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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꺼트릴 때야

2024_이야챌린지_015

by 이야
임시 표지

붙을 수 없도록, 그 틈에 끼어 장식되지 않도록 제대로 실수하길 바라던 때가 있었다.

어차피 지속된다면, 이 바람이 잘못되어도 좋으니 한 번쯤은 목줄이 되기를 빌어보기도 하였고.

결국 흩날린 재는 기어코 들어와 괴롭혀도 금방 닫힐 거라 찡그린 이가 오직 자신이기를 원한 게 죄라면 애초에 피울 수 없기를 희망하기도 했는데.

이것조차 해줄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 입마저 꿰는 게 좋을지 상상하게 만든 세상이 독한 거였을까.


"내 걸음이 닿는 자리에는 항상 있었어. 그래서 지천에 널린 시체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거야."


공항을 빠져나온 유빈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손에 든 녹음기를 쥔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가끔은 그게 멸망의 이유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데 여전한 걸 보면 억측이었네. 하루빨리 다시 진행할 필요가 있겠어."


준비된 차량에 탑승한 그녀는 생각했다.

역시 시체가 즐비한 거리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개인의 노력과 재앙을 공동 선상에 두려는 내가 잔인한 건가?'


한국에 들어온 유빈이 바쁘게 시간을 보낼 무렵.

다시 등교하기 시작한 지영도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후아. 학교를 무사히 다닐 수 있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야."


교실에 들어온 그녀가 감격 어린 눈으로 내부를 둘러봤다.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1년, 정확히는 10개월간 있었던 좀비 사태는 완전히 막을 내렸고 인간의 문명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중학교 3학년으로, 학교생활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곳도 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에서 그쳐서 다행이다. 그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무리 좀비라고 하지만, 한때는 분명 사람이었던 자들.

살기 위해 그들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은 후유증으로 남기 충분했다.


'오빠는 등교 거부했지만. 나라도 씩씩하게 다녀야지.'


그렇다고 한평생 우울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면 안전해진 세상에 할 수 있는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마땅히 지켜야 했다.

그게 구하지 못한 자들이 바라던 삶이었을 테니까.


'엄마도 이런 모습을 더 보고 싶겠지. 피에 젖은 교복이 아니라.'


애써 나오려는 눈물을 삼킨 지영은 원하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 한적한 교실.

등교 시간이 다 되도록 들어오는 학생 수는 많지 않았다.

원래도 인원이 적긴 했지만, 반까지 줄어든 것을 고려하면 처참하기 짝이 없는 수였다.

혼자 앉아있을 때보다는 곳곳에 학생들이 자리했지만 아주 고요했다.

소리를 내는 게 죄라도 되는 양, 모두가 위축된 채로 자리를 지켰다.

잠시 후.

방송이 흘러나오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학생이 티비를 켰다.

교장의 일장연설이 시작되고, 5분 뒤.

끼이익.

의자 끄는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묵념. 예전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이제는-'


결국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갔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친구들, 도망 다니면서 보았던 사람들.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겪게 된 상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흐느낌이 공간을 울렸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몇몇 이들은 교실을 떠났다.

티비 속에서 교장의 연설이 계속 들려왔지만, 지영의 귓가에는 다른 것이 맴돌았다.

처절한 비명과 절규.


'여기 앉아있는 게 정말 기적이네.'


장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상황은 전과는 매우 판이했다.

특유의 명랑한 분위기는 아직 찾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선생님이 좀 늦었지?"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1반 담임이야. 이름은 경나래, 과목은 사회."


산뜻한 목소리였다.

아이들의 눈물 자국을 본 나래는 일순 표정이 굳었지만, 금방 바꾸었다.

어른인 자신마저 그에 동기화되기에는, 앞으로를 살아가야 했다.


"개학식이어도 수업은 그대로 진행하니까 시간표대로 잘 확인하고~ 좀 이따 사회 시간에 보자!"


평범하게 보내고 온 시간이지만, 나래 역시 편하지 않은 속을 문질렀다.


'후. 무너지지 말자. 갈 길이 멀다.'


정부에서 무리하게 추진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학생들을 따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게 필요하다고는 느끼지만, 감정은 별개였다.

한편, 담임이 나간 교실.


"안녕? 옆에 앉아도 돼?"


지영은 선뜻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살폈다.


"어어."

"난 장유주야."

"오지영이야. 반가워."


짝꿍이 생긴 그녀는 종이 울리기 전까지 스몰토크를 나누었다.

유주는 자신과 달리 다른 학교 학생이었다.


"교복은 언니 거야. 집에 있더라고."

"아~ 교복이 같아서 같은 학교인 줄 알았어."

"그냥 내 거 입을까 하다가, 찢어지기도 했고. 또, 언니가 그리워지더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은 학교 지망할 걸 그랬어-"


두 살 터울인 언니와 일부러 다른 학교를 간 유주는 그 선택이 후회스러웠다.

