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감히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을 알겠기에, 방관하느니 먼저 선수치겠다는 의지를 이해해서 이제는 너무 깊게 엮여버렸다.
더는 벗어나지 못할 공범이었다.
'판단한 이들만, 조건에 충족한다면, 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게 혹'
아는 사람일지라도.
유난히 심란한 다음날이었다.
3년.
마냥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는 30건 이상의 의뢰를 수행했고.
사실상 베테랑이라고 불려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만큼 잘 수행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는 주로 초면인 사람들.
원래라면 모르고 살았을 이들을 대상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어제는 아니었다.
'배정된 세계가 충분하기를.'
중학교 동창을 없애고 돌아온 자신.
그녀에 대한 데이터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
자신이 기억할 몫이 쌓여갈 때마다 오히려 공허해지는 삶은, 파도처럼 덮쳐왔다.
그런 우울 속에서, 간신히 사무실을 찾은 영준은 피로한 눈가를 문질렀다.
다시 새로운 대상자에 대해 조사해야 할 시간이다.
그렇게 한참 서류를 들여다볼 때.
똑똑-
그를 찾아온 사람은 반가운 얼굴이었다.
"벌써 착수하는 거야? 이젠 혼자서도 부지런히 잘하네?"
"오랜만이네. 태린 누나."
강태린.
아버지로부터 시스템을 전수받은 뒤, 가장 먼저 주어진 일은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업계의 선배이자 먼 친척 관계인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왔다.
'덕분에 잘 적응했지.'
일에 대한 꺼림직함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영준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쉬엄쉬엄해~ 참, 누가 아들 아니랄까 봐 아저씨랑 아주 판박이야?"
태린은 영준을 보며 정훈을 떠올렸다.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인도해 준 아저씨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그 아들이 있었고.
3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아저씨한테 배운 대로 그를 가르쳤었다.
"그래도 우린 형편이 나은 거야.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한, 웬만해선 '죽음'이 선행되는 구조잖아. 그런 상황에서 덤프트럭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좋은 거지. 다른 경우는 정신적으로 더 힘들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차라리 양산형이고 클리셰라 다행인 거겠지. 적어도 현대에서는."
"우리가 활동하는 시간선이 다 그렇지, 뭐~ 예전에는 마차로 보냈다던데 지금처럼 한 번에 성공하는 건 힘들었을지도 몰라."
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간 전해진 자료에 의하면 그렇다.
어쩌면 그래서 트럭이 사용된 게 아닐까.
고통이야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한 방이 될 테니까.
'확인사살하겠다고 여러 번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지.'
참 효율적인 결말이었다.
혹은 시작이거나.
"그보다 웬일이야?"
"너무 뜬금없이 찾아오긴 했지? 네가 쉬지도 않고 작업한다길래 한 번 들린 거긴 한데…"
태린이 뒷말을 흐렸다.
의아함을 느낀 영준의 눈이 진지하게 그녀를 살폈다.
"알려줄 것도 있고."
티 나게 시선을 피하는 그녀는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꼭 죄를 짓는 듯한.
그러나 그에게 있어 태린은 고마운 존재였기에, 그녀의 안내에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태린을 따라 한 건물에 들어온 영준은 서늘한 공기에 겉옷을 여몄다.
"누나?"
잔뜩 굳은 얼굴로 앞서가던 태린을 불렀으나, 침묵뿐이었다.
조금은 답답해질 무렵.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그는 좀 더 인내심을 발휘했다.
"대체 여긴 뭐 하는 시설-?"
상층에서 내린 둘은 닫힌 문 앞에 섰다.
카드키를 꽂아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보였다.
그제야 영준을 돌아본 태린이 잘게 입술을 씹었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래서 뭘 바라는지 알면. 절대 용서 못 하겠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불안한 눈빛에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낸 태린은 그대로 돌아섰다.
"아저씨도, 너한테도 말 못 했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비겁하다는 거 알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어."
"아니, 아까부터 자꾸-"
삑.
쿠웅.
카드가 인식되자 굳건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따지려고 했던 영준도 그 내부를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꼭, SF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 눈앞을 채웠다.
