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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으로 시작하는 처음처럼
2024_이야챌린지_014
by
이야
Feb 17. 2024
임시 표지
"여기구나."
망토의 모자를 내린 이니스가 정면을 응시했다.
꼬박 새워 도착한 성문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그 반짝임에 매료된 그녀는 일순 고단한 여행길의 피로도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들어가자."
무사히 통과한 이니스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그녀의 발은 본능적으로 원하는 곳을 찾아갔다.
이윽고 웅장하고도 위엄 서린 궁이 저 멀리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마차를 구해야겠네."
제국에 도착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더 이상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와 설렘 속에서 그런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은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 이니스는 금방 마부를 발견했다.
곧장 다가간 그녀가 바로 목적지를 말하자 곤란한 표정이 따라왔지만.
찰랑.
가득 찬 돈주머니에 결정은 빨랐다.
덜컹.
"후우. 고모님. 부디 꼭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때, 자신을 향해 날아온 축하 편지를 손에 쥔 이니스는 긴장되는 마음을 다독였다.
벌써 10년도 더 된 초대장이었지만, 언제든 와도 된다는 황실의 인장이 박혀있었다.
무려 황후의 손님인 자신이 문전 박대를 받을 것을 상상하지도 못한 이니스의 감정이 날뛰기 전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공인된 마차만 들어갈 수 있어서 한동안 걸으셔야 합니다."
"그래. 수고했네."
마부와 작별한 이니스는 표지판을 따라 황성으로 이동했다.
두근두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박동이 더욱 빨라졌지만,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다.
비로소 도달한 그녀를 막은 것은 황실 기사들이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편지지를 넘겼다.
기사 중 한 명이 그것을 확인했으나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막았다.
"유효하지 않은 초대장이라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보게. 나는 아모니에 황실의 친인척이네."
"외람된 말씀이오나 메테린 황후 폐하는 몇 해 전에 승하하셨습니다."
"…무어라고? 디포스 왕국은, 우리 하워스홀 왕실은 해당 소식을 전혀 접하지 못하였네!"
디포스 왕국의 공주인 이니스 하워스홀은 분개했다.
그러나 황실 기사들은 그
분을 헤아릴 수도, 해소할 수도 없었다.
한편 정문이 시끌하자 마침 산책하던 크로스는 발길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더냐."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황자 전하, 그것이-"
상황을 전달받은 그는 오랜만에 듣게 된 이름에 멈칫했다.
메테린 아모니에.
현 황제의 모후.
'허. 디포스 왕국이 아는 바가 없다니.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해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전하지 않은 건가.'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한 크로스는 이니스를 궁으로 들였다.
비록 황후의 초대는 무산되었지만.
"하오나 전하-"
"그만. 그녀는 오파린 황제 폐하의 사촌이다.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춰라."
황자의 하명에 기사들이 일사불란 움직였다.
크로스의 중재로, 궁에 들어온 이니스는 다시금 심장이 요동쳤다.
그렇다.
고대한 메테린과의 만남은 불가했지만, 그녀의 아들은 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슬픔을 잠식시켰다.
"지금은 정무 시간이라 기다리셔야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대도 황자라 하였지요. 혹 메테린 고모님의 아들? 손주?"
"아쉽게도 둘 다 아닙니다. 저는 현 황제인 오파린 형님의 이복동생입니다."
까딱.
크로스의 소개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복동생.
그 말은,
"아. 제국의 전 황제이자 제 고모부께서는 고모님뿐만 아니라 다른-"
허망함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분명 고모님은 사랑을 위해 왕국을 떠났다 들었는데.
"제 어머니께서는 메테린 황후의 등하 이후 그 직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선대 황제께서는 전쟁을 막기 위해 제폭스 왕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 사랑은 오직- 메테린 황후였습니다."
"제폭스면 이 제국과 인접한 나라군요. 타국의 사람인 제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친인척으로서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책략이었겠군요."
입가에 씁쓸함이 퍼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 이해관계를 외면하기에는 본인도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럼 크로스 황자의 어머니는 현재 선황후겠군요? 제가 뵐 일은 없겠죠?"
납득하는 것과 별개로 감정은 허락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도 버거웠다.
"안타깝게도 만나게 될 겁니다. 제 어머니는 아직도 제국의 황후이니까요."
"그게 무슨-?"
