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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Jan 29. 2024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

2024_이야챌린지_010

임시 표지

-이번에도 되게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적당한 두께에 나쁘지 않은 표지, 그리고 좋아하는 판타지 소재가 풍기는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었다. 다 읽고 누가 썼나 보니 처음 보는 외국 작가였다. 아이튼 하이. 나중에 따로 알아봐야겠다. 다시 책에 대해 말하자면 내용은 살짝 지루한 감이 있지만, 색다른 시각으로의 접근이 나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떤 세계는 악마가 없고, 오직 신의 분열체인 천사들만 있다는 첫 문장이 특히 그렇다. 천사들이 신의 분열체라니.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을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두 명의 대천사장 이름이 천사로서 어울리지만, 보통은 그렇게 부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독서프로그램 지원 사이트에 들어간 해담은 망설임 없이 글쓰기를 클릭했다.

그러고는 책에 대한 감상문을 쭉 적어나가고 있었다.


-제 1 대천사장은 피피엘, 제 2 대천사장은 오티엘이다. 참 친숙한 이름이지 않은가? 천사들의 이름이 보통 '-엘'로 끝나니까 그 단어들을 활용해 붙인 걸로 보인다. 이들은 둘 다 인간들로부터 '벨로(velo)'라는 재화를 얻고자 하는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거기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상은 피피엘이, 악마상은 오티엘이 가져간다. 이로써 저자가 신에 대한 선악을 판별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힐긋.

한 단락을 작성한 해담이 곁눈질로 책을 바라봤다.

제목은 '천사들의 보.좌'로 학교 도서관에서 냉큼 빌려와 읽은 소설책이다.


-아, 그리고 벨로란 단어도 재밌었다. 아마도 love를 이용해 만든 단위가 아닐까? 그래서 쭉 읽어보는 중에, 벨로의 분배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등이 나올 때는 머리가 살짝 아팠다. 그래서 넘기고 싶었던 구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읽었기에,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천사들의 수만큼 최소한의 벨로(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최소 생활비용)는 공통 지급하고, 노동 여부에 따라 합당한 벨로와 그 성과에 맞는 벨로 등을 추가로 지급한다고 한다. 참 이상적인 얘기다. 천사들이 그런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재화를 인간으로부터 얻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던 해담의 손이 멈췄다.

위에서부터 빠르게 확인한 그녀는 오타를 수정했다.


"하아. 마저 써야 하는데 집중이 딱 끊기네."


책상에 올려둔 주스로 목을 축인 그녀가 눈을 비볐다.

손을 내리자 모니터 뒤로 지난 학기에 받은 상장이 보였다.


"빨리 써야지. 이번에도 최우수상은 내 거야!"


입학하고 난 다음, 도서관을 뺀질 나게 드나든 그녀는 다독상에서 장려를 받았다.

반면 이 독후감 사이트와 연계해 받는 상에서는 최우수상의 주인이었다.

짝짝.

해담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더 많이 읽어서 다독상에서도 최우수 받아야 하니까 빨리 쓰고 다른 거 빌려와야지!"


장려였기에 안타깝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다.

그래도 2학기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한 해담이 다시 감상문에 집중했다.


-그러면 피피엘과 오티엘의 서로 다른 두 방식은 무엇일까? 일단 둘의 근본은 같았다. 둘 다 인간에게 벨로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벨로란 단어로 쓰였지만, 사실상 그것은 신앙심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만 신앙심의 개념이 본래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었다. 피피엘의 경우는 정도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관념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감사함이다.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보조한다. 아이튼의 이야기에 따르면 평화로운 일상 속 우리의 곁을 지키는 것은 피피엘 쪽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오티엘의 경우에서 그 관념이 확연히 달라진다. 보통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보편적이라면 이들은 신에 대한 도전마저도 벨로로 환산할 수 있었다. 가령 한낱 인간이 신을 넘어서겠다는 생각, 그리고 신보다 우월하다는 오만함과 우매함 역시도 결국 인간들이 주는 재화에 불과했다.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글을 해담이 재차 확인했다.

혹시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고칠 생각으로 쳐다본 그녀는 이렇다 할 것은 찾지 못했다.


