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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Mar 31. 2024

여기까지 오래

2024_이야챌린지_023

임시 표지

"엄청난 걸 보고 왔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눈동자만은 그렇지 않았다.

노트를 보는 눈이 여리게 흔들렸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금방 떨림을 멈춘 오래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향했다.

딸칵.

펜을 잡은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동안 쓴 이야기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사람들이 글을 구성하는 방식, 인물에 대한 모든 이해 등을 보면서 노력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노력 없는 사람이라니, 재능 없다는 말보다 더 속상하고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그간 고집했던 높은 이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열일곱.

중학생 때도 진로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제는 좀 더 본격적으로 탐색해 볼 나이.

부모님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고민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선생님과의 상담에서는 또 달랐다.

사실 그녀의 꿈은 중간에 잠깐 멈추긴 했어도 어느 정도는 확정되어 있었다.

글을 쓰는 것.

그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과 반가움이 그녀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이상은 높아도 된다는 결론을 냈다. 다만 그에 다가가는 목표를 전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조정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나는 요즘 관광 쪽을 진로로 잡으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남들처럼 빠듯하게 인물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그것은 관찰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나만의 핑계를 대보자면 이렇다. 나에게 인물의 모든 것을 관찰할 자격이 있는 걸까? 작가로서 어불성설일 수도 있으나, 그들을 입체적인 인물로 보이기 위해 다양한 것을 알면 좋겠지만 나는 그들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싶다. 가령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랑 친한 사람이 아니면 보통은 모르지 않는가? 물론 난 작가이기에 인물과 친분을 형성하고 유지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친구가~'로 시작하는 잡담은 친구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실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자기 이야기를 남에게 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쓰는 분야가 소설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연신 펜을 움직인 그녀가 잠시 숨을 터뜨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문장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지우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사이에는 분명 내 생각이나 경험이 담길 때도 있지만, 결국 독자적인 인물의 이야기였다. 여전히 자격은 취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게 언제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내 주변을 명백히 돌고 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있는 내 의식을 헤집어놓는 게 아니겠는가? 아마도 똑똑, 다른 작가들도 찾아갔지만 거절당해서 어쩔 수 없이 여기 문도 두드려요. 어쩌면 나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소통 창구로서 활용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것조차 내 상상이고,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 오히려 반갑고 즐거운 방문이다. 그런데 내가 이 방문자들을 각 잡고 취조해야 할 형사인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에게로 흘러와 일러주겠는가. 나는 그들이 제공한 단서들을 조합해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해야 할 탐정일지도 몰랐다.


탐정.

안타깝게도 자신은 추리 능력이 떨어지는 탐정인 듯하지만.

몇 분간 써낸 생각의 흐름으로 머릿속이 환기되었다.

그것이 싫지 않은 오래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정리하고 펼쳐보기로 결정했다.


-빨리 입소문이 나면 좋겠다. 지금 탐정사무소는 방문이 뜸하다. 그러니 내가 올해 들어 몇 편 쓰지 못한 거겠지.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인물을 구상하고 설정하는 것이 대단하고 부럽지만, 그 사람들의 방법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내가 그런 핑계에 발을 들인 건지도 모르지만,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관광 가이드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그곳에서 분명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또 그래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 나 스스로 여행자가 되어볼까? 아빠한테 말하면 어떻게든 자금은 마련해 주겠지. 하지만 불속성 효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지금은 좀 더 많은 세상을 만나야 노력 없는 나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작게 짐작해 본다. 혹은 아직 나에게 맞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거라면, 나에 대해 좀 더 집중하는 시간도 필요하겠다.


오래의 손이 다시 멈췄다.

톡톡.

