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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Apr 09. 2024

퍼레이드 속으로

2024_이야챌린지_025

임시 표지

서걱-

스윽.

볼에 튄 혈흔을 닦아낸 이레가 돌아서자, 아직 쓰러지지 않은 좀비가 보였다.


"이번엔 내가 이겼네?"


한껏 우쭐해진 표정의 그녀는, 여전히 좀비를 상대하고 있는 동생을 비웃었다.

매번 속도전에서 밀리던 분을 드디어 푸는 날이었다.

그어어-

잠시 후.

일대의 좀비들을 처리한 이안이 단검을 품에 넣고는 걸어왔다.


"…이쪽은 지형물 덕분에 한 곳에 몰려있었잖아."

"확실히 썰기 좋았지~ 그런데 운도 실력이다?"


말끝에 서린 웃음기에도, 이안은 말이 없었다.

평소보다 다운된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 이레가 가볍게 낫을 휘둘렀다.


"제대로 안 잘렸네~"

"다음에는 내가 이겨."

"그래~ 놓치지 말구 잘 상대하도록 해!"


유난히 기고만장해진 쌍둥이 누나.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한편 간만에 상쾌해진 이레가 폰을 꺼냈다.


"이 세계도 슬슬 정리됐는데, 다음에는 어디로-"


새 장소를 물색하던 이레의 눈이 친구가 남긴 문자에서 멈췄다.

검푸른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말도 안 돼. 주체다 세계에 좀비라고?"

"…거기도 시작됐나?"

"그렇게 태연할 때야? 체다네는 넘겨지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거기로 보낸 건데!"

"계획이 수정됐나 보지. 그보다 주체다는 그냥 백조이를 따라간 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조이한테 추천했었는데, 하 원로들 진짜."


무기를 집어넣은 이레가 거칠게 머리를 넘겼다.

빠득.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은 곳에-


"진정해. 그 녀석도 있잖아."


차가운 손이 닿자 생각을 멈춘 이레는 결정했다.


"빨리 가야겠어."

"그래."


이안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몇 분 뒤.

근처의 교류원에 도착한 그들은 용병패를 내밀었다.

이윽고 익숙하게 세계를 넘고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하나 언니!"

"오, 역시 왔구나?"

"언니, 나 정보 살래!"

"그렇지. 체다 위치?"


이레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완 좋은 다이아 트럼프인 하나는 그녀의 니즈를 바로 파악했다.


"솔직히 체다는 소속이 없어서 특정하기 애매한데."

"뭐라도 좋아. 아니면 조이네가 어딨는지라도 알려줘. 아마 주변에 있을 테니까."

"그거라면 확실하지. 이번에 체험학습으로 놀이공원 간 걸로 알거든."


종인시에 위치한 해피월드.

빠르게 떠날 채비를 마친 이레와는 달리,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팔자 좋네."

"그래서 내가 너도 용병하지 말고, 그냥 여기 있으라 했잖아."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있으나, 라이벌 의식 때문에 포기한 것은 이안이었다.

정작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나마 성노아는 여기 없어서 다행인가.'


그의 열등감을 부추기는 이들, 이리온과 성노아.

둘 중 하나만 있을 거란 사실에 안색이 펴진 이안이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바람과 달리, 둘 모두 같은 곳에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이안은 뒤늦게 필요한 것을 구비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심하렴!"


멀어지는 둘에게 하나가 인사했으나, 그녀도 알았다.

스페이드들에게는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놀이터일까나.'


잠시 후, 하트 트럼프로부터 제공받은 시계를 본 하나는 교류원으로 들어갔다.

다른 세계로 이동할 때였다.

하나가 이곳을 떠날 무렵, 쾌속 전진한 이레와 이안은 금세 시내로 진입했다.


"이대로면 금방 도착하겠어."


최소한의 좀비만 상대한 이레가 골목길에 들어서자 걸음을 늦췄다.

이왕이면 조이와 함께 있기를 바랐지만, 혹시 모르니 친구한테 연락을 남겼었던 이레.

그에 대한 답장이 오자, 확인한 이레가 안도의 숨을 뱉었다.


"으, 다행인 건가."

"…구시아가 발견했대?"

"아니. 그쪽엔 없대. 클로버들 중에 테일이도 없다는 거 보니까, 해피월드에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녀의 마음을 알았을까.

시아에게서 한 번 더 연락이 도착했다.


"테일이는 해피월드 간다 하고 나갔다네."

"그러면 주체다도 따라갔겠네."

"그랬을 것 같아. 이제 곧이야."


다시 서둘러 이동하려던 그때.

이레의 눈앞으로 손이 뻗어 나왔다.

바로 경계한 그녀가 낫을 휘두르기 전.


"너희들이구나? 아빠가 보낸 사람이."

"…?"

"볼에 진짜 스페이드 문신을 했네? 광대 같아. 아무튼 어서 벙커로 데려다줘."


벙커.

잠시 생각한 이레가 사악하게 웃었다.


"고위층 자녀구나? 좋아. 그런데 그전에 들를 곳이 있어."

"뭐? 난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히익- 뭐 하는 짓이야!"

"잘 들어. 이 세계에선 이제 내가 갑이야. 그리고 고위층 자녀가 어디 너뿐이야? 다른 친구도 있으니까 얌전히 따라와. 아니면 좀비 먹이라도 할래?"

