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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Mar 16. 2024

이 엔딩은 억울하다

2024_이야챌린지_020

임시 표지

"이유~ 요즘은 글 안 쓰네?"


쉬는 시간.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은 소이의 질문에 이유의 정신이 돌아왔다.


"수험생이잖아."

"그렇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이 망했잖아."


평이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소이는, 앞자리에서 문제를 풀고 있는 하지를 잠시 쳐다봤다.


"그렇네. 그래도 한국인은 등교하지만."

"방학이 더 길었어야 했는데-"

"우리 학교는 다른 곳보다 더 길었을걸? 운동장 한복판에 던전이 열렸으니까 말이야."


복도에 가까운 자리라 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시력이 좋은 소이는 바깥의 펜스가 얼핏 들어왔다.

지금은 안전 검증이 끝난 채로 정부에서 관리되고 있는 던전.

그럼에도 학부모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었으나, 이제 바뀐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일침이 더 또렷했다.

그러니 화상수업을 진행하기보다 대면으로 등교하게 한 것이겠지.


"나도 빨리 각성했으면 좋겠다~"

"그래. 응원할게."

"반응이 이게 맞나요~?"

"훠이훠이, 내 짝꿍 자리에서 이제 나오십쇼."


손짓과 함께 자신을 내쫓는 이유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소이가 입을 열었다.


"짝꿍은 무슨~ 투명 인간이라도 앉는대?"

"네~ 각성 스킬이 은신이래요~"

"그럼 던전을 돌지, 왜 네 옆에 앉으러 와?"

"우리 투명이는 무서움이 많아서 숨어있는 거랍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소이가 의자를 터는 이유를 어이없게 바라보았으나.

그 손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쳇. 아쉽네. 대신 책 좀 빌려줘."

"맡겨놨어?"

"아니~ 네가 쓴 책, 그거 나도 읽어보고 싶어. 예은이도 나온다며? 책 이름이 뭐였더라. 리- 리셋?"


리셋하고 돌아온 서브남주를 만나버렸다.

책 제목을 떠올린 이유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거 이제 없는데?"

"엥~? 왜? 나, 아직 못 읽었는데!"

"3권 있었는데, 외숙모한테 다 압수 당했어."

"헉. 어떻게 한 권, 못 구해?"

"가서 미지수나 구하시지요."


결국 이유에게서 책을 받은 소이는 자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수학책을 넘긴 이유는 알까.

지금은 영어 시간이라는 것을.

종이 울리고 얼마 뒤, 선생님을 맞이한 그녀는 이유의 책을 서랍에 고이 보관했다.


'쩝. 지난번에 추천받았을 때, 바로 읽을걸.'


소이가 뒤늦은 후회를 할 무렵.

다시 혼자가 된 이유는 칠판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얼핏 수업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도 실상은 그냥 딴생각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이유.

그녀는 얼마 전 들은 소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둘이 사귄다고?'


어째서? 왜? 아니. 그래도 돼?

여러 의문이 따랐지만,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축하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설영의 속셈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예은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칸 라우드는 그러면 안 되지!'


이러면 책하고 다를 게 뭔가?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영 아니긴 했지만.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게 최선이었을까.

가늘게 뜬 눈 끝이 향한 곳은 자신과는 달리 수업을 열심히 듣는 반장의 뒤통수였다.

2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반장이 된 예은을 보던 그녀는 곧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모르겠다. 세상도 이상해졌고, 내 인생도 이상하게 흐르는구나~'


필기하는 척,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펜촉은 그녀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정확히는 칸 라우드란 주인공에 대한 주요 설정들.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운명에 누구보다 가깝고 지독하게 개입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이어주지 말걸 그랬어.'


그동안 수토록 많은 커플들을 성사시켰지만, 처음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쌍의 탄생이었다.

책 속에 인물로만 있었으면 좋을 사람이 눈앞에 튀어나왔을 때부터 잘못된 거다.

호기심으로 건드린 팔찌가 불러온 비극은 결국 한 세계를 제물로 바치고서야 끝이 났다는걸.

스스로 만든 재앙의 크기를 감당하기에 이유는 아직 어렸다.


'기회가 될 때, 이설영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해봐야겠어.'


억울하지 않은 세계.

부채감일 수도 있고, 책임감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푸른 눈에 담길 세상이 조금은 의미가 있기를, 이전보다는 희망이 되길 바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한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도 거의 혼자 했지. 예은이랑 예성 오빠가 도와주긴 했지만. 특히 외숙모 건은-'


생각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게이트 혹은 던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은 무엇인가.


'인간?이라고 알고 살아왔지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지금은 자신을 인간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특히 작년에는 머리에 뿔도 솟지 않았는가.

현재는 자취를 감췄다고 해도, 그 이상한 감각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에휴. 평범한 여고생인 줄 알았는데.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야.'


