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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결국 결혼한다

2024_이야챌린지_012

by 이야
임시 표지

'대체 왜 나를?'


생각에 잠긴 벨리샤를 향해 불쑥 손이 다가왔다.


"벨리샤, 다리 좀 들어줄래?"


걸레를 든 로잘린의 요청에 발을 올린 벨리샤가 소파에 기댔다.

2년.

벨리샤로 빙의하고 지난 시간.

그런데 자신이 왕자비가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어.'


유리구두의 주인은 벨리샤였으나, 족욕으로 회피한 덕분에 다른 이가 왕자의 혼약자가 되었다.

마녀의 힘으로 특수 제작된 신발에 어떻게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넘긴 일.

다만,


'전쟁이 1년이나 앞당겨지다니. 여유를 부릴 게 아니었어.'


그렇다.

본래대로라면 내년에 있을 일이 일찍 터진 탓에 그녀는 왕국을 떠날 충분한 자금을 모으지 못했다.

애초에 자작에 불과한 귀족가의 영애가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겨우 고심한 일로 포문은 열었지만 호황은 이제 시작이었다.


'적어도 6개월이면 됐는데. 하아-'


짜악.

그녀가 자신의 볼을 때렸다.

이미 늦은 사안.

지금은 다음을 준비할 때였다.

벨리샤는 다시금 인장을 살폈다.


'어쨌든 왕국을 뜨긴 하겠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조잡하게 썼다 해도 이곳저곳에서 모르는 사람들만 튀어나오는 게 말이 돼?'


철없던 시절, 막 썼던 이야기.

그리고 기억 속에서도 거의 희미해졌던 그것은 워낙 단편인지라 어렴풋한 설정만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곳에 빙의된 입장에서 이 세계는 소설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거기에는 왕자비가 되지 않은 자신의 책임도 있겠지만.


'죽을 자리에 알고도 가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런데 플비아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왕실의 대부분이 황태자 손에 척결됐는데?'


전쟁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제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로 인해 황태자인 네코스는 금방 왕실을 점령했고, 그에 대한 처분은 즉각적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지금의 상황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냥 운이 좋은 건가? 그 황태자가 암살되다니. 그런 미래가 있는 줄은 몰랐네.'


벨리샤의 처형 이후로는 생각하지 않은 골자였다.

황태자를 견제하는 세력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자신.

제페토 아디오스.

네피오 제국의 2황자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그는 왕국을 대공에게 물려주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속국으로 편입한 것도 아니야. 오제트 클라리스였나? 결과적으로 참패한 왕실이 제국에게 들어갔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왕위만 바뀐 거니 마냥 여론이 나쁜 것도 아니지. 게다가 왕자비였던 플비아를 바로 왕비로 맞이한 것도-'


싸아아-

소름이 쫙 올라왔다.

어쩌면 이조차도 사전에 다 계획된 게 아니었을까?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플비아의 발을 유리구두에 맞게 변형한 걸지도 모르잖아? 뭐, 비약적인 생각이긴 한데 사실상 그 신발의 주인이 나말고도 있다는 게 좀 뭐랄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이상하긴 했잖아.'


까딱.

벨리샤의 눈이 제발을 훑었다.

자신의 오른발 위의 점 하나.

왼발은 몰라도 오른쪽 신발에 맞으려면 저 점의 자리가 딱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니면,


'티가 날 테니까. 그 유리구두에서 분명 저 점의 자리는 투명했어. 나는 다리가 퉁퉁 부어서 위치가 살짝 빗나갔지. 그때 신발을 신겨주던 신하가 의아하게 봤지만, 다행히 왕자한테는 그 정도 눈썰미는 없었지.'


벨리샤의 생각이 이제는 죽고 없는 다미트에게로 튀었다.

만약 자신이 진짜 벨리샤였다면 남편이 되었을 그.

하지만 빙의한 자신은 처음부터 그와 남이었다.


'이런 점이 있는 발이 또 있다니. 플비아랑 내가 쌍둥이라도 되나? 그게 아니라면 제페토의 마법이었을까? 우씨. 그렇든지 말든지 원래라면 상관없을 텐데. 왜 하필 날 지목한 거야!!'


머리를 감싸 안은 그녀가 남몰래 괴로움을 삼키고 있을 무렵.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캐서린이 준비한 찻잔을 내려두었다.


"벨리샤, 아까 부탁했던 꿀물이야. 목은 좀 괜찮니?"

"콜록. 아직 따갑네요. 그보다 오늘은 언니들이 다 어머니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래야지. 네가 아픈데 우리가 가서 일해야지!"

"네, 부탁할게요. 콜록."


로잘린을 불러 출근하는 캐서린을 바라보던 벨리샤가 시선을 내렸다.

편지를 읽자마자 시작한 꾀병.

그래서 어떻게 미뤄둘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지. 아니, 오제트. 그 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제국에 보내려는 거야? 새로운 황태자의 약혼자로 자작 가문 영애가 가당키냐 하냐고!'


이건 네피오 황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벨리샤는집무실로 이동했다.


'뭔 미친 생각인지는 몰라도 왕명을 피할 수는 없지. 우씨. 번 돈을 옷 사는 데 써야 한다니. 아까워!'


