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표지 그날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깨달았다.
"맙소사."
진실을 깨우친 정우는 몸을 비틀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
거칠게 일어선 그가 위스키를 찾았다.
미처 잔에 부울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입에 털어놓는 그.
목울대를 뜨겁게 쳐내려도 가슴만큼은 못할 것이다.
애통하다.
아니, 비통하다.
찢어질 듯 조여 오는 것은 심장을 넘은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이미 승인 난 일.
구정물을 손에 묻혔다면 이런 기분일까.
한때 별명으로 불렸던 그것이, 자신을 대변하는 때가 또 올 줄은 몰랐다.
구정우.
씁쓸하게 자신의 이름을 읊조린 그가 거울을 응시했다.
위잉.
충전해 둔 면도기를 붙잡은 손에서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위이잉.
수두룩 떨어지는 머리카락에도 굴하지 않았다.
타앙.
한참을 진동한 면도기가 바닥을 두드렸을 때.
비로소 차게 식은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최악을 막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라…"
그렇게 선택한 차악이, 부디.
조금은, 아니 결국 도착할 거라면 제발.
"거룩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날이었다.
찰캉.
그로부터 5년 후.
여전히 까끌까끌한 머리를 쓰다듬은 정우는 조용히 벽을 응시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을까.
실속 없는 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교도소에 앉아 기록을 남기는 심정이 꼭, 그들과도 같아서.
감히 헤아려본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상이 저를 악마라 욕하는 것이, 싼값이라 다행일 정도로 저는….
누가 알았을까.
어느 날, 욱여넣듯 들어온 정보는 독점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제게는 전혀 매혹적이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였다는 것을.
"능력만 온전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뒷말을 삼킨 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렇다고 하더라도 쉽지는 않았을 거다.
애초에 그 결정은 혼자서 내린 판단이 아니었다.
회의 끝에, 최종적으로 선별된 작업일 뿐.
투입 전에도 강력한 반대는 있었으나, 제시된 상황 속에서는 알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선택 아닌 강요라는 것도, 그마저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해야만 했습니다. 지독히도 후회되고, 그조차도 시간 벌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반드시 도달해야 합니다.
정말로 그래야만 했다.
이내 거칠게 놓인 펜이 점을 깊게 찍어냈다.
서서히 빠지는 힘에서 벗어난 펜이 바닥을 구를 무렵.
단벌 신사인 그는 사색에 잠겼다.
'짐작이나 했을까.'
피라미드 건설, 노예제도 확립.
그 끔찍했던 시간이, 과거의 계획이 아니라 미래의 설계였다는 것도.
당사자들에게는 좋지 못한 기억을 남긴 이 끝은 여전히 서려 이 현대에도 어김없이 불시착했다는 것도.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그리고 그게 내 임무였지.'
안락사의 합법화.
세상을 향한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간 모아놨던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했다.
'그 돈이 자본이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벌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지.'
단순히 실력과 운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운명을 위한 제물이었다는 것이 다시금 목울대를 간지럽혔다.
가까스로 역한 심정을 버텨낸 정우는 자신이 만든 시설을 떠올렸다.
LIFE STOP.
누군가는 처음에 H 대신 T가 잘못 들어간 거라 생각했다.
T발놈들이라는 밈이 이렇게 끝장을 보는구나, 싶었던 것도.
꼭 학교 폭력을 멈추라는 잘못된 캠페인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조차도 틀렸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과열된 양상과 함께 맹렬한 기사가 쏟아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에 회의주의자들이 반기를 들고일어나 그의 사업을 지지했고, 또한 챌린지에 물든 나라답게 인증 역시 빠르게 이어졌다.
우후죽순으로 올라오는 영상은 끝날 줄을 몰랐고.
규제하러 나선 때에는, 이미 그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였다.
덕분에 죄수복을 유일한 패션으로 삼은 정우는, 정부의 구속에 일절 반항하지 않았다.
그의 기이한 행태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가 논했지만.
'결국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살짝 허리를 숙인 그가 볼펜을 집었다.
아무도 모를, 어쩌면 또 다른 대원들은 알아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었다.
명분은, 지구를 구한다는 것.
고대부터 지속된 구조대의 파견으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응급처치였다.
이송 중인 지구, 아니 태양계가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없었으면 멸망은 가속화되고, 절대로 골든타임 내로 이송하지 못했겠지.'
지금도 구조대는 파견된다.
이 넓은 규모를 감당할 인원은 결코 적지 않다.
곳곳에서 활동 중인 그들의 응급처치가 적절하기를 바라지만.