막상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난 나를 너무 몰랐던 것 같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알아갈 기회는 계속 생기는데, 놓치고만 있었던 게 원망스럽다. 이런 후회는 잠시 미뤄두고, 이제는 나에 대해 더 둘러보고 어떤 것을 쓸지 새로이 고민해 봐야겠다. 이전에 쓰던 방식을 고수하더라도, 조금은 나에게 더 확장된 기준을 세울까 한다. 어쩌면 이 이후로는 내가 쓸 수 있는 폭이 지금보다 넓어질 거란 기대도 있다.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도전의 연속이다. 어떤 결과에 도달할지는, 언젠가 AI가 예측해 주길 바라며 나는 그냥 모르는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볼까 한다. 나는 거북이가 좋았다. 나도 그 친구처럼 속도가 느리다. 그러나 그 친구와 마냥 같지도 않았다. 가령 나는 빠르지도 않으면서 토끼처럼 여유를 부렸다. 그게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거북이의 뚝심이 역시 좋다. 그래서 닮고 싶은데, 거북이는 안다. 자신과 비슷한 친구가 토끼를 노린다는 것을. 토끼의 간을 지켜주겠다고 그 앞에서 잠시 고민했을 거북이는 딱 한 번 정도는 멈추는 것을 허용할지도 모른다. 이 내기에서 여유를 부리다 져도 좋다는 건, 거북이만 알던 비밀이다. 그래야 토끼를 찾던 자라에게 그 친구는 떠난 지 오래라고 알려줄 테니 말이다. 허탕치고 돌아가는 자라로부터 안전해진 토끼는 툴툴대도 결국 취하지 않는다. 그저 얼큰해진 거북이만 땀을 흘린 채 뿌듯해해도 이 승부는 친구와 나눈 값진 여행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하나 있는데-


거기까지 쓴 오래는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봤다.

함께 찍은 네 컷 사진이 어느새 벽 한쪽을 완전히 채운 뒤였다.

다양한 컨셉과 포즈로 웃고 있는 자신과 요나.


-내가 우울한 걸 알았는지,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를 사준 요나는 정말 고마운 친구다. 아, 물질적인 걸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정말 소중했다. 물론 케이크도 좋았다. 노력이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요나란 든든한 친구가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항상 날 응원해 주고, 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요나. 그건 그녀가 티어 트럼프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면 꼭 이 볼에 눈물이 없어도 될 것도 같다. 그래서 이제는 페이스 페인팅에서 졸업할 수 있을지도? 전처럼 티어 트럼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접고, 내가 한 인간으로서 뭘 할 수 있을지 더 생각해 보고 행동해야겠다. 그리고 거북이의 하얀 거짓말이 한 세상을 구한다면, 나도 쌓여가는 허구 속에서 사람들이 좀 더 편할 수 있게 하는 어엿한 탐정이 되어볼까 한다.


한쪽뿐만 아니라, 양쪽 다.

인물과 독자 사이를 연결하는 아주 작은 역할을 해낼 수 있길 바랐다.

탁.

노트를 덮은 오래가 오늘의 일기를 마쳤다.


'처음엔 숙제라서 썼는데-'


왜 일기를 검사받아야 하는지, 그러면 그게 일기가 맞는 건지 의아했지만.

그래도 그 기회로 일기를 써보는 경험이 어릴 때처럼 귀찮지만은 않았다.

어느새 검사용 일기가 아닌 정말 자신만의 장이 생긴 오래는 뿌듯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슝.

침대로 점프하자 푹신함이 그녀를 반겼고, 말랑한 베개를 품에 넣은 그녀가 편안한 웃음을 흘렸다.


"내일은 왠지 하늘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예하늘.

자신이 원하는 능력을 넣어준 친구인데, 마루란 필명을 쓰는 자신에게는 참 뜻 깊은 인물이다.

특히 그동안 봐왔던 판타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꾸며보는 것도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가끔은 직접 영업을 뛰는 것도 필요했다.

오지 않는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떻게든 유치할 수 있다면.

먼저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하늘의 이야기.


'아무렴. 편의주의적인 내용으로 썼는걸. 어쩌면 그게 최선의 단서 모음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설정을 드러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밤, 여러 상황을 상상하다 어느새 잠이 든 오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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