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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자가 성공하는 사회

2024_이야챌린지_005

by 이야
임시 표지

"강 교수님. 인터뷰 영상, 잘 봤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긴장해서 말을 많이 더듬었지 말입니다."

"예? 영상에선 전혀 티가 안 나던데요? 지금 알았습니다."


사석에서 자리를 가진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수는 성우의 너스레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전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워낙 말을 깔끔하게 잘하셔서 방송사에 러브콜이 곧 쏟아지겠단 생각이 딱 들던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또 출연 제의를 받긴 했습니다."


이수의 말에 성우가 제 일처럼 기뻐했다.

평소 그를 존경하는 성우의 마음이 그대로 비친 것이다.

이수는 자신의 일처럼 좋아해 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강 교수님. 저도 이번 인터뷰를 인상 깊게 봐서 그런지, 교수님 같은 분이 미디어에 자주 비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우의 말에 이수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성우가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이번 저서가 대단했습니다. '유배자;성공을 말하다'라는 책이 출간되자마자 저도 바로 구매해 읽었지요."


그가 흥분한 것이 눈빛에서부터 드러났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빈 잔에 물을 따라주는 이수였다.


"고맙습니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물을 마시는 성우.

조용히 지켜보던 이수가 입을 연 것은 그가 컵을 내려놓았을 때다.


"저는 줄여서 '유다'라고 부르는 책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태생을 배신한 삶을 산 거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덕에 다름을 존중하는 방법을 알게 된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훌, 좋은 관점이군요."


이수가 황급히 말을 바꿔 대답했다.

훌륭하다는 말은 평가가 될 수도 있어 좋다고 말했지만, 큰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순 스쳤다.

다행히 그에 신경 쓰지 않았는지, 말끔한 미소를 보여주는 성우였다.


"저는 그 문장이 딱 뇌리에 박히더군요. 4장에서 나오는 '판타지는 회귀자가 성공할지 몰라도, 현실은 유배자가 성공하는 사회다'라는 문장 말입니다."

"오,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첫 장부터 유배자에 대한 내용이 쭉 나오지 않습니까? 특히 회귀자와 비교하면서 나오는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회귀자든, 유배자든 미래에서 돌아오는 것은 똑같지만, 유배자의 난이도가 더욱 괴랄하다는 것 말입니다."


서서히 흥분감이 올라오는 성우였지만, 아까만큼 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수도 그의 흐름을 구태여 끊지 않았다.


"물론 가장 난도 높은 이는 생존자겠지만, 그다음이 유배자라 분류하셨지요. 유배자는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만 알뿐, 미래를 알지는 못하니까요."


오히려 성우가 자체적으로 말을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사실 세상을 게임으로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생존자는 헬 모드, 유배자는 하드 모드, 회귀자는 노말 모드, 그리고 회귀자가 조력자까지 갖추면 이지 모드로 입장했다고 구분한 것이 신기했습니다."


너무 색달랐던 관점.

그것을 읽었을 당시, 성우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현실에서는 하드 모드까지만 구현되지만요."

"우리가 속한 우주의 한계죠."

"사실상 노말과 이지는 불가해한 영역이라고 선을 그으셨죠."

"확실히 그렇습니다. 유배자 역시 어떻게 보면 오류입니다. 생존자의 모드가 우연히 변경되는 거니까 말입니다."

"저서에서는 확률적으로 바뀐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이수가 시인했다.


"그렇게 적은 게 맞습니다만. 좀 더 명확히 하자면 동시성의 원리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모드 변경이 확률적으로 일어난다 해도 생존자에게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니 말입니다."

"…이해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24세에 모드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죠."


이수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눈썹을 찡그렸던 성우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변했다.

이것은 확실히 아는 내용이었다.

책에 자세히 적혀있는 경험담이니 말이다.


"전체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회귀자는 대체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이했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옵니다. 어떤 힘이 작용했든 간에. 그러니 여기서 유배자도 유추해 볼 수 있죠. 분명 저는 먼 미래, 추론하기로는 제가 74세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닥뜨렸을 겁니다."

"미라쿠토 계산법에 의해 50년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셨죠."

"예.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지만, 제가 '가온섬'을 여행했을 때 깨달았죠."


가온섬, 과거는 일본이라고 불렸던 나라.

그러나 잦은 자연재해로 더 이상 국가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끝내 세계연합은 그 영토를 한국에 편입시켰다.

그 일이 벌써 10년 전이라니.

새삼 세월의 흐름을 인지한 성우가 작게 침음했다.

그것을 듣지 못한 이수가 말을 이었다.


"저도 확실히 처음 '유배'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는 이상하게 느꼈습니다. 불현듯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을 때는 그냥 인지하지도 못하고 넘겼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정말 제 생활이 서서히, 꾸준히 달라지니 머릿속을 떠돌던 말이 적용되더군요."


유배.

죄인을 멀리 보내는 것.

74세에 최악의 삶을 맞이한 자신은 분명한 죄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에 한해서는 해당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수였다.


"특히 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전에, 어떤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한국으로 통일될 것이라는 거였죠.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생존자로, 헬 모드에 있습니다. 그 모드로 진입하는 데엔 한국인이 유일하죠."


이것은 선택권이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수는 상정하지 않았다.

직접 선택한 게 아니더라도 헬 모드를 마다할 수는 없으니.


"그래서 제 모드가 변경됐기 때문에 저는 배신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겁니다. 지금은 전 교수님 덕분에 상쇄되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죠."


이수의 입가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방 자취를 감췄지만, 성우의 눈에는 선명했다.


"사실 헬 모드에서도 성공하는 생존자는 나옵니다. 애초에 생존자로 명명한 것부터가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그렇지만 말 그대로 극악입니다. 그러니 모드 변경은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도 하죠."


사실상 하드 모드로의 변경만 가능하니, 이것은 난이도가 한 단계 정도 내려왔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헬 모드 뛰다가 하드로 바뀐 한국인 입장에서는 세상이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100% 성공을 보장한다.


"오늘 집에 가서 한 번 더 정독해야겠습니다."

"하하. 우리 모두는 인위적으로 다 유배자 혹은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50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50초로도 충분합니다."


둘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온 성우는 이수와 인사를 나눴다.

주차장으로 떠나는 강 교수와 달리, 교수실로 걸음을 재촉하는 성우.

그는 책상에 둔 책을 생각하는 한편으로 오늘의 대화를 돌아봤다.


"그래서 난이도를 대폭 낮추기보다는 자체적으로 헬 모드를 뛰는 친구들이 많은 거였군."


깨달음을 얻은 그는 강의 시간에 열심히 조는 학생들을 떠올렸다.

혹은 출석만 하고 슬그머니 떠나는 친구들도 그려본 성우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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