔찍했다.
그렇게 놓아버린 세월이 1년이 넘은 현재.

'아빠도 너무해. 아빠도 실패 경험을 활용해서 극복했으면서, 왜 나는 완벽하기만을 바라냐고.'

요즘은 뜸하지만.
그래도 잊을만하면 화제에 오르는 아빠의 첫 책.
정확히는 아빠와 엄마가 함께 쓴 이야기지만, 그것이 눈에 들어올 때면 예찬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았다.
감히 넘볼 수 없게 높아진 벽은 짚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빠는 그저 핑계일 뿐이라고. 도망가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아빠도 도망치려고 했던 거 아냐?'

연속된 좌절 속에서 삶을 포기하려던 그는 끝내 포기를 포기했다.
떨어지려던 찰나.
진동하는 폰과 함께 머리를 강타한 생각은 그를 다시 세상으로 이끌었고.
그는 비로소 두 번째 탄생을 맞이했다고 밝혔다.
아빠의 과거를 떠올린 예찬은 책상에 엎드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나도 좀 이따 옥상에 한 번 가볼까? 그러면 뭐라도 떠오르려나? 아니면 내가 아빠만큼 간절하지 않다는 건가.'

어쩌면 아빠는 간절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두 번째 기회.
그, 이재는 말했다.

'죽음은 이 고통을 끝낼 하찮은 도구라는 말. 그건 엄청 역설적이야. 고통스러울 삶을 끝내줄 하찮은 도구로 선택된 죽음은 결국 어떤 도구도 쓰지 않은 것과 같아.'

예를 들면 그랬다.
어떤 추가적인 힘의 개입 없이 망치와 손으로 벽을 부순다고 하자.
망치는 한 번만 휘둘러도 흠이 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반면 손은 어떤가.
아무리 두드려도 벽은 그대로 자리를 지킨다.
그러니 벽을 부수기 위해 사용된 손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하찮은 도구인 것이고, 그것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죽은 적이 없던 거야. 채이재는.'

아빠의 아이디어로, 엄마와 함께 쓰인 '이재, 또 죽습니다'는 주인공이 죽은 후의 이야기를 담는다.
자신을 하찮은 도구로 여긴 주인공에게 벌을 주는 죽음이지만.

'만약 이재가 죽은 거라면, 죽음은 분명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줄 유용한 도구야.'

예찬은 생각했다.
주인공이 죽기 전에 죽음에 대해 남긴 말은 역설적이지만, 마땅한 문장이라고.

'결말부를 생각하면 그렇지. 하찮은 도구였기에 결국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는 거잖아.'

그렇기 때문에 채이재의 말은, 결말에 대한 암시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엄마와 아빠의 상상 속에서 결정되었다.
남이재와 여지수의 공동 집필작은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 유명세가 지금까지 이어져 그들은 각각 대중들이 좋아하는 작가와 감독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죽음이 분노했다면 그건 분명 유용한 도구로 쓰이고 싶지 않은 바람인 거겠지.'

이 삶에서 얼마든지 하찮을 수 있는 죽음은 속삭였다.
자신은 고통을 끝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그는 기쁨을 받기 위해 끝까지 기다렸다.

'나도 딱 그만큼만 인내해 줄 것이다. 아무리 이 삶이 당장 잘 풀리지 않아도.'

생각에 깨어난 예찬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종이 울리기 전, 연습장을 펼쳤다.
열심히 그림을 그린 그곳에는, 가족이 있었다.
막 태어나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행복과 그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행복하라고 태명도 그렇게 지었던 거 아냐? 어릴 땐 자주 놀러 다녔으면서. 요즘은 어디 가지도 않고.'

문이 열리자 예찬의 투정도 멈췄다.
국어 시간.
서랍에서 더디게 교과서를 꺼낸 예찬은 시큰둥한 얼굴로 칠판을 쳐다봤다.
이윽고 문이 한 번 더 열렸고,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환호성이 교실을 채웠다.

"헐, 대박!! 여 작가님이다."
"남예찬, 너도 알았어?"

소란스러운 음성 사이로 짝꿍이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찬이 고개를 저었다.
간략한 인사와 소개 후, 특강이 시작되었다.

"저는 한때 영혼의 시간은 육체와 다를 거라 생각했어요. 육체는 한 방향이지만, 영혼까지 그럴 거라 생각하지 않았죠. 그래서 남을 원망하던 시간을 나에게로 돌렸죠. 어떤 '나'의 의지로 벌어진 일이라면 분명 지금의 '나'의 의지로도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거기까지 말한 지수는 잠시 딸과 시선을 맞췄다.

"-요즘은 생각이 변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너무 늦기 전에, '나'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교탁에서 벗어난 지수가 예찬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살짝 무릎을 굽힌 채로 입을 열었다.
사각.
귓속말과 함께 짝꿍의 필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벌려진 팔이 또 다른 세상을 맞이하며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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