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썩. 침대로 떨어진 혜림은 쥐고 있던 폰을 내려놨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처참한 반응이었다.
"역시 나는."
이번에 해와 달 오누이를 각색해서 쓴 동화. 인아의 이야기가 담긴 '이 호랑이는 안전하답니다!'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처럼 저조했다. 작가를 꿈꾸는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정말 못 쓰긴 했어. 분량 문제로 뒤에는 거의 날려버렸잖아."
워낙 길었던 얘기를 3,000자에 맞추느라 지워진 내용이 많았다. 그로 인해 흐름이 끊기는 구간도 더러 생겼다. 하지만 당장은 그게 최선이었다.
"남들은 한정된 분량에도 재밌게 잘 쓰는데, 난 왜 어려울까?"
사실 정답은 간단했다. 더 읽고, 더 쓰면서 느리지만 착실히 발전해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 그렇지만 찾아오는 조급함이 쓰리긴 했다.
"집에만 있다간 저 깊이 꺼지겠어. 카페라도 다녀와야지."
곧장 몸을 일으킨 혜림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촤악. 세수를 마친 그녀가 금방 나갈 채비를 마쳤다. 꼬옥 따뜻하게 입은 옷 사이로 지갑까지 야무지게 챙긴 뒤.
"괜히 나왔나?"
서늘한 공기와 함께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드러난 살결을 매섭게 스쳤다. 몸을 웅크린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이 없는 이유가 있구나."
간신히 추위를 떨친 그녀의 손이 카페 문을 밀었다. 화아아. 순식간에 달라지는 흐름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음. 뭐 먹지?'
바로 키오스크 앞으로 간 그녀가 여러 음료 사이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혜림을 향해 다가오는 손이 있었으니.
"난 오곡라떼~" "어? 뭐야? 최국희?"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그냥 집에 있으면 우울할 것 같아서~"
친근한 얼굴을 만난 혜림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음료도 선택했다. 그와 동시에 불어난 가격에 살짝 눈썹이 떨렸지만, 지갑을 꺼낸 그녀가 카드를 챙기던 때. 이미 결제는 끝나있었다.
"뭐야~ 내가 사려고 했는데?" "됐네요. 오랜만에 보는데 제가 사드립죠. 대신 나랑 놀아줘~" "나야 좋지~ 고마워!"
우연히 만난 국희와 자리를 잡은 혜림은 따뜻한 실내에 미소가 나왔다. 행복, 별거 없다. 뜨뜻함에 풀어지는 마음 앞, 국희의 옆얼굴이 보였다.
'뭘 보는 거지? 아~ 저분한테 관심 있나?'
시선을 따라 움직이니 카페 직원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한창 정리를 하고 있었다. 국희의 관심사를 캐치한 혜림이 속으로 웃음을 흘릴 때.
"저 사람이 나랑 협업한 카페 사장님이야~" "와, 정말?"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국희였다. 그녀의 근황을 익히 알고 있던 혜림은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아. 나도 진짜 잘 쓰고 있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캐릭터도 더 귀엽게 구현됐고, 또 거기서 마음에 맞는 사람도 찾았다?" "캐릭터야, 네가 의견 준 덕분에 수월하게 만들었지. 그보다 드디어 혜림이도 나 말고 다른 친구가 생겼구나. 장하다." "우이. 내가 너하고만 친구인 줄 알아?"
혜림의 소개에 굳었던 안색이 풀어진 리나가 국희 옆에 있는 의자를 꺼냈다. 요즘 자주 사용했던 빛남이들 속 인연을 또 만날 줄은. 왠지 신기한 기분을 느낀 리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어, 그러면 차림새 아니 리나라고 해도 될까요?" "말 놓아도 돼요!" "진짜? 그럼 리나 너도 편하게 해!"
혜림과 리나가 서로 상기할 무렵. 마침 울리는 진동벨을 챙긴 국희가 음료를 가지러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혜림이 리나를 향해 더욱 말을 걸었다.
"리나야, 너도 그거 알고 있어?" "응?" "국희가 여기 카페 사장님, 좋아하는 것 같아." "콜록."
은근한 속삭임에 당황한 리나가 다시 기침을 터뜨렸다. 그에 진심으로 걱정된 혜림이 물이라도 가져오려는 찰나.
"그건 아닐 거야." "어? 괜찮아?" "오빠는 언니가 있는걸." "응? 오빠? 언니?"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실까?"
자초지종을 들은 국희가 호탕한 웃음을 선보였다. 괜히 쪽팔려지는 것은 혜림이었다.