"본래는 무시스 왕국의 공주인 베이트께서 오파린 황태자 전하와 혼인하셨지요. 오파린님이 황제가 된 이후에 그분 역시 황후가 되었으나, 2년 전에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유감입니다. 한데 그것이 그대의 어머니와는-"
크로스의 미소는 자신보다 더욱 진했다.
씁쓸함을 넘어 알싸함까지 느껴지는 얼굴에 절로 손이 올라왔으나 그것이 닿을 일은 없었다.
"제폭스 왕국의 압박으로 폐하께서는 어머니를 황후로 맞이하셨습니다."
"-강대국이군요."
"전쟁이 발발하면 제국에서 잃은 게 많습니다. 분명 사랑이 오가는 관계는 아닐 겁니다. 하나, 포옥스 황후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황실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지요."
꽤나 후한 평가였다.
기다리는 동안 제국의 실정을 읊어준 크로스.
그를 바라보는 이니스의 눈빛은 묘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메테린 황후의 초상화가 도서관으로 가는 황실 복도 한편에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때마침 건네오는 제안에, 이니스의 눈이 반짝이기 충분했다.
"바로 가죠."
하워스홀 왕실에는 어린 시절의 메테린만 즐비했다.
항상 메테린을 궁금해하고 존경한 이니스에게 적절한 물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전보다 풀어진 표정을 본 크로스의 안색도 한결 나아진 채였다.
그를 따라 이동한 복도에는,
"단독은 없나요?"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선대이신 홀데인 폐하와 주로 그리시고, 나머지는 오파린 폐하의 갓난 시절에 함께 그린 것뿐입니다."
"여기 아이가 한 명 더 있는데요?"
크로스의 말마따나 메테린 혼자 나온 그림은 없었지만, 그녀가 들어간 것은 많았다.
그리고 그 수를 미루어볼 때, 크로스가 한 말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저 자는 정략적으로 태어난 것뿐인가?'
자신의 물음에 침묵하는 그였지만.
사실상 황후의 품에 들어갈 수 있는 아이는 한정되어 있었다.
"메테린 황후와 어머니는 나이차가 꽤 났지만, 친해지는 데 문제가 되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가 조용히 속삭였고, 이니스는 그 작은 소리에도 금방 집중했다.
"많이 아껴주셨습니다."
애정 어린 눈길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한참 복도를 서성이던 둘 사이로는 정적이 돌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트린 자는 이니스로선 감히 예상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크로스 오라버니!"
"삼촌!"
겹쳐지는 두 아이의 목소리가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고개를 돌린 이니스는 도서관에서 나온 아이들이 크로스에게 안기는 장면을 직관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내 거야!"
"리보스, 그러면 안 되지."
"하지만 코아티 언니도 오라버니가 연애하는 건 싫잖아."
"삼촌도 이제 결혼해야지 않을까?"
힐긋.
좀 더 큰 아이가 코아티, 작은 아이가 리보스로 불렸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꼬마 숙녀들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금방 헤아릴 수 있었다.
"두 황녀 전하 모두 황제 폐하의 딸입니다."
"…5촌이군요."
그들을 알게 된 이니스는 금세 관계를 파악했으나.
곧바로 따라오는 의문에 적지 않은 충격을 얻었다.
"혹시-"
"맞습니다. 코아티 황녀는 선대 황후인 베이트 님의 따님이고, 리보스는 제 이부동생이지만 코아티처럼 조카이기도 하지요."
태연한 설명에 의문은 해소됐으나, 충격은 여전했다.
여과 없이 드러나는 이니스의 당황에 크로스가 남몰래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막장 관계였다.
"우리 가족이야?"
순한 얼굴이었지만, 뭔가 매운맛이 물씬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어느새 크로스에서 이니스의 품으로 넘어온 두 아이들이 말간 웃음을 선보였다.
"아빠 보러 가자!"
"아빠가 아니라 황제 폐하지."
꼬인 족보를 떠올리자 어지러워진 이니스는 성문에 발을 들였던 오전이 그리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싶었고.
원래 고모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오래 머물고 싶었던 솜보로 제국이, 일러주는 사이는 그 마음을 상쇄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어쩌면 고모님의 어린 손녀들은, 그것을 더욱 부추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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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자 내외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내용을 수정할 수 있으니 감상에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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