그럴 리 없지만, 그런 착각 속에서 이유는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한편 수업이 끝나자 다시 찾아온 소이는 전처럼 이유가 멍 때리는 틈을 타 자리에 앉았다.


"아~ 이건 예은이한테 말했어야 하는데."

"왜 또 왔지?"

"우리 언니가 엄청 아쉬워하는 거 있지?"

"뭘?"


사색에서 깨어난 이유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반응에도 소이는 아랑곳 않고 말을 걸어왔다.


"저번에 졸업식에서 같이 사진 찍고 싶었는데 못 찍었다고 말이야."

"너네 언니가 나랑 왜?"

"너 말고~ 예은이네 오빠랑 그 친구 있잖아, 설? 설, 뭐였더라?"

"이설영."

"아, 맞아! 그 사람이 너랑 사촌 관계라며? 아무튼 그 두 사람이 졸업한 선배들 중에서 가장 잘생겼잖아. 그래서 언니가 기회 되면 꼭 찍고 싶다고 내내 말했었는데, 결국 못한 거지."


참 뜬금없지만, 소이는 항상 이랬다.

소이의 수다를 흘려들은 이유는 대충 고개를 까닥였다.


"아쉽게도 예성 오빠랑은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이설영은 여자친구가 있어서 안 되겠어."

"그 오빠, 사귀는 사람 있구나? 하긴. 그렇게 생긴 얼굴로 없으면 그게 더 설득력 없겠다. 그런데 졸업식 끝났는데, 이제 와서 찍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왜 얘기한 거야?"

"아이, 그냥~ 영어 수업하는데 생각났어. 방금 지문이 졸업 연설이었잖아~"


아직 덮지 않은 교과서를 가리키는 소이였다.

의외의 성실함을 발견한 이유였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작년에는 함께 잘 떠들었지만.


'뭔가 좀'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소이를 보면 왠지 울렁이기도 하고, 거북하기도 하다.

이렇다 할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냥 그 눈을 마주하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한.

그렇기에 과하게 밀어낼 수도 없었다.

원래는 친한 사이가 맞으니까.

아니, 지금도 충분히 친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다.

이유의 그런 감정을 모르는 소이는 또 다른 얘기로 환기를 시켰지만, 집중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소이가 한참 떠들고 있을 때, 앞문이 열렸다.


"다음 시간, 국어 대신 체육으로 바뀌었어!"


수업 변경에 대해 알린 예은은 자리에 없는 친구들이 알 수 있도록 칠판에 적기 시작했다.


-체육복 갈아입고 운동장 집합~ 체육 수업으로 변경!


그녀의 공지가 끝나자 탄식 섞인 소리도 나왔지만.

소이의 반응은 반 친구들과 달랐다.


"오예~ 체육."


원래 고3은 체육 수업이 현저히 적게끔 시간표가 짜이지만, 올해부터는 달랐다.

체육 시간이 시간표의 반을 차지했고, 그로 인해 밀린 기존의 과목은 겨우 있는 시간도 체육에 빼앗겼다.

공부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세상이 변한 뒤로는 체력이 더 중요해졌으니까.

언제 각성할지 모르는 사람들.

그렇다고 미각성자들을 다 아카데미에 넣을 수도 없고.

각성자가 늘어나는 추세에, 손놓고만 있을 수도 없다.

이제는 헌터가 국력이 되는 시대니까.

아직도 혼란이 도래한 나라는 많다.

하지만 초반 대응을 잘한 한국은 어느 정도 답습하면서도 변화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

그러니 여느 때보다 중요해진 체육 수업이다.

게다가 갑작스레 발생하는 게이트에서 휘말리지 않고 대피해야 한다면, 일반인들도 체력이 있는 게 좋았다.


"으. 나가기 귀찮아."


그러나 대부분은 다 하지와 같은 의견이었다.

특히 4월인데도 쌀쌀한 날씨.

이상 기후는 더 과속화됐다.

더운 것보다야 나을 수 있다지만, 추운데 밖에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나만 좋은 거야?"


어느새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4반 친구들.

이유는 옆에서 방방 대는 소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불어오는 바람에 다들 움츠리는 그때.

유일하게 두 팔을 벌리는 소이.

그리고 그런 소이를 보자 이마가 꿈틀거렸다.

어쩌면 오늘, 그녀의 바람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튀어나오려는 뿔이 그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건 너무 잔…인한데'


그래도 누군가는, 아니 자신은 해야만 했다.

이 세상의 흑막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게 그나마 덜 억울할 것 같아서.

수천, 수만 갈래의 미래는 가장 합당한 시간으로 이끌겠다고 부추기니까.

하아-

번지는 입김에 괜히 뿌옇게 변한 눈앞 속에서 또 밀어 넣는 거다.

끝을 모르는, 혹은 끝을 알아야 나올 수 있는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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