'아, 왜 그런 오해를 했을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 그러나 국희가 그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아~ 정혜림 땜에 내가 나쁜 사람이 될 뻔했네~ 임자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미안해~ 아니, 아까 네가 계속 보길래 그런 건 줄 알았지. 사장님 얼굴에 개연성이 있잖아." "그건 너한테 말해주려고 어디 있나 살핀 거지. 전에 사장님 궁금해했잖아." "그랬지. 내가 죄인이야. 디저트는 내가 쏠게."
친구들의 대화를 재밌게 듣던 리나가 손을 들었다.
"그, 내가 만든 거 먹지 않을래?" "아, 맞아. 베이킹한다고 했지?"
자신과 나눈 얘기를 기억해 주는 혜림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본 리나가 수줍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나 자신이 만든 디저트를 챙겨왔다.
"그런데 그냥 먹어도 돼? 계산은-" "괜찮아! 내가 만든 건 아직 판매하는 게 아니라서! 보통 소중한 사람들이 같이 먹어주는데-" "소중한 사람-?"
이번에 감격한 이는 혜림이었다. 반면 리나는 혹 부담이 됐을까 뒤늦게 아차 했지만.
"와~ 내가 몽땅 먹을래!" "무슨 소리야. 나도 먹을 거거든?"
엄청난 환대에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발견한 목하의 눈동자에도 많은 것들이 담겼고.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동업자인 민수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정도면 팔아도 되는 거 아니야? 너무 맛있는데?" "아직 배우는 단계라서. 그런데 나도 빨리 내 디저트를 내놓고 싶어!" "리나 실력이면 금방 될 거야~"
금세 친해진 둘을 흐뭇하게 바라본 국희가 오곡라떼를 들이켰다. 한편 혜림은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맞다. 리나, 너도 이번에 글 썼다고 했지?" "응, 그런데 난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에이! 일단 쓰는 것부터가 대단한 거야~ 궁금하다. 우리 서로 보여줄래? 나도 최근에 쓴 동화가 있는데." "아, 그 호랑이 얘기! 벌써 완성한 거야?"
기대에 찬 눈에 용기를 얻은 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쓴 이야기를 보고 싶었던 리나는 잠시 고민됐지만, 금방 결정할 수 있었다.
"로판을 썼구나?" "응. 나도 민수 오빠 따라 동화로 시작하긴 했는데, 이쪽이 더 관심이 가서- 그치만 아마 엄청 엉성할 거야." "일단 읽어볼게!"
업로드된 자신의 것과는 달리, 서랍에 있는 리나의 글을 읽기 시작한 혜림. 두 사람의 때아닌 독서에도 개의치 않은 국희가 어플에 접속했다. 주인님을 애타게 기다린 빛남이들을 돌보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일 때. 리나와 혜림의 눈동자 역시 그랬다.
"와~ 정말 처음 도전하는 거, 맞아? 이 분량에 이렇게 담아낼 수 있다니. 대단하다~"
먼저 감상을 끝낸 혜림이 소감을 밝혔다. 이윽고 혜림의 동화도 다 읽은 리나가 눈을 빛냈다.
"혜림이 너야말로 굉장해. 내가 알던 동화가 이렇게 각색될 수 있다니. 이런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헤헤, 그냥 짬뽕이긴 한데. 약간 원하는 부분만 추출해서 쓰면 된달까?" "되게 자연스럽게 엮여서 놀랐어. 나는 약간 꿈보다 해몽? 같은 느낌이라 못 썼는데 말이야."
칭찬을 들은 혜림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곧 우울에 빠진 리나를 보자 입꼬리가 내려갔다.
"무슨 소리야! 난 바로 슈크랑한테 빠져들었는걸? 한 편에 다 나오진 않았지만, 그들의 서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정말? 그럼 슈크랑의 이야기를 좀 더 써봐야겠다. 고마워!"
서로에게 용기와 위로가 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국희는 그런 관계 속에서 소외감보다는 감사함을 느꼈다. 어느새 사람과 소통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리나의 옆얼굴이 대견했고. 또 장난스러운 말이었지만, 분명 친구가 없는 혜림의 인간관계가 넓어지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한창 수다를 떨던 와중. 첫 만남이었지만, 얘기가 끊이지 않던 둘은 조용히 앉아있는 국희를 뒤늦게 챙기기 시작했다. 국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의 노력이 가상해 자신의 근황을 얘기해 주었다.
"고백? 동생 친구가?" "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몰랐어."
눈을 반짝이는 두 사람에게 잡힌 국희는 아차 싶었지만, 어느새 그 얘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사정을 듣던 혜림은 오늘 외출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갈 때, 마주할 바람이 걱정되긴 했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