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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Mar 30. 2024

벚꽃 엔딩이라면

2024_이야챌린지_022

임시 표지

탁.

책을 덮은 설영의 시야가 일렁였다.

주목받는 게 싫어서 끼게 된 렌즈는 여전히 빡빡했다.

스륵.

주머니를 뒤지니 강이유가 챙겨준 인공눈물이 나왔다.


'이걸로 한시름 놨군.'


똑.

전보다 풀어진 눈동자가 다시 책을 찾았다.

정치학의 이해.

초반에는 이곳의 사정을 헤매었지만, 근현대 자료를 숙지한 뒤로는 전보다 수월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래봤자 소 귀에 경 읽기일지도 몰랐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땅은 여기가 아닐뿐더러, 사회 제도를 비롯해 태반은 달랐으니 말이다.

그나마 비슷한 시기는 중세였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 장르에서 많이 보이는 시대적 배경의 한 폭이었다.


'애초에 만들어진 세계니,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어느 정도로 탄탄했는지는 그조차도 모른다.

태어나고 자랐을 적의 기억은 희미하고, 그에게 각인된 것은 작가의 놀음에 불과했으니.


'강이유도 구체적으로 정하진 않아서 모르는 게 많았지.'


그마저도 어설픈 행위로, 온전한 신도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쯧.

짧게 혀를 찬 그가 활자에 집중하려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의 독서는 금방 방해를 받고 말았다.


"시험 기간도 끝났는데, 데이트는 안 하나 봐?"


슥.

시선을 올리자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여인이 보였고, 곧 그녀를 기억해 냈다.

유리안.

정치외교학과 동기.

학교에서 딱히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그녀는 강이유와 연결된 사람이었다.


"그쪽은 아직 바빠."

"아아, 하긴. 고3인데 연애할 시간이 어딨겠어. 그래도 봄인데, 좀 즐겨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에는 침묵으로 일관한 설영이었지만, 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지구 곳곳에 던전이란 이상 현상의 발생과 함께 더욱 심화된 이상 기후로, 추웠던 시기가 생각보다 길었고.

그리하여 중간고사를 꽃말로 가진 벚꽃의 개화 시기도 살짝 밀렸다.

꽃구경 가기 딱 좋은 날씨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동기라니.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반짝이는 리안의 눈빛에도 설영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개강 파티도 안 오고, MT도 참여 안 하고, 너무 삭막한 학교생활 아니야?"


어느새 설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리안이 속삭였다.

그럼에도 그의 눈길은 책에 고정된 채였다.


"이번에 과 축제에서 하는 건 참여하는 거, 어때? 주말에 교류원에서 이유를 봤는데, 우리 장한대 축제 때 놀러 온다고 했거든~ 그럼 그 친구도 같이 올 것 같은데?"


그 친구.

그제야 책을 내린 설영의 눈이 묘하게 변하자, 때를 놓치지 않은 리안이 부추겼다.


"고3이라 바쁘다곤 하지만, 내년에 올 대학에 미리 관심을 가질 수도 있는 거고~ 또 그 친구 오빠도 여기 다니잖아~ 토목공학과였나?"


설영은 리안의 유혹에 감흥은 없었다.

다만 이전에 들었던 말은 신경이 쓰였다.


'축제가 기대된다고 했었나.'


예은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설영이, 옆에서 재잘대는 리안을 인지하고는 입가를 굳혔다.

그러나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리안의 제안을 수락했다.


"정말이지? 나 이거 과대한테 보고한다?"


낙장 불입이라는 듯.

약조를 받은 리안이 부리나케 도서관을 떠났다.

설영은 모르겠지만, 리안은 동기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관심을 받지 않기에는 꽤나 훌륭한 미모의 소유자인 설영은, 동기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도 가십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어째 스타 트럼프인 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거지?'


크림으로 볼에 있는 문양을 지운 리안은 트럼프였다.

교류원을 통해 세계를 넘어온 이종족.

그녀는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재능을 가진 스타 트럼프였지만.


'내가 아무리 스타 중에서도 무매력으로 유명하다지만. 인간한테 밀리는 건, 역시-'


몇 번이고 경험한 거긴 하지만.

대학에 와서도 이렇게 극명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 모델로 활동하는 자신의 존재는 미미하고, 그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동기들에게 설영을 설득해오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거 아니겠는가.

한탄하는 와중, 단체방에 메시지를 보내자 환호하는 이모티콘이 쏟아졌다.


'에이, 몰라. 그래도 이번엔 애들이 원하는 걸 해줄 수 있어 다행이네.'