그것을 응시하던 그의 발걸음이 떼어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다 뭐야?"
건물을 채운 시험관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본인.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이 그 유리통 안에 들어있었다.
가까이서 확인한 영준은 금방 결론을 도출해냈다.
"지금 이거 날 복제한 거야?"
대체 왜, 언제부터.
차마 묻진 않았지만 결국 그녀는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기상천외한 짓을 벌인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계약에 메인 사람이 너랑 나, 둘뿐이라고 했지."
"?"
"그다음은, 누가 될지 알고 있잖아."
덤덤한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쓴 그는, 곧 헤아릴 수 있었다.
무언가 꺼내는 그녀를 경계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사진이었다.
"이건 아저씨가 우스갯소리로 한 얘기의 실현이야."
"그렇다고 말도 안 하고 이런 짓을 해?"
그의 분노는 마땅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
'아저씨도 너한테 넘겨주는 거에 고민 많았을 거야. 그래서 자신을 복제해서 맡길 방법도 생각했는데, 너무 늦으신 거지. 시간만 더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아쉽게도-'
과거에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시스템이 수용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
"아저씨가 알아볼 때는 그랬지. 혹은 내가 더 간절했거나."
"지금 누나 아들한테 면죄부를 주려고, 날 이용했단 걸 고백하는 이유가 뭐야?"
"여기 있는 복제 인간의 수명은 5년 정도래. 그리고 우리는 40년 정도를 헌신하니까 8명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런데 매번 시스템을 옮겨야 하니까 번거롭잖아."
영준은 그녀의 설명을 잠자코 들었다.
비록 복제 인간의 수는 여덟 체를 넘어 보였지만, 그것을 지적하진 않았다.
"내가 이 일을 끝내고 사라질 때, 난 너한테 넘길 거야. 못해도 너보다 7년은 먼저 은퇴할 테니까. 아저씨도 널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면 나에게 줬어야겠지. 시스템을 2개나 소유하는 건 명백한 오류 행위고, 그래도 널 집행자로 인식해서 다른 세계선의 너에게 영향을 미치겠지만. 아쉽게도 우린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유일하니까, 그것을 대체하려면-"
그녀의 눈이 수많은 영준을 향했다.
비로소 온전한 의도를 깨우친 영준이 한 발짝 움직였다.
급격히 좁혀진 거리.
이대로 그에게 잡혀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이걸 왜 알려주는데? 내가 누날 피하면 어쩌려고."
사진 속 환히 웃는 아이.
태린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데,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내가 실패하면, 적어도 넌. 내 아들로 네 아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필요한 일이라고 했지. 그게 신이 원했든, 인간이 원했든."
혹 작가나 독자였든.
다른 세계로 전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구원이라서 다행이라고 했으면서."
"내가 하는 건 상관없는데. 내 아이는 무관했으면 좋겠다는 욕심. 아저씨가 알면 괘씸하다고 하겠지."
한껏 위축된 그녀의 모습은 그날의 것과 달랐다.
자신 있게 따라오라고 말하던 태린을 대신해 그저 한 아이의 엄마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 얼굴에서,
"이런 건 어떻게 알았대?"
어릴 적 자신을 보던 엄마가 떠올라서.
그냥 받아주고 싶었다.
"신하고 몇 번 딜하다 보면?"
"확실한 거야?"
"일단은? 아직까진 시도된 적이 없으니."
"그럼 해 봐.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내가 아니라 얘네가 하는 거잖아. 아니야?"
그 물음에 잠시 말을 잃은 태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아. 정말 괜찮은 거야?"
"아니. 나도 찾아볼 거야. 이걸 우리 대에서 끝낼 방법."
먼 과거에서 시작된 의무.
가문으로 전해진 책임은, 쉬이 끊을 수 없는 관계였지만.
"세상 모든 판타지를 없애서라도 한 번 알아보지. 나도 딜 좀 해야겠네."
그건 꼭 거래가 아니라 공격 같아 보였지만.
태린은 호기로운 미소를 보자 마음이 간질거렸다.
아마도, 정훈 아저씨의 아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큰 그릇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