편지를 보낸 뒤, 외출한 그녀는 쇼핑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많은 돈을 쓰는 중이었다.


'큼큼. 이 정도는 입어야 무시당하지 않겠지.'


쭉 거리를 돌아 여러 벌의 드레스를 구매한 벨리샤는 한창 일하는 헤이젤과 눈이 마주쳤지만.

언제나처럼 뻔뻔하게 대응했고, 이미 벨리샤에게 기강 잡힌 계모와 언니들은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블라우스 과일 가게.


"언니가 보기에도 벨리샤가 아픈 것 같진 않지?"

"그래 보이긴 했지. 그런데 어쩌겠어? 그 괴물 황자 아니 황태자한테 팔리듯 시집가는 건데, 그 정도 몸부림은 쳐야지. 나였어도-"

"지금까진 걔가 무서워서 일하긴 했는데, 이제는 좀 불쌍하니까 떠날 때까진 잘해주고 싶더라고."

"확실히 제국으로 갈 때까진 잘해주자. 이 과일 가게도 엄마한테 넘겼다잖아. 솔직히 손수건에 과일을 그려 넣어서 팔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인기 있었고."

"너희들, 언제까지 놀 거야?"


헤이젤의 성화에 두 딸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지만, 둘 모두 결론은 같았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벨리샤는 빼앗은 1층 방의 욕실로 직행했다.


"결혼. 하긴 하는구나. 물론 갔다가 팽 당할 수도 있지만. 아, 이러다가 또 전쟁 일어나는 거 아니야?"


황태자에게는 왕국의 공작 가문도 성이 차지 않을 수 있는데, 하물며 자작 가문이다.

괜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나 잡고 결혼부터 하는 건데. 누가 알았겠냐고.'


나비의 날갯짓이 이렇게 큰 돌풍을 불고 올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혹 자신을 무시했다고 처형당하진 않을까.

섬뜩한 결론에 도달한 벨리샤가 자신의 목을 문질렀다.


"아. 마녀는 또 안 나타나나? 혹시라도 마녀가 또 찾아오면 어떻게든 무산시킬 텐데. 2년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올 린 없겠지."


푸우우-

그대로 물에 잠긴 벨리샤가 꼬옥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야 마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녀가 수면 위로 올라왔을 즘.

가족들도 집에 돌아왔다.


"일단 배부터 채워야겠네."


며칠 뒤.

왕실에서 보내온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향하는 벨리샤는 죽을 맛이었다.

마차를 타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왕실 마차인데도 이렇게 승차감이 좋지 않아서야. 아빠 차, 그립다. 아빠랑 그렇게 싸우는 게 아니었는데.'


빙의되고 하루에도 수십 번,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어야지.

돌아갈 방법도, 수단도 없는데 무턱대고 죽기에는.


'아니다. 그냥 그럴 걸 그랬나? 처형 당하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을까? 벨리샤한테 아무리 사죄해도 여기였는데, 그대로 따랐어야 했나?'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동안, 마차는 왕궁 지척까지 도달했다.

덜컹.


'으아. 제국까지도 이렇게 가야 하면 그냥 죽을게.'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저려오는 엉덩이가 너무나 아프고 불편했다.

K-고딩으로 오래 앉아있던 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흐으으. 수능이 그리워질 줄이야. 하긴. 대학 생활도 못하고 끌려오다니! 최악이다. 난 뭣하러 12년을 투자한 거람?'


불만이 가득한 벨리샤의 심정을 모르는 이들은 먼 길 오느라 고생한 그녀의 수고도 짚지 않고, 곧장 알현실로 안내했다.


'참나. 황태자비가 되면 자동차부터 개발해달라고 할까? 응~ 그런 지식은 없어.'


헛공부를 한 지난날이 후회되어도 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우뚝.

기사가 안내를 마치자 비로소 문 앞에 선 벨리샤가 심호흡을 했다.

파아앗-

곧 문이 열리자 저 멀리 앉아있는 왕과 그 주변에 서 있는 측근들이 보였다.

꿀꺽.

위압감은 더 이상의 생각을 허락지 않았다.

뚜벅뚜벅.


'왕실 예법? 이게 맞나? 작년에 좀 알아보긴 했는데.'


혹 실수할까 천천히 행동하는 그녀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고.

지그시 바라본 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벨리샤 블라우스. 그대는 나흘 후 완성되는 마법진을 통해 제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공동을 울리는 목소리는 꽤나 근엄했다.

바짝 침이 말랐지만, 그 위엄에도 할 말은 해야 했다.


"폐하, 가문의 영광된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혹 여쭤도 되겠습니까?"

"좋다."

"블라우스 역시 긍지 높은 가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왕국의 명망 있는 가문과 비교하기에는 분명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저희 가문, 그리고 그 가문의 막내딸이 어찌하여 폐하의 안목에 들 수 있었는지 도통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혹 그에 대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돌려 물었지만, 요는 이거였다.

그 많은 가문 중에 왜 하필 자작 가문, 나아가 집안의 막내를 꼽았냐는 거.


'그래. 자작 가문,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아직 미혼인 언니들을 두고 나를 골랐다? 이거 뭔가 구리거든.'


불순한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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