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야파티

세상을 그리는 시간

2024_이야챌린지_004

by 이야
임시 표지

끼익.

탁.

조심히 문고리를 놓은 손과는 다르게 발은 거침이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온 새령은 익숙하게 자리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전보다 힘 있는 목소리를 듣자 빈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서류를 살짝 옆으로 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요?"

"네. 이젠 대략적으로 알거든요. 물론 조금만 유추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었지만, 어 처음에는 그럴 줄 몰라서…"


새령이 말끝을 흐렸다.

살짝 기울어진 지팡이가 그녀의 무릎을 건드리고 있었다.

빈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눈을 마주치고는 말을 받았다.


"확실히 일하던 곳으로 자주 가니까 익숙할 수밖에 없겠네요."

"맞아요. 언제 알바를 그만두나 했는데. 이제는 제가 단골 중의 단골일걸요? 게다가 앞으로는 더 자주 갈 것 같아요!"

"움직이는 건 좋지만, 건강식도 챙겨 먹어야 해요."

"그럴 거예요! 이번에 시리얼이 컵으로도 나왔잖아요? 듣기로는 백혈병 환자를 위해 봉서식품에서 따로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관련 기사를 접한 기억이 난 빈우가 그에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의 호응에 기분이 좋아진 새령이 더욱 신나서 떠들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이솔 언니 다음 콘텐츠 영상, 아 내일 오후에 올라오겠네요. 그 시리얼컵에도 따로 점자를 넣어준대요~ 제가 살 목록이 더 늘어서 기대된다구요."

"아~ 이솔 씨 채널에 올라온 예고 영상이 그거였군요? 이미 컵라면하고 컵밥에는 다 점자가 있어서 또 어디에 추가되나 했는데."

"사실 작은 컵이라서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방법이 있더라구요. 게다가 봉서식품의 저칼로리 아이스크림에도 같이 진행한다고 해요. 후후, 완전 대박이에요."


그와 동시에 새령이 주머니에 있던 폰을 꺼냈다.

음성 인식으로 '테리'를 부른 그녀가 명령을 입력했다.


"이것 보세요. 안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저칼로리만 사고 있었는데, 횡재했지 뭐예요. 거기에 점자화된 걸로 편의점에도 입고된다고 하니까요~"


새령의 최근 구매 목록을 확인한 빈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과는 달라진 그녀의 태도가 참으로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스크림도 결국 편의점에 들어오네요. 저번에 추천해 줘서 먹어봤는데, 맛도 괜찮고 무엇보다 부담이 없던데요?"

"역시 그렇죠? 은수는 방그레가 더 맛있다고, 자리 차지하니까 조금만 시키라고 하던데 양보할 수가 없더라구요."

"은수는 잘 지내죠?"

"넵, 엄청 건강해요. 사실 제가 은수 소개로 이 병원 오게 된 거잖아요. 처음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런 마음도 들었는데 요즘은 다니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정확히 빈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새령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자신이 여기 앉아있는 게 큰 보람으로 다가오는 날이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밝은 미소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잡혀있었다.

괜히 간지러운 기분을 느낀 빈우가 콧가를 문질렀다.


"항상 이렇게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은수도 그렇고, 한세도 정말 많은 힘이 되어줬지만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하하, 정말 좋은 말이라서 부정하고 싶지 않네요."

"곧 방학 시즌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피해 보지 않으려고요. 솔직히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사고 당하고 편의점 갔을 때 종종 인사해 주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한 번도 받아주지 못한 게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그 친구는 제가 일할 때부터 정말 친근하게 대해줬던 아이였는데, 저 힘들다고 무시한 게 계속 신경이 쓰였어요."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새령은 전처럼 말을 멈추지 않았다.

빈우도 몇 번 있었던 공백에도 끊지 않고,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일, 다 안다고 했잖아요. 그 친구도 새령 씨가 보여준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을 거예요."

"네. 저 자꾸만 눈에 밟히는 교복이 끔찍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다르게 보여요. 애초에 그 소중함이 계속 곁에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것 같아요. 하하, 거짓말하는 거 아니구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그게 그려진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새 여러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앞으로는, 그 지독한 일에만 얽매이지 않을 다양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 채였다.

분명 괴로웠고, 여전히 다 아물지 못했어도 그녀는 나아가는 선택지로 이동했다.


"아, 그래서 저 요즘 다른 시간에는 글도 써요! 헤헤, 오늘 오후에 한세 소개로 이솔 언니 만나거든요? 그것도 기록으로 남길 거예요."

"오, 부러운데요?"

"제가 선생님 언급도 살짝 해볼게요. 저 봐주시는 선생님이 언니의 열혈구독자라고!"

"약속한 겁니다?"


