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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파티

한 조각의 케이크

2024_이야챌린지_013

by 이야
임시 표지

"안녕, 페이지. 요즘 신데렐라에 푹 빠졌다더니 여기서 놀고 있었구나?"

"지금껏 여러 각색된 이야기를 돌았는데, 이렇게까지 불쾌했던 적은 처음이네요."


한껏 찌푸린 얼굴이 마녀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에 라라벨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날 불렀구나? 마침 물색 중이긴 했는데."

"부탁드려요. 마음에 든 이가 그런 식으로-"


빠득.

페이지가 숨을 골랐다.


"그렇게 죽은 게 정말이지 괴롭거든요. 당분간은 신데렐라를 위해 일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럼 나도 원하는 게 있지. 탐스러운 곳의 주인이 되어줘."

"그 끝에 또 비슷한 감정을 느끼진 않겠죠?"

"적어도 아직은 해당사항 없음이야. 다만 곧 생길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녀에게는 이름이 있잖니. 아마 쉽진 않겠지?"

"하긴. 이에 비하면 각색의 여지가 확실히 적겠네요. 좋아요."


거래 성립.

페이지는 곧바로 세계를 떠났다.

한편 자리에 남은 라라벨은 조용히 음미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네. 마음에 들어."


탁.

손가락을 튕기자 페이지가 있던 자리에 다른 이가 나타났다.

소환된 자는 제 목을 매만졌다.


"어떻게-"

"살아있냐고? 아니. 넌 죽었어. 황태자 네코스 손에. 왜? 네가 왕실의 일원이라서 같이 묻은 거지."

"-저에게 정말 어울리는 끝이네요."


벨리샤는 허무하고도 허탈한 미소를 터뜨렸다.

오랜 시달림 끝.

희망 따위 품지도 않은 자신에게 찾아온 마녀 덕분에 무도회를 갔던 것까지만 바랐어야 하나.

감히 그 신에 발을 맞추고, 왕자의 곁에 선 게 그리도 큰 죄악이었을까.

어째서 드디어 마주한 행복은 이리도 금방 꺼져버리는 건지.


"3년. 그게 저에게 주어지는 기한인가 봐요. 어머니도 제가 세 살 때 돌아가셨죠."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시절.

엄마의 환한 웃음 뒤로 함께했던 자신은 옅어지고 엉망이 된 채 수고하는 삶만이 남았다.

그 시절을 벗어났다고 기뻐했던 것도 고작 3년이면 질 허무였다.


"네가 계모와 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건 꽤나 흔한 포인트야. 다만"

"흔하다고요? 세상에는 그런 게 비일비재했군요. 왕자비였을 때, 권력에 취해 혼자 행복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와 같은 이들을 돌봤어야 하는데-"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벨리샤의 땅굴에 라라벨은 거침없이 침입했다.


"뭐,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그래도 너의 처형식은 특수한 거야. 웬만한 신데렐라는 그냥 행복하게 끝나거든."

"잿덩이. 정말 어울리는 별칭이네요. 그런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요?"

"마냥 순탄하진 않다고 해도 거의 그렇게 결론 나긴 해. 하지만 너의 경우에는, 그래. 이 세계는 철저히 너를 무너뜨리기 위해 완성된 거야."


상대의 대답에 벨리샤의 눈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비로소 그녀의 이름을 듣지 못한 게 스쳤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째서. 제가 그렇게도 싫었던 가요?"

"네가 싫었다기보다는 너의 보장된 행복을 시기했던 거지."

"언니들이 그런 걸까요?"

"아니. 걔네들도, 이용당한 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들을 이용- 무서운 분이 절 싫어하는 거군요."


금세 슬픈 눈에 잠기는 벨리샤.

반면 라라벨은 눈을 빛냈다.


"그렇지. 너에게 안배된 행복을 보고 싶지 않았던 자는 오직 자신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널 죽음으로 몰았거든."

"-괴로움? 그분은 저로 인해 그랬던 건가요?"

"그럴 리가. 그냥 화풀이 대상으로 네가 딱이었던 거야."


어질.

자신은 분명 죽었는데.

그리고 저 여자도 자신이 죽었다 공인했는데.

어째서 머리는 이리도 어지러운지.

속상했다.

누군가 자신을 그저 이유도 없이 싫어한다는 게.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속이 끓었다.


'왜? 난 왜 그런 괴롭힘을 받아야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자신을 업신여기던 계모와 언니들에게도 가끔 울컥했지만.

누군지도 모를 미지의 상대에게는 더욱 그랬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자신에게 놓인 화살이 어느 때보다 가장 지독하게 느껴졌다.


"대체 누군가요?"

"이 세계를 찾은 작가."

"작가?"

"신과 내통한 이라고도 하지. 하지만 만물을 사랑하는 신이 행한 건 그저 단 한 번 물방울을 떨군 것뿐이야. 그걸로 홍수를 일으킨 것은 작가라고 할 수 있지."


