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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파티

Jelly in my pocket

2023_이야챌린지_043

by 이야
임시 표지

"아빠, 얼마나 걸려요?"


한참 창문을 바라보던 리하는 지루함이 만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미러로 딸을 흘긋 쳐다본 인혁은 딸의 뚱한 표정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금방이야~ 할아버지한테 들려줄 노래를 더 연습하는 건 어때?"

"음. 어제 많이 불러서 목 아픈데…"

"물 줄까?"


고개를 젓는 딸을 확인한 인혁은 목 푸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다 왔다!"


연습한 노래 외에도 여러 곡을 부르던 리하는 익숙한 장소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그러게~ 저기 할아버지 나오시네."

"내려도 돼요?"

"응. 먼저 내려~"


아빠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차에서 뛰쳐나간 리하는 느릿하게 걸어오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꺄아, 할아버지!"


잔뜩 신난 손녀를 발견한 윤석은 숨겨뒀던 힘을 드러내며 손녀를 높이 안았다.


"위험해요. 아버지."


주차를 마치고 다가온 인혁이 그런 둘을 보고 경고했다.


"나 아직 정정하다."


투박한 부자의 대화를 듣던 리하는 할아버지의 등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리하. 그러다 다친다?"

"할아버지 아직 건강해!"


이미 윤석과 한편인 리하는 아빠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윤석도 그런 리하를 떼어내지 않고 집으로 몸을 돌렸다.

먼저 걸어가는 아버지와 거기에 업힌 딸을 못마땅하게 바라본 인혁도 하는 수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일주일 동안 있을 거라고?"

"나는 더 있어도 되는데!"

"아빠, 일 때문에 안 돼. 네. 그동안 여기에만 있지 말고 시내에도 다녀와요."

"귀찮게, 뭘…"

"가요, 할아버지~"


이번엔 아빠 편을 든 리하가 조르자 윤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강아지, 덥지?"

"할머니!"


수박을 가지고 들어오는 할머니를 본 리하는 아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달려갔다.


"에구. 왜 이렇게 말랐어? 애비, 우리 강아지 굶기니?"

"그럴 리가요. 리하 정도면 많이 나가는 거예요."

"아니거든! 나, 돼지 아니야!"


아빠의 말에 불같이 화낸 리하가 할아버지에게 아빠를 혼 내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손녀 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인혁을 타이르며 리하에게 시원한 수박을 건넸다.


"와, 맛있어요!"

"그래, 할미가 참외도 줄게~"


이후로 참외, 포도 등 여러 과일을 섭취한 리하였다.

슬슬 배가 불러온 그녀는 국수를 해주겠다는 할머니의 말에 기겁하며 아빠를 찾았다.


"어? 아빠는?"

"저기~ 더운데 농사일이나 돕지, 웬 사냥을 한다고."


옆에서 부채질하던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얼굴로 인혁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나도 아빠 따라갈래!"

"위험하니까 집에 있어."


준비를 마친 인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강아지는 할미가 해준 국수 먹어야지~"

"앗…"


쟁반에 또 간식을 가져온 할머니를 본 리하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런 딸을 내버려 둔 채 인혁은 사냥을 하러 떠났다.

국수가 준비될 동안 간식의 늪에 빠진 리하는 뒤늦게 아빠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으. 할아버지, 이것 좀 대신 드세요! 저는 산책하고 올래요!"


쟁반을 할아버지에게 미룬 그녀는 혹시라도 잡힐까 빠르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오늘따라 출렁이는 배를 느끼며 아빠가 남긴 발자국을 좇아 숲으로 나아갔다.


"헉. 헉. 다시 배가 꺼진 것 같기도?"


이제 국수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 리하는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아빠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아빠~"


드문드문 들어오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으로 따스함을 느낀 그녀는 반짝이는 청록색의 잎을 감상하며 앞으로 이동했다.


"아빠, 어딨어!"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아빠를 얼마나 찾았을까.

목에 흥건하게 흐르는 땀을 닦아낸 리하가 화를 내며 걸음을 멈췄다.

나뭇잎에 가려져 온전히 보이지 않는 하늘 사이로 어느새 햇빛도 찾아오지 않았다.


"으, 금방 어두워지는 거 아니겠지? 여름이라 해 긴 편인데…"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 몸을 튼 리하는 즐비한 나무들 사이를 바라보다 깨달았다.


"헉. 어디로 가야 하지?"


길이 나지 않은 곳에 발 닿는 곳으로 오다 보니 자신의 처지를 이제야 알아챈 그녀는 주변을 빙 둘러봤다.


"저쪽인가?"


확신이 사라진 그녀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패닉이 왔지만, 계속 연습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윤석의 손녀이자 하인혁의 딸, 하리하는 여기서 죽지 않아!"


바닥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손에 넣은 리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대로 허리를 숙인 채로 주운 가지를 잘 세우고 쓰러지는 방향을 지켜본 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쪽으로 가야 하네!"