비록 개강 파티나 MT는 참여시키지 못했지만, 드디어 따낸 축제는 정말 말 그대로 축제일 지도 몰랐다.

실시간으로 울리는 알림이 마냥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도서관을 벗어나는 리안이었다.

한편, 리안이 떠난 자리.

홀로 남은 설영은 책 몇 권을 더 꺼낸 뒤, 책상으로 이동했다.

끼이이.

자리에 앉은 그가 한쪽에 핸드폰을 꺼내 올렸다.

그러자 살짝 닿았는지, 화면이 켜졌다.

환하게 웃고 있는 예은의 얼굴이 배경으로 설정된 폰.


'불안하다고 했지.'


화면이 자동으로 꺼진 뒤에야 시선을 돌린 그가 잡념을 떨쳤다.

얼마 뒤.

별안간 독서를 하던 그는 미묘한 진동에 폰을 확인했다.


-이쁘지?


강이유였다.

학교 뒤뜰에 있는 나무와 함께 찍혀있는 사진을 보낸 그녀.

사진 속에는 나뭇가지에 피어난 꽃을 보는 예은이 있었다.

작년에는 보지 못했다.

학교를 워낙 늦게 다니기도 했고.


'그땐 꽃보단 나뭇잎만 무성했지.'


아마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 낯선 세상에 도착한 설영, 아니 칸에게는 쉬운 게 없었다.

그저 억울하지 않는 세계를 찾아준다는 작가의 말도.

또다시 지정된 운명과의 만남 속에서도.

정작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랬었지.'


그래도 이제는 정말 자유라는 듯이, 방목한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것이 정말 그랬는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지난 1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그였다.

처음에는 분명 불쾌했지만, 그마저도 상쇄되어 어느새 동화된 자신으로서는 비로소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우웩! 괜히 보냈어!


답장을 본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냐고 물어서 그렇다 답한 것뿐인데, 저런 반응이라니.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곧 책을 선정했다.

아무래도 이런 날에는, 유리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리를 정리한 뒤, 두 권의 책을 대여한 설영은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봄바람이 캠퍼스를 감쌌고, 교정에는 학생들로 즐비했다.

유난히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자리 잡은 청춘은 유독 맑고 자유로웠다.

자유.

달라진 세상 속에서 강렬하게 드러나는 신념은, 낯설어도 그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여전히 라우드였다면 절대 알 수 없었겠지.'


혹은 책 속 남자 주인공에 불과했다면.

자신은 이 길을 걷고 있지 못했을 거다.

적어도 강이유가 쓴 세상에서, 현대로 넘어온 자신은 마치 사랑이 전부인 양 행동하지만.


'결국 이설영이 된 이상, 하나만 붙잡을 필욘 없겠군.'


그의 걸음은 과거 공작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미처 작가도 알아내지 못했던, 어쩌면 쉬이 바랄 수 없었던 세상에서 조금은.

조금은 먼저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


-쪼아!


서툰 답장마저 속을 간지럽혔다.

역시, 용기 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캠퍼스를 떠나는 설영은.

처음으로 함께 보낼 시간을 기대하게 됐다.

오랜 방황 끝에 찾아온 자리를 향해, 좀 더 또래다운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후, 장한공원.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설아의 재롱으로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내가 저쪽 세계에는 대귀족이었다니. 하긴, 그러니까 산타였던 건가?"

"아빠 산타!"

"그래, 아빤 산타지!"

"개명한 지가 언젠데."


강산의 말에 시선을 보낸 설하였지만, 부녀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설하는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설영을 흘긋 쳐다봤다.

지난 명절 이후, 한집에 살게 된 그들이었지만 아직은 딱딱한 사이였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설영아. 이렇게 가족이 함께 꽃구경 오니까 좋네."


그래도 어른으로서, 또 엄…마로서 먼저 손을 내민 설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진심은 서서히 설영의 마음을 녹이기 충분했고.

어쩌면 생각보다도 얼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오빠, 요거! 조아!"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주운 설아가 그것을 설영의 무릎에 포개었다.

그러고도 남는 것을 흩뿌렸지만, 설영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동생의 머리와 어깨를 털어준 그도, 작은 목소리이지만 확실히 뜻을 전했고 그것은 곧 부부의 마음을 울렸다.


"-억울하지 않고, 오히려 좋네요."


꿈을 통해 자각한 뒤, 처음으로 편하게 웃음을 나누는 그들이었다.

찰칵.

그리고 그것을 놓치기 싫다는 듯, 4인의 모습이 카메라에 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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