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쏟아지는 비에 쫓기듯 도망치는데, 기어코 잡아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만약 놓쳐버리면 영원히 이 속에 있어야 하는 걸까. 먹구름 아래 마땅하게 차지한 자리가 이리도 어울릴 수 있을까. 자꾸만 울리는 소리마저, 고까운 처지였다. 쏴아아. 스윗트 아카데미. 수업을 듣던 슈크랑은 창밖을 응시했다.
"-이번 학기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상."
교수가 나가자 학생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슈크랑을 건드리는 것은, 같은 학년의 재학생이었다. 구스몬 파라치아. 그가 솔깃할만한 소식을 꺼내들었다.
"황녀 전하, 그 얘기 들었어?" "아카데미에선 그렇게 부를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리고 또 어떤 가십인지는 몰라도 관심 없어." "에이~ 아닌 척하면서 열려있잖아. 게다가 지금 하는 얘기는 집중할 수밖에 없을걸?"
카스텔 제국의 황녀였지만, 그녀의 권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렇기에 들을 수 있는 내용은 항상 제한적. 그런 슈크랑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구스몬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무언가였다. 구스몬이 속삭였다.
"칸타오피 공작가에 대한 거거든."
꿀꺽. 지금 이 순간, 슈크랑의 최대 관심사. 어쩜 이렇게 딱 맞게 들고 오는 건지,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확한 거야?" "어허. 우리 파라치아 후작 가문은 팩트만 가져온다고." "글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건 알겠는데, 대체로 객관성이 떨어지는 팩트 아냐?" "큼. 먹고살려면 조금의 과정 정도는- 아니, 그래도 우린 사실 기반의 허구라고?" "그거 참 적절한 얘기다."
구스몬이 어깨를 떨었다. 언제나 살을 붙여 각색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면 신사적인 가문이라고 여기는 그로서는 황녀의 지적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흥. 모카스 공자에 대한 흥미는 다 식었나 보지?" "공작가에 대한 건 마음만 먹으면 알아볼 수 있어." "정말?"
명백한 도발. 슈크랑이 입술을 짓이겼다.
"아니." "그런데 날 이렇게 대해도 되겠어?" "안 될 건 뭔데. 네가 내 약점을 잡았다고 해서 내가 태도를 바꿀 거라 여겼다면 오산이야." "기대도 안 했거든? 이런 모습을 황태녀 전하가 봐야 하는데."
슈크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속을 충분히 뒤집었다 생각한 구스몬이 웃음을 보였다.
"깡으로 밀다가 언젠가 죽어, 구스몬." "황녀 전하는 그럴 배짱이 있다 해도 권력이 없잖아." "내가 아주 만만하지? 애초에 공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냐?"
쓸데없는 대화가 길어지자 슈크랑이 허를 찔렀다. 구스몬이 뻔뻔한 낯을 유지했다. 실제로 자세한 내막은 아직 파악 중이었다.
"그럴 리가. 공작가에 문제가 터지자마자 바로 알아본 가문이 파라치아인데." "그럼 증명해 보든지." "깜빡 속아넘어갈 뻔했지만, 꽁으로 알려주지. 빚으로 달아두면 좋겠지만. 곧 있으면 소공작의 작위가 바뀔 거야."
앞말은 가볍게 무시한 슈크랑이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시선이 쏠렸지만, 금방 관심이 식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오브콜스." "그런데 왜-" "오. 표정 좋은데? 그런 얼굴을 보여주면 황태녀도 조금은 견제할 텐데-"
구스몬의 너스레를 넘겨들은 슈크랑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떨리는 주먹을 회수한 그녀는 교실을 나갔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구스몬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나씩 가져오는 거야, 슈크랑. 그래야 자극적인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건물을 빠져나온 슈크랑은 주위를 둘러봤다.
