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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May 15. 2024

물에 젖은 인형놀이

2024_이야챌린지_030

임시 표지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쥐뿔 용기도 없는 사람. 어쩌면 그래서 요구되었던 걸까.


노트를 들여다보는 눈이 서럽게 휘어졌다.

겉보기엔 웃는 것처럼 보여도 온몸으로 우는 듯한 그녀의 손이 어지러이 펜을 놓쳤다.

겨우 짜낸 눈물도 흐르는데, 옅은 숨소리조차 참아내던 다인은 애썼다.

기억 속에서 나오려고.

하지만 정작 비집고 올라오는 아슬한 과거로부터, 다시 매몰되는 순간.

치유하고 싶었던 의지는 어느새 스스로를 가장 매몰차게 밀어내고 있었다.

띠링.

연락이 울리자 저절로 눈길이 움직였다.

이렇다.

자신이 유일하게 무음이 아닌 소리로 설정한 사람.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다면, 아직도"


신물이 났다.

그런데도 거부할 수가 없다.

분명 어릴 때는 상황이 이렇게 만든 것 같은데,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재촉하듯 연달아 오는 울림에 몸서리쳤지만 결국 또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었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억울하고 서러워도, 도저히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 말이다.


-나도 딱 한 번 돌아가고 싶어. 맞는 게 무서웠던 때에 맞서 싸울 용기를 쥐여주고 싶은데.


우스운 얘기였다.

자신은 아직도 겁내고 있어, 학습된 개처럼 엎드리고 바짝 다물 수밖에 없다.

정말 어렸던 그날과 다를 것 없이.

상념에서 깨어난 다인은 또 털어냈다.

아주 잠깐, 종래에는 더 진득하게 돌아올지라도 지금의 슬픔은 찌그러진 종이에 담아두었다.


'이젠 아무한테 말할 수 없어.'


그나마 무언가 해보려던 때에,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에도 말해보고.

그러다 한 번 토로하니 올라온 용기로 꺼내보았지만 지나고 보니 객기에 불과해서.

그리고, 이 답답함을 풀어낼 동병상련의 끝에서조차 상대를 사물로 보았던 똑닮은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쓰레기를 치운 다인의 입가가 조소로 번졌다.

기적이 있다면 제게 내린 벌처럼, 그에게도 부디 마땅한 처벌이 있기를.

나쁘고 잘못된 생각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꼴이 꼭 희극으로 보인다면, 그만큼 멀었던 손길이.


'진짜로 묶여있다면 영원히 상황을 탓할 수 있었겠지.'


사슬로 칭칭 감긴 손은 망상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 무엇도, 해낼 수 없는 모자람이 원망스럽다.

혹은 짓이겨 밟힌 채로 누워있는 것에 만족한 걸지도 모른다.

작은 실수마저 죄라고 이르던 많은 시간들이, 이끈 게 아니라면.

지끈.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는 희미해져서 다행인 지난날.

어딘가 묻어두고 파헤치지 않으려 맹목적으로 살아왔던 때와는 다른.


"어떻게 하고 싶냐고요?"


최소 50년도 훌쩍 넘은 시간.

다인은 젊었던 때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에 놀라기도 잠시.

들여다본 문턱에서 결정해야 했다.


"처음엔 제가 인형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난 모든 걸 해주는데, 정작 가만히 있는 건 내가 아니잖아? 정말 많은 감정을 삭였는데, 인형이라면 그럴 필요도 없잖아. 가만히 앉아 누릴 거 누리는 정다빈이야말로"


부쩍 드러난 태도에 짧게 숨을 고른 뒤.


"언니야말로 인형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벌을 내릴 거라면 애초에 인형이라서 편하게 지냈던 거겠죠. 아, 다른 곳에서 힘들었다 해도. 적어도 내게는 그랬어요. 한때는 이해하려고, 부단히 생각했고 실제로 안타깝게 여겼고, 그런데 그게 정당한 건 아닐 테니까. 그러면"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해서.

나라도 동정해야겠어서.


"나 하나 품고 살기에도 벅차더라고요. 어린 시절에 상처받은 사람은 한평생 그 기억을 치유하면서 산대요. 행복했던 사람은 그걸 힘으로 살아간다던데."


저승은 열지 말아야 할,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은 세상을 건드렸다.

겨우 욱여놓고 덮어둔, 어디서 꺼낼 수도 없던 학대의 흔적을 내밀어서.

묵혀둔 감정이 덮치기 딱 좋은 순간이었다.


"나도 저주인형 좀 사서 뭐라도 해볼 걸 그랬어. 그런데 그러다가 또 내가 책임져야 하면? 정신을 차린 건지, 놓은 건지 모를 시간 속에서 정말 고생했는데 왜!"