신중한 결정을 내린 리하가 당차게 발을 들었다.


"엇? 물소리다!"


원래 가려던 방향이 아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린 리하는 물이 흐르는 강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 시원해~"


한쪽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리하가 물속에서 첨벙첨벙 돌아다녔다.

옷 위로 물이 튀었지만 개의치 않고 한참을 노는 그녀였다.


"배고프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리하는 아까보다 트인 그곳에서 주변을 확인했다.


"아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그녀가 크게 포효했고, 얼마 가지 않아 인기척을 들은 리하가 침을 삼켰다.


"아빠야?"


천천히 다가오는 움직임을 포착한 그녀는 사냥하는 아빠가 조심히 오는 것이라 판단하고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빠, 맞겠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안은 채 양손을 꼭 잡은 그녀는 이내 그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굳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의 등장에 리하는 급히 숨을 멈췄다.


'곰? 뱀도 아니고 곰??'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해도 쉬이 믿지 못할 존재였지만, 생존 본능은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정면으로 마주한 곰의 검고 깊은 눈동자 너머로 겁에 질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꿀꺽.

그것이 자신의 소리여서 안도하는 것도 잠시 곰의 앞발이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리하는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했다.


"헉?"


자신을 낚아채듯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던 앞발은 생각과는 달리 리하를 스치지도 않았다.


"아,안녕?"


얌전한 곰의 자세를 지켜본 리하는 용기를 내 손을 들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리하를 바라보는 곰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리하야."


자신을 소개한 리하는 용감하게 손을 뻗었다.

잠자코 리하의 손을 허락한 곰은 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와. 부드럽다."


곰에게서 해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리하는 부드러운 곰의 털을 쓰다듬다 옆으로 이동했다.


"응? 뭐야? 곰에도 원래 뿔이 있나?"


일전에는 놀라서 보지 못한 곰의 특이한 외형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렇게 큰 뿔을 아까는 왜 못 봤지?"


저도 모르게 리하가 뿔을 만지려 하자 눈을 뜬 곰이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내주었다.


"뿔 달린 말은 유니콘인데! 너는 곰이니까 베어콘인가? 아니, 넌 상상의 동물이 아니니까 이름이 있나?"


단단한 뿔을 매만지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훔. 내가 이름 붙여줄까?"


뿔보다는 털의 감촉이 더 좋았던 리하가 다시 털을 문지르며 물었다.

분명 대답할 수 없는 동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처럼 느껴진 리하가 왠지 모를 사명을 가지고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동생 하면 되겠다. 하리보 어때? 응? 어디서 들은 이름이라고? 흠. 그게 좋은 것 같은데…"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결국 처음 생각한 이름이 마음에 들어 곰에게 그 이름을 붙여주었다.


"헤헤. 집 가면 도감 살펴봐야지~"


반달가슴곰은 알아도 눈앞의 곰 종류는 모르는 리하가 동생을 껴안으며 즐겁게 웃었다.

털이 가득했음에도 전처럼 덥지 않은 그녀는 배고픈 것도 잊고 리보와 깊이 교감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한 둘이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탕!


"어?"


어디선가 들리는 총소리에 아빠가 근처에 있음을 깨달았지만, 놀란 리보가 몸을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넘어진 리하가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던 때, 리보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 리하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리보야!"


동생을 향해 크게 외쳤지만, 리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그 자리에서 울먹이던 그녀는 총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리보가 사라진 곳을 돌아보며 걷던 리하는 아빠를 불렀다.


"리하? 여기까지 언제 왔어?"


총을 다시 등에 맨 인혁은 울고 있는 딸을 보고 다그쳤다.


"흐아앙."


서럽게 우는 리하를 더 혼낼 수 없었던 인혁은 딸을 안아들었다.

그대로 사냥을 마치게 된 그는 가슴을 적시는 리하의 머리통을 보다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야가 배고팠나 보네~"


땀과 흙, 물로 젖은 리하의 모습을 확인한 할아버지가 말하자 할머니의 눈이 빛났다.


"강아지, 국수 먹을까?"

"애 손부터 씻고 먹일게요."


아빠 손에 이끌려 호스 앞으로 간 리하는 비누로 손을 닦으며 떨어지는 털을 보고 다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응? 시골 강아지랑 놀다 왔어?"


한편 곁에서 그것을 지켜본 인혁이 물었다.


"뿔 달린 곰이었어요. 내 동생…"

"곰은 뿔이 없을 텐데?"


쨍그랑.


"아버지. 벌써 손에 힘이 없으면 어떡해요?"

"무신 곰을 봤다고?"


국수를 먹으러 마루에 돌아온 둘의 대화를 들은 윤석이 놀라서 되물었다.


"뿔이요. 예쁘고 단단했어요."

"강아지, 국수 많이 묵자이?"

"네, 할머니!"

"왜 그래요, 아버지? 젓가락, 이거 쓰세요."


아들에게서 젓가락을 건네받았지만,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진 윤석은 국수를 먹는 손녀를 평소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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