'마차를 불러야 하는데-'
이럴 때조차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원하면 안 되는 세상이었을지도 몰랐다. 끝도 없이 끌어당기는 늪이 경멸스러워도 벗어날 수 없던 자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왜 알려주지 않았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물어보지 않은 거야.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도, 엄숙한 분위기가 낯설어서 무시한 거였어.'
한참 내려온 슈크랑의 눈이 곧 민간 마차를 찾았다. 마부를 붙잡은 그녀가 목적지를 말했다.
"거기까지 가려면-"
탁.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주머니까지 넘긴 뒤, 답도 듣지 않고 올라탔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웃음꽃을 피운 마부도 금방 말을 몰아 공작령으로 향했다. 마차 안.
"아. 이런 꼴로-"
오로지 한 사람만 그리던 머릿속이 정리되자 잔뜩 젖은 채로 앉아있는 자신이 보였다.
"후. 어차피 가까이 가지도 못할 테니까. 멀리서 보고만 오는 거야"
괜찮은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저택 앞에 도착한 뒤였다. 마부가 손을 내밀었지만, 혼자서 내린 슈크랑은 고고한 저택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정문에 일순 밀어내는 기분을 느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들어가도 되나요?"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곤란한 시선을 교환했다. 전해 들은 것은 없고, 빗속에 세워둘 수도 없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택에 발을 들인 슈크랑은 마음을 다잡았다.
'공자님이 괜찮으실리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오로지 모카스에게 모든 신경이 쏠린 그녀의 눈은 금방 그를 발견해냈다. 망설임 없이 방향을 튼 슈크랑이 기사에게서 멀어졌다. 당황한 기사가 붙잡을 새도 없이 이미 빗길을 뛰고 있는 그녀였다.
"하아- 오랜만에 뵙네요."
거친 숨을 몰아쉰 슈크랑이 모카스를 마주했다. 모카스의 푸른 눈이 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희망도 없이 꺼져버린 빛에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엄하다고 화라도 내면 조금은 나아질까?'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무도 벌써 그리운가 봐요. 그래서 가끔은 든든하기보다 그대로 내비쳐야 괜찮은 날도 있는 거겠죠?" "…돌아가십시오." "요 며칠 못 뵈어서 걱정했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지만, 그래도 전-"
할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온 거였다고. 어떤 진심은 쉬이 꺼내 보일 수 없는 법이었다. 뒤따라온 기사로 인해 그곳을 벗어난 슈크랑의 눈이 계속 모카스에게 머물렀지만. 모카스는 잿빛 하늘만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저택 안. 물기를 말린 슈크랑은 황실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공작부인과 공녀까지? 한순간에 가족을 전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상실. 그때부터 슈크랑의 출석 일수도 바뀌지 않게 되었다. 공작가로 등교한 슈크랑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모카스를 찾았다.
"은혜 갚는 거예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겠지만. 슈크랑은 진심이었다.
"공작부인께서도 이렇게 곁을 지켜주셨거든요."
한결같이 돌아가라 말하는 그였지만, 실제로 내쫓지는 않았다. 그저 같이 어깨를 적시며 하루를 보내는 일상에 감사할 수 있었다. 무너져내린 그가 이렇게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에게는 기적이었다.
"아무리 어른스럽게 굴어도 싫어하는 채소는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고도 하셨고요. 또 공부한다고 하면서 책에 낙서만 엄청 하는 것도-"
툭.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어깨에 닿는 게 비가 아닐 줄은 몰랐다. 떨리는 심장에 괜히 깨진 않을까. 숨을 참아보아도 자꾸만 요동치는 마음 한자락. 몇 시간 뒤, 궁에 돌아온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 힘내자. 오늘은 주무셨으니까-" "슈크랑 카스테라." "아,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아카데미가 우습나 봅니다?"
카슈라의 질책에 슈크랑이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남의 정혼자 집에 그리 방문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언젠가는 나올 얘기였다.
"정식으로는 공표되지 않은 일이잖아요." "아? 과거부터 이어진 약조였는데, 공표되지 않았으니 별거 아니다?" "그게 아니라-" "둘 다 여기서 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