진지한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린 새령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생활과 관련된 여러 대화를 더 나누고는 상담을 마친 그녀였다.


"흐아~ 한세, 빨리 보고 싶다."


남자친구를 떠올린 그녀가 기분 좋게 건물을 나섰다.

탁탁.

뚜벅뚜벅.

규칙적으로 울리는 지팡이 소리 뒤로 울리는 걸음 소리.

시각을 잃고 한껏 예민해진 청각은 그것을 충분히 들었고.

나름 공간을 마련했다고 생각했지만, 일정한 발걸음이 그녀를 뒤따랐다.


'한세나 은수는 아닌데-'


아는 사람의 걸음걸이는 분명히 아니었다.

같은 속도로 들려오는 소리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그때.

척.

새령의 어깨를 누군가 붙잡았다.


"헉-"

"누,누구세요?"

"앗. 죄송해요. 그게 잠시만요. 지팡이, 그렇게 휘두르면- 어?"


피하려다가 겨우 잡은 상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을 모르는 새령은 잔뜩 날선 채로 공중을 노려보았다.


"지나가다 우연히 봤는데, 너무 반가워서 그만. 저, 가끔씩 편의점 찾아갔던 재원이에요!"

"재,원이?"


여자의 앳된 목소리와 이름을 듣자 떠오르는 사람은 명백했다.

편의점에 일했을 당시, 자신에게 항상 행사 상품 중 하나를 쥐여주던 아이.

그리고 무시했던 지난날로 신경이 쓰였던 친구였다.


"이거 드리고 싶었어요!"

"아?"


비어있는 새령의 손을 덥석 잡은 재원이 따뜻한 음료를 올려두었다.

그 형태를 만진 새령은 짐작할 수 있었다.

두유.


"날씨, 춥잖아요! 핫팩 대신이지만 주머니에 넣고 가면 따뜻할 거예요!"

"괜,찮은데 너 먹지…"

"저도 있어요! 다음에 또 인사 할게요!"


재원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항상 보았던 그 모습이 절로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짧은 단발이 어울리는 아이.

얼굴에 있는 화상 자국에도 개의치 않고 환한 미소를 드러내며 손을 흔들던 그녀.


"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네."


쿨쩍.

추위에 코를 먹은 새령이 등을 돌렸다.

잠시 후.


"마중 나갈걸 그랬나?"

"아니야. 테리가 알려줘서 쉽게 찾았어."


새령이 가게로 들어오자 한세가 그녀를 반겼다.

함께 안으로 들어간 둘은 의자에 앉았다.


"이솔 누나는 차가 막혀서 30분 걸린다네."

"그래? 그러면 준비 좀 해야겠네."

"응? 에이~ 화장 안 해도 예쁜데~"

"이솔 언니, 처음 보는 건데 꾸며야지."


이미 테이블 위로 파우치를 꺼낸 새령을 더 말릴 수 없었다.

그녀가 단장하는 동안 한세는 주문을 마쳤다.


"누나도 놀라겠네~ 내 여친이 너무 예뻐서."

"치, 아부는~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언니랑 만나는데다 함께 콘텐츠도 할 수 있다니 떨려."

"나도 기대되긴 한데, 한편으론 걱정도 돼. 아무래도 유도는 직접 몸으로 하는 거다 보니까 다치진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도전하는 거야. 항상 그게 겁나서 못했었거든! 게다가 이솔 언니랑 같이 배울 수 있다니, 난 좋기만 한걸?"


들뜬 목소리를 듣자 한세는 걱정을 더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응원해줄 차례라는 것을 느낀 그가 이론적인 수업을 진행할 무렵.


"얘들아, 미안해~ 내가 늦었지?"

"와. 누나, 바로 찾아온 거야? 이거 진짜 주작 아냐?"

"에이~ 한세, 네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오셨겠지."

"맞아. 이쪽이 한세 여자친구구나? 듣던 대로 너무 예쁜데?"


새령을 만난 이솔이 반가운 미소로 그녀를 안았다.

그대로 푹 안긴 새령이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멋있는 언니와의 첫 만남.


"새령이 덕분에 조회 수 대박 나오겠어~"

"그럴까요?"

"두 시각장애인이 유도를 하는 건데, 다들 관심 갖지~ 그러니까 새령이도 자신감을 갖고 같이 잘 배워보자."

"네!"


두 사람이 콘텐츠 관련 대화를 하는 동안 주문시킨 음식을 가지러 간 한세는 뛰어난 균형감으로 쟁반을 들었다.

마치 평범한 사람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상호작용을 보이며 대화하는 둘을 본 그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음식을 배달해 주었다.

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더는 남아있지 않은 다리에 주춤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덕에 만난 새로운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행복할 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이재, 쭉 올라가는 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