벨리샤로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워낙 진지한 눈을 마주하자 그 말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요?"

"그냥 숫자로 보면 너랑 동갑인 애?"


벨리샤의 안색은 기묘했다.

그녀는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또래의 여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비웃고 무시했던 것을.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보자, 라라벨이 싱긋 웃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복수.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덜덜 떨던 것도 잠시.

왕자비로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붉은 선혈들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윽고 날 선 검이 자신을 그었을 때는.


"커억-"

"역시 해야겠지, 복수?"


선명한 순간에 짓눌린 벨리샤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라라벨은 그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잦아든 떨림 속 벨리샤는 직시했다.


"원,망스러웠어요.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그래서 내 아픔을 돌려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괴로움을 덜겠다고 복수한다면 내 불행이 정당한 게 될까 봐, 할 수 없겠어요."


라라벨은 그 답변에도 여유로웠다.

오히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채였다.


"그거 좋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내가 초대한 사람은 너뿐만이 아니거든."


주위를 둘러본 벨리샤의 눈에는 오직 상대만이 보였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아. 그렇구나. 아쉽게 됐네. 나는 네가 널 쏙 빼닮은 딸을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딸?

시야가 흐릿하게 변했다.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그럼 대화는 이제 끝. 정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강요하고 싶진 않으니까."


라라벨이 곧 그녀를 돌려보낼 기세로 손을 들었다.

어느새 목에서 배로 내려온 손은, 그녀의 눈을 번뜩이게 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라라벨은 확실히 입가를 움직였다.


"내 아이가, 그 아이도 작가에게는 그저 소모품이었습니까?"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 그나마 황태자는 신사적이네? 다른 이들은 어김없이 배를 뚫던데 너만 목을 찌른 걸 보면."


느릿하게 재생되는 기억은 보여줬다.

상대의 말이 분명한 진실이라고.

황태자가 알았다는 것은.

어쩌면 작가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절대 용서 못해."


달라진 기세가 흡족스러웠다.

라라벨은 여운을 즐겼다.


"그러니, 꼭 더 많이 바치도록 해."


이젠 네가 훨씬 유리하니까.

빈자리를 지켜본 라라벨이 곧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다연아, 문 좀 열어보렴! 아빠가 잘못했어! 우리 딸이 좋아하는 케이크 좀 구웠는데, 같이 먹고 풀자~"


벨리샤, 아니 다연은 거울 속 자신을 노려봤다.

이 낯짝이었구나.

감히 내 아이를 죽인 이가.


"반드시 너보다 더 많이, 빨리 도달할 거야. 그래서 너도 가장 소중한 걸 잃어봐."


딸이 나오기를 하염없이 소원하는 준호는, 벌컥 열리는 문에 상체를 휘청였다.

그런 아빠를 잡아주는 다연의 손은 꽤나 든든했다.


"저야말로 잘못했어요. 아빠. 그러니까 우리 빨리 케이크, 먹어요!"


밝아진 딸의 표정에 마음을 놓은 그가 식탁으로 이끌었다.

그를 따라가는 다연의 눈은 전과는 달랐다.


'기다려. 네 눈앞에서 가족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줄 테니까.'


그 속내는 감추고, 낯선 자리에 앉은 다연은 주먹을 쥐었다.

흘러들어오는 그녀의 기억 속, 자신의 이야기를 쓰던 그때마저 비틀렸지만.


"딸, 운전면허는 언제 딸 거야?"

"아빠 말대로 천천히 딸게요."

"정말? 빨리 몰고 싶다고 하더니!"

"하지만 아빠 말이 맞아요. 결국 따긴 하겠지만 서두를 필욘 없잖아요."

"아휴~ 잘 생각했어. 위험하지, 위험해!"


참 시답잖은 걸로 싸우는구나.

개념을 이해한 그녀는 고작 이런 걸로 칭얼거리는 이전의 작가가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사고로 아내를 잃은 그로서는 걱정되는 게 당연했는데, 그런 건 고려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사려던 인간이 분명 잘못한 거였다.

그런데도 먼저 사과하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네. 딱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개같아.'


작가가 가끔씩 쓰던 말을 읊은 다연은 입술을 씹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맛에 기분 좋아지려는 자신을 다그쳤다.

아무리 행복해져야 이긴다지만, 지금 막 아이의 소식을 들은 자신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진짜로 웃어서는 안 됐다.


'꼭 이겨서 널 무사히 낳는 미래를 손에 넣을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렴, 아가야.'


각오를 다진 그녀는 준호의 재촉에 엉성한 웃음을 보이며 케이크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음료를 준다고 뒤돌았을 때.

팔뚝을 꼬집었다.

다정한 눈짓이, 그 음성에 다가올 죽음을 막고 싶어질 것 같아서.

마음을 굳게 먹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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