'열정이 과한 친구들 때문에, 오히려 수습불가 사태까지도 떴었지.'
그 대표적 예가 세계 대전 중 일어난 핵폭발.
전쟁까지는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나, 핵을 터뜨리는 것까진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
특히나 이곳에 들어올 때, 우리는 가진 재능을 온전히 들고 올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공격적으로 인원을 보내다가 그 사달이 난 거지만.'
참으로 개탄스럽다.
어서 빨리 궤도에 들어서기를 바라지만, 치워야 할 잔재들이 많다.
길이 뚫릴 수 있게 곳곳에 블랙홀을 설치하고,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겠다고 명왕성도 빼냈지만 여전히 느린 이동이었다.
게다가 시기 상의 문제도 있다.
'도저히 이 시간차를 따라잡지 못했으니, 이 원정은 사실상 실패 판정일 지도.'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버젓이 존재하는 이 지구를.
우리의 지성체 구조함을 이대로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지구, 지성체 구조함. 여기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있는 이 지구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이 기다림이 야속하더라도 계속해서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당신들도 이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랍니다.
그때가 오기를.
특정 궤도에 진입해 태양계 외부로부터 신호가 오는 날.
긴박했던 이송의 끝을 볼 그대들은, 꼭 완치시켜주길 바란다고.
죄수번호, 2642.
정우는 멈추지 않았다.
생을 다할 때까지.
허튼소리로 부정한 세상은, 아주 오랜 여정 끝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차게 자신을 과시한 기적 아래 그들은 닿았다.
그리고 훗날 그가 남긴 그 장서는, 불리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구조 대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이것을 '이원록(移援錄)'이라 명명하겠습니다."
멸망을 막고, 건강해진 지구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얀 가운의 의사들에게도, 주황 복장의 대원들에게도.
또 어쩌면 푸른 한 벌을 벗어던진 이들조차도.
새겨놓을 것이라고.
몇 억 년 후.
한 시골집 마루.
"피라미드는 왜 건설됐을까?"
알려진 바로는, 건설의 90%는 기아를 막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나머지 10%는 종교적인 열정에서 건설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두 아이는 스스로 생각해 예측해 보았다.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주 큰 무덤이잖아."
"그래? 나는 왕이 통치하기 편하려고 그런 것 같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한 데 모아, 특정한 작업을 시킨 다음.
그들이 절대로 다른 수작을 부릴 수 없게 방지하고, 자신은 편해지는 영악한 왕이 아니었을까.
수이의 생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발전하는 걸 막은 거야. 만약 그들이 다른 활동에 집중했어 봐,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서! 그러니까 이 문명이 멸망한 거겠지~"
"그런가? 음. 식량 창고로 쓰였대. 애초에 다른 일에는 관심도 못 뒀겠네. 배고픈 것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이제야 검색해 본 진하가 설명하자, 수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괜한 상상이었네. 인간이 발전할수록 지구가 아파한다면 일부러 인류의 진보를 늦추는 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굳이 왜 그러겠어?"
"…지구를 살리려는 어떤 세력에게는, 그럴 수도 있잖아. 지구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오히려 인류가 괴로워해야 한다는 거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진하가 질색을 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잠시 바이러스가 몰아쳤던 시기가 연상됐다.
사람들이 사라지니 깨끗해졌던 자연이 떠오르자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거기까지 생각한 진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아직도 중얼거리는 수이를 보고 있자니, 차라리 옛날이 그리웠다.
"네가 다른 세계의 왕녀였다고 난리 피우던 때가 나았을 줄이야."
"허구의 세계에서 내가 좀 잔악하다고 해서, 벌 받는 건 질렸거든~"
"또, 또. 알아듣게 말하란 말이야!"
언제나 장단을 맞춰주는 진하였으나, 그게 매번 쉽지는 않았다.
수이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러니까 집중해서 듣지 그랬어. 왕녀였을 시절에, 좀 나빴다고 빙빙 돌아서는 도착한 곳이 어딘 줄 알아?"
"당연히 모르지."
"비스라엘이라고, 내가 사랑한 성녀의 아이가 있던 곳이었어."
"솔로몬의 왕국?"
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혁명 속에서 찬란했던 빛을 볼 수 있어서.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린 그녀는 느긋하게 하늘을 구경했다.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
혹은 이미 알렸거나.
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수이를 보며 고개를 젓는 진하였다.
개의치 않은 얼굴로 발을 흔들던 수이는 그대로 드러눕고는 생각했다.
세상은 마치 괜찮다는 듯, 평화로웠던 것도 같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