-이 벨로라는 것은 신앙심으로 치환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저 '신(정의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연결되면 얻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들의 이야기에 신이 등장한다면 그것조차 천사들이 사용할 벨로가 되고, 신을 부정하는 것도 결국 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때 오티엘의 천사들은 그런 마음을 유도한다. 가령 인간들의 역사에 전쟁이 빠지지 않는 것 역시 그들의 수였다. 힘들수록 의지할 곳을 찾는 인간들의 나약함을, 그리고 그런 것마저 이용하려 드는 영악함을 이끌어낸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마냥 좋은 방법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인 벨로 생산이 가능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줄어든 인구로 획득 가능한 최댓값도 감소한다. 이에 대해 피피엘이 오티엘에게 일시적인 방법이라 일침 하기도 한다.


거기까지 쓴 해담의 눈이 시계로 향했다.


"으. 서둘러야겠다."


스스로도 책벌레라 부르는 그녀였지만, 공부와 숙제를 하기는 해야 했다.

특히 지금이 시험 기간이란 것을 떠올리면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래도 해담의 손은 여전히 키보드 위에 있었다.


-지금도 내가 이것들을 향유하면서 천사들에게 벨로를 바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재밌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 또한 생산만 할 수 없다. 생산과 비생산의 균형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생산에 투자하지 않으면 잘못됐다는 인식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데 신과 연관된 어떤 걸 할 때마다 벨로가 생산된다니 내 잡생각이 꼭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 저자는 신에 대해 생각하고 또 몰두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하면 또 마냥 비생산적인 것은 아니기도 하다. 이래서 이 세계관이 수많은 설정 중 진짜 현실에 부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흠. 기회가 된다면 나도 저자의 이름을 따서 제 3 대천사장인 하이엘을 만들어 이야기를 써볼까? 지금은 시험 기간이니 어렵고, 시험이 끝나고 좀 널널해지면 한 번 써봐야겠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쓰는 것도 정말 좋아하니 말이다. 지금 나온 구상은 이들을 한량으로 만드는 것이다. 피피엘처럼 돕지도 않고, 오티엘처럼 괴롭히지도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천사들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왜냐하면 나는 대체로 신에 대한 이미지가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 사실 나도 부정하는 쪽이긴 한데,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신은 무엇도 하지 않는 것. 그래야 인간인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간혹 신이 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주말에는 자주 신이 되고 있는데, 이번 주부터는 좀 더 알차게 보내야겠다. 쓰다 보니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이번 책은 신, 천사, 악마 등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따로 2부가 나올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로 아이튼 하이라는 작가의 책을 좀 더 살펴봐야겠다. 끝!


끼익.

해담의 몸이 의자와 함께 뒤로 밀렸다.


"으아. 다 썼다! 올려두고, 내일 반납하면서 다른 거 빌려와야지. 아니, 정신 차려. 시험공부해야지."


꺼내둔 책을 가방에 집어넣은 그녀가 교과서와 문제지를 들고 왔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공부할 시간이었다.

3시간 후.

중간중간 딴짓도 했지만, 숙제와 공부할 분량을 마친 그녀가 밤늦게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등교한 그녀는 도서관을 찾았다.

역시 열려있는 문.


'이번에는 뭐 읽지?'


어릴 때부터 소설만 읽는 그녀는 문학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마음에 드는 표지나 제목이 있나 살펴보고 있을 무렵.

툭.


'뭐야? 왜 혼자 떨어져? 아닌가? 내가 건드렸나?'


떨어진 책을 주우러 허리를 숙인 해담이 팔을 뻗었다.

탁탁.

바닥에 닿은 면을 털고 넣으려는 그때.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엇."


도서관이란 사실을 인지하고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또 아이튼 하이의 책이네. 읽어볼까? 표지도 뭐 괜찮고. 제목은-'


곧 큼직한 글씨가 눈에 담겼다.

그녀가 좋아하는 유형의 제목이었다.


'리테스터의 계약? 이거 빌려야겠다.'


빠른 결정 후 도서관을 나온 그녀는 복도를 걸으며 책을 펼쳤다.

그때였다.

넘나드는 종이 속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손길이 그녀를 덮친 순간이었다.

타악-

차차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시간.

사라진 자리에는 하나의 명찰만이 놓여 있었다.

이해담.

곧 그 노란 명찰을 회수한 손의 주인이 낮게 읊조렸다.


"남의 물주를 데려가다니. 재밌네?"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천사, 루시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해담의 위치를 파악한 그녀의 안색이 더욱 사나워졌다.

왜 하필.

분한 얼굴의 루시엘은 나타날 때처럼 순식간에 자리를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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