간단한 부탁.

아니, 그건 명령이었다.

거절하면 돌아오는 건 욕설과 폭력뿐.

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동생이 노예라도 된 양 부려먹던 그것.

절대 끊을 수 없을 것처럼 견고했던 고리.


"제가 얼마나 나빴냐면요. 가끔은, 학교폭력을 동경하기도 했어요."


어차피 피해자라면.

생판 모를 남한테 당했더라면 이해? 용서?

지금보다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섯 살 때부터 20년이 넘게, 겨우 받은 용돈부터, 억지로라도, 거짓으로라도 받아낸 돈도,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돈까지-"


전부 내어주어서.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더라면 달랐을까.

어린 시절, 고작 500원으로 시작한 빼앗음이 점차 커져도 말릴 수 없었다.

막지 못했다.


"숨겨서 겨우 모은 돈까지, 대학 등록금도. 생활비가 없어 쫄쫄 굶던 때도-"


단 한 번도 헤아려주지 않은 사람조차 언니라고.

되찾은 나라에서, 빼앗기는 기분을 알게 하는 세상에서.

만약 그 시대였다면, 자신은 결코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철없던 시절에, 맞는 게 두려워서 피했던 그때에, 나도 어려서. 같이 즐겼을지도 모르는 게"


온전히 크고 나서는 그게 더 힘들어서, 쉬이 도망칠 수가 없었다.

휘둘리던 때에, 그걸 방패로 자신도 그랬을까 봐.


"아니, 그랬어요. 언니한테 맞기 싫어서 시작했던 거짓말이 입에 붙었던 탓이라 해도, 편의주의적으로 이용했던 것도 사실이라서."


그 횟수가 많지는 않다.

그냥 친구들이 하는 군것질이 부러워서.

자신도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에, 못된 짓을 배운 뒤라.


"나도 똑같이 나쁜 사람일 테니까. 들추기 싫었던 추악한 낯도 거기 있어서."


놓고 떠난 때에는, 독한 각오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스스로 구원할 여유가 없거나 혹은 구제될 이유가 안 될까 봐.


"인형 레스토랑으로 초대할 수 있다고 했죠? 그러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다인은 검은 드레스의 여인을 아스라이 바라봤다.

신, 염라, 어떤 이상의 존재.


"저도 꼭 벌해주세요."


참 회개하기 좋은 때다.

더 이상 이어갈 생활은 없지만.

어쩌면 이 지옥에서, 감옥처럼 방이 주어진다면.

거기서는 슬기롭게 보낼 수 있을까.


"재밌네. 평생을 원망했으면서도, 자신도 그 안으로 밀어 넣는 게."


한 개인의 영원을 돌아보는 건 참 고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야 하는 지유는 눈앞의 여자를 빠듯하게 감상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흥미를 끄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딱 맞는 직책을 주지."


다인의 처우를 결정한 지유의 뒤로, 희미한 연기 자국이 감돌았다.

재인과 상담할 것까지는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지유가 사라지자 혼자 남은 다인은 책상 위에 놓인 구겨진 종이들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참 유감이야. 내 존재가"


열심히 자신을 부려먹고, 웬만한 것들을 다 자신이 해주었음에도.

확실히 그랬다.


"내가 언니에게 해가 되었다는 게."


동생인 자신이 없었다면, 시킨다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인형으로 살아서, 살게 해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야."


심판 앞으로.

인형이 된 언니와 관리자가 된 자신은.

꼭 그때와 같았다.

자신의 어리고 젊었던 시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내 차례인가?"


이전의 관상용이 아닌, 어쩌면 상전이 아니라.


"낡고 닳을 때까지"


이 손에 놀아나주길 바란다.

그토록 빌었던 자유로운 손아귀 위에서.

그곳에 떨어진 다빈은 한참 큰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끓는 분노로 동생을 대했던 때.

반성하고 돌아서도 또 같이 굴 때,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억울하면 내 동생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생각했다.

시킨 것 하나 제대로 못해서 화나게 한 게 누군데.


'너 따위가 감히.'


지금의 처지가 분한 다빈이 오래도록 다인을 노려봤다.

몰래 돈을 모아서 떠날 때는 언제고.

가족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도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지만, 꿰맨 자국에 그게 소리 되어 나오진 못했다.

그런 인형을 내려다보는 다인의 눈빛이 사사로이 일렁였다.

이런다고 울분이 지워지는 건 아니라서, 그래도 놓아주고 싶진 않았다.

이 적막이 주는 안락함이 감사해서.

고요한 덕분에 휴식이 될 수 있는 놀이라서, 기꺼이 즐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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