"아가씨한테 무슨!"


뒤늦게 발작한 경호원을 제압한 이레는 연신 웃음을 띠었다.

순식간에 이들의 가치를 알아본 그녀로서는, 이후에 체다가 머무를 곳을 찾은 것에 기뻐했다.


'교류원도 있지만. 거긴 왕래가 잦을 테니까.'


이참에 용병 은퇴까지 계획한 이레는 그들을 이끌고, 골목길을 걸어갔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군데군데 찢어진 교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발작했으나, 신경 쓰는 이는 호되게 당한 경호원뿐이었다.

한편 먼저 치고 나가는 이레 뒤로, 비교적 느긋하게 걸어가는 이안에게 다가선 것은 여자와 함께 있던 일행이었다.


"어, 고마워. 솔직히 좀 무서웠는데, 나는 서채원이야. 나중에 아빠한테 말할게. 덕분에 살았다고. 아빠도 장관님한테 잘 말씀해 줄 거야."


자신을 채원이라고 소개한 학생.

그녀의 몰골은 소리 지르는 여자보다 더 심각한 채였다.


"아. 장관님은 태리 아빤데, 어 그러니까 저쪽은 윤태리고. 아, 알겠구나. 장관님이 고용했으니까… 하하."


이안은 멋쩍게 웃는 채원을 조용히 내려봤다.

한편 뒤에서 채원의 웃음소리가 나자 신경질적으로 돌아본 태리는 멈칫했다.

이상한 여자 때문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뒤따라오는 남자의 외모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하. 저 여우 같은!'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붙어 떠드는 채원,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리의 속을 모르는 채원은 굳어있는 태리의 손을 붙잡았다.


"태리야, 너무 걱정하지 마."

"치워! 더럽게, 진짜."


사납게 쳐낸 태리가 손을 털었다.

몇 시간 전, 운동장에서 넘어진다고 묻은 흙과 먼지를 확인한 채원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여간, 저 불여시.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아빠가 붙여준 요원의 괴랄한 성격도, 그리고 항상 저 유약한 꼴로 남자를 홀리는 서채원의 모습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태리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둘 다 떼어놓고-'


힐긋.

남자의 얼굴을 재차 확인한 태리는 생각했다.


'저쪽도 요원인 것 같으니까, 저 사람만 데리고 뜨면 되는 거야.'


태리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앞서나가던 이레가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이 형태는-"

"히익. 좀비가 완전히 떼로 있잖아!"


골목을 빠져나오자 시내를 가득 채운 좀비떼에 놀란 경호원이 졸도했다.

심약한 아저씨를 한심하게 바라본 이레가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역시. 아니, 역시가 아닌데. 설마- 이곳으로 오신 거야?"


무사히 착지한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골목 입구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좀비는 착실히 정리하는 그녀.


"저, 저분은 왜 그러는 거야?"


아까 전 보여줬던 파격적인 언사를 떠올린 채원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이안은 대강 상황을 파악했지만, 달리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나 언니, 미워. 이러면 알려줬어야지."


머리를 뜯고 있는 쌍둥이 누나의 폼은 항상 보던 것이었다.

반면 좀비떼를 뚫고 나갈 마음이 없어 보이는 여자를 보자,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태리였으나.

뒤에 서있는 남자의 존재감에 한 번, 또 좀비가 소리에 반응한다는 사실에 한 번.

겨우 참아낸 태리는 지금을 노렸다.

어느새 채원의 뒤로 다가선 태리가 있는 힘껏 등을 밀었다.


"꺄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채원의 몸은 그대로 방황하던 이레와 엉켰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태리는 남자의 손을 낚아챘다.


"지금이야! 빨리 벙커로 가자!"


그녀가 재촉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빠한테 보수를 두 배로 주라 할게! 저것들은 내버려두고, 이제-"


탁.

거칠게 밀린 태리가 당황한 얼굴로 바라봤으나, 남자는 이미 움직인 뒤였다.

그대로 좀비떼와 함께 사라진 셋.

기절한 경호원만 남은 골목 입구.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리가 숨을 죽였다.

한편 태리에 의해서 이레와 안으로 들어온 채원은 어깨를 작게 떨었다.


"겁먹을 거 없어."

"네?"

"얘네 지금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거든."


마음?

좀비에게도 마음이 있을까?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나, 정말로 좀비들은 자신을 보고 있 않았다.

오히려 정면만을 응시하는 그들은,


"역시 스타 중에 스타!"


채원도 어렴풋이 그 감탄을 헤아렸다.

한 사람을 따르는 그 모습은, 꼭 퍼레이드처럼 보였고.

툭.


"아."


앞에는 스페이드 문신의 여자가, 뒤에는 같은 문양의 남자가 서 있는 상황이 엄청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전진하는 좀비들을 보자 묘한 현실감 속에서 채원이 조용히 따라갔다.

반면 이레는 작게 중얼거렸다.


"라나 언니가 이쪽으로 가는 거 보니, 역시 체다 때문이겠지?"


주라나.

주체다의 누나.

원래는 다른 세계에서 유명한 배우인 그녀.

지그시 입술을 짓누른 이레는 남몰래 세워둔 계획을 수정했다.

잠시 후.

셋, 아니 피리 부는 사나이 속 쥐 떼와 같은 좀비들은 해피월드 지척에 무사히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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