거리가 가까웠다면 허무하게 언니를 잃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훌쩍이는 유주의 심정을 헤아린 지영은 그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미안, 주책이지? 이런 얘기, 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저은 지영이 유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태가 진정되고, 상담 센터가 생기긴 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오빠도 안정을 찾았겠지.'


씁쓸함이 입가를 맴돌았다.

며칠 후.

학교생활에 적응한 지영은 유주와 함께 등교했다.


"솔직히 좀 무서워. 갑자기 또 나올지 어떻게 알아?"

"그러게. 그래도 전보다 대처가 미흡하진 않을 것 같아. 그리고 그들도 있으니까."

"하긴. 요즘은 다 그 얘기더라고? 너도 봤다고 했지?"

"잠깐? 멀리서 본 게 다야. 오히려 오빠랑 오빠 친구가-"


툭.

어깨를 부딪힌 지영은 말을 멈췄다.


"괜찮아?"


상대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것은 비단 지영뿐만이 아니었다.

콕콕.

옆구리를 찌르는 유주의 손길을 뗀 지영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쟤도 그거지? 스타 트럼프? 잘생기긴 했네."


유주의 속삭임을 흘려들은 지영은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지켜봤다.


"별 문양이 눈에 띄긴 하네~"

"어? 어, 그러게. 빨리 교실 가서 발표 준비해야겠다."

"아~ 오늘부터 발표일이지? 주제, 뭘로 했어?"

"스타 트럼프-"

"응?"


짝짝.

뺨을 때린 지영이 정신을 차렸다.

잠시 후, 교탁 앞.


"흡연 문화를 주제로 했어. 거기에 살짝 넣었거든. 남궁빈에 대해서."

"아, 맞아. 남궁빈도 만세이처럼 스타 트럼프였다며?"

"응. 그렇지. 트럼프 연예인은 거의 밝혀졌으니까-"

"그런데 흡연이랑 어떻게 연예인을?"


의아해하는 유주에게 미소만 보인 지영은 준비한 파일을 컴퓨터에 옮겼다.

앞 순서로 뽑힌 그녀는 열심히 준비한 대본을 다시 되짚었다.


"그분이 개인 재떨이를 썼던 사진을 넣었거든. 길거리에 꽁초를 버리지 않게 하려면 그런 게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그러면 너무 빈약하지 않아?"

"그거 말고도, 꽁초를 버릴 수 있는 구역인 꽁초홀도 만들어서 앱이랑 연동되어 장소 노출과 안내를 하는 것도 생각해 봤고 거기에 슬로건도 짜보긴 했는데. 아, 그리고 이전에 중단된 소지증 아이디어도 가져왔어!"

"개인 재떨이 소지증 있어야 담배 구매 가능한 거? 그거 다시 진행한다고 삼촌이 툴툴대던데-"


귀찮다고 투덜대던 삼촌의 얼굴이 떠오른 유주가 뒷말을 흐렸다.

사실 비흡연자인 삼촌은 그저 판매할 때 번거롭다는 것을 얘기했지만.


'신분증이나 소지증이나 어쨌든 확인하고 판매하는 거긴 한데. 가뜩이나 인구가 줄었는데 그것까지 고려해야 해서 그런 건가?'


확실히 소지증 절차는 복잡해 보이긴 했다.

따로 교육도 들어야 했던 걸로 알고.


"맞아. 뉴스에 나온 자료도 참고했어! 이수 받으면 무료로 제공한다고 하더라고. 1차적으로 청소년이 걸러지고, 2차적으로 꽁초 버리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또 신청·발급 기간 동안 판매금지도 아니고"

"그러면 삼촌은 타격도 없으면서 불평한 건가?"


글씨체가 깨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지영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했다.

아무래도 발표할 때까지는 연습할 필요성이 있겠다.

좀비들을 피해 도망 다닐 때만 해도 생각지 못한 지금.


'어려울 게 뭐 있어! 거기서도 살아남았는걸.'


가끔은 찾아오는 밤이 끔찍할 때도 있지만.

어떻게든 일상을 지키는 그녀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문양을 지운 채 전학 온 잔새온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지만, 훌쩍 다가온 사회 시간.

발표에 집중한 지영이 경험담을 풀며 내용을 이어나갔다.


'으아. 넘어져서 꽁초랑 침에 절인 채로 돌아다녔다는 얘기는 뺄걸. 너무 그대로 발표했어!'


그때를 회상한 지영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정말 지옥이었지. 오빠들이 신경 써준 덕분에 씻고 갈아입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한 상황이었다.

언제 좀비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존엄성을 지켜준 오빠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 순간을 되새기던 지영은 찰나 새온과 눈빛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정신으로 선생님의 질문을 답했는지 모르는 그녀는 간신히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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