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는 친구의 생일 축하 메시지도 다 폰으로 보내게 된 그녀는 편지를 쓰려고 준비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진짜 고3 때 이후로는 편지를 거의 안 쓴 것 같은데?"
볼펜을 든 채로 멈춘 그녀는 편지에 어떤 내용을 적을지 고민했다.
거듭 생각하던 그녀는 넉넉한 편지지를 보고 그제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소은이야.
처음 한 줄은 간단했다.
-어느 날 나는 깨달았어. 텍스트의 세상에서 텍스트가 사라졌다는 거. 그게 내게는 큰 슬픔으로 다가왔어. 어느새 너로 가득한 세상이 조금은 미워진 거야. 직접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게 어려웠던 나는 고심 끝에 생각을 정리해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나도 모르는 새 네게 물들었던 거지. 그러다 보니 모든 걸 쉽고 가볍게 나누게 됐어. 그렇게 굳어진 바탕이 보이게 된 날에 비로소 알았어. 그 사이에 내가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래서 나를 가린 네가 원망스럽기도 했었어. 그렇게 네 탓을 하면서 마주한 내가 지금껏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 같아서 초라하게 느껴지더라.
편지를 쓰는 데 한껏 집중한 그녀의 눈이 진지했다.
편지지는 어느새 그녀의 손글씨로 빼곡히 채워졌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가 점차 간결해지는 것을 넘어서 많아지고 다양해진 너를 내세우며 보냈던 순간들이 아까워졌어. 내 관계는 넘치는 너와 반대로 얕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거든. 분명 너를 재밌게 활용했던 때도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이상한 걸까? 그래도 한 번 생각하니까 너에게 의존했던 대화만이 보이더라고. 너 뒤로 사라진 말들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이어서 계속 편지를 쓰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자신이 쓴 내용을 한 번 훑어본 소은은 가방에서 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친구들과 나눈 대화 목록들을 확인하는 그녀였다.
-이런 내 생각을 친구들에게 전하는 것이 어렵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게 친구들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어. 그동안 내가 할 말이 없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혹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참 신기해. 대화를 보조하던 네가 이제는 대화를 주도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앞으로 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 볼까 해. 엄청 거창한 건 아니겠지만 ㅎㅎ. 이전보단 풍부한 세상에서 너를 만나고 싶어. 네가 있어서 도움이 됐던 것도 많지만, 너를 놓고도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이 그리워.
소은은 며칠 전 찾아뒀던 과거의 폰을 켰다.
갤러리에는 친구들과의 대화 내용이 대부분 캡처되어 있었다.
-10년 전, 내가 잊었던 다채로운 세상을 다시 그려갈 수 있도록 응원해 줘.
펜을 완전히 내려둔 그녀는 편지지를 봉투에 넣었다.
메신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모티콘에게 보내는 한 통이었다.
"내가 이런 편지를 쓰다니. 놀랍네."
에어컨 온도를 조절한 그녀는 침대로 걸어갔다.
전날 밤, 친구와의 연락을 끝내고 문득 든 생각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폰을 켜자 채팅 수가 보였다.
"역시 이모티콘 파티네."
분명 텍스트도 간간이 있었지만, 채팅의 반 이상은 이모티콘으로 채워져있었다.
"결심한 대로 해보자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판 키를 눌렀다.
-나는 오늘 평소랑 달리, 색다른 경험을 해봤어 ㅎㅎ.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가지 않아 친구들에게 답장이 왔다.
어떤 건지 텍스트로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고, 물음표를 든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내는 친구도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에게 편지를 쓴 일이랄까?
친구들의 궁금증이 커져가는 그때, 직접 만나서 보여주겠다고 말한 소은은 폰을 머리맡에 내려놨다.
"이제 자야겠다."
편히 잘 자세를 취한 그녀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여전히 텍스트의 세상에서 살아갈 줄 알았던 자신이 먼저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잡은 게 신기한 그녀였다.
그것은 아마도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몇 번의 불빛이 폰에서 나왔지만 소은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깊이 잠에 든 소은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평소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의 캐릭터들이었다.
"몽몽이?"
소은은 원숭이 형상을 한 귀여운 캐릭터에게 다가갔다.
옆으로는 어릴 때 본 만화나 요즘 보는 웹툰에서 나오는 캐릭터들로도 가득했다.
"소은. 편지는 잘 읽었다."
몽몽이의 말에 캐릭터들이 고개를 같이 끄덕였다.
"우리를 높이 평가해 줘서 고맙다, 소은."
"어?"
"우리는 경쟁 속에서 살아. 선택받기 전까지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 그렇게 선택받으면 어느새 바쁘게 불려 다녀. 하지만 또다시 잊히지. 그런 반복 속에서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온 거야."
몽몽이의 손에는 그녀가 쓴 편지지가 들려있었다.
"우리가 잊은 게 이 안에 있었어. 그게 이제는 간절함이었는지, 욕심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심했어. 더는 대화를 먹지 않고 차리는 이모티콘이 되기로!"
몽몽이가 편지지를 품에 잘 챙기고, 바나나를 꺼내 소은에게 건넸다.
"그러기 위해선 소은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이 바나나 동맹을 맺지 않겠어?"
"그래. 이젠 내가 도와줄게!"
서로 마주 보고 바나나를 나눠잡은 몽몽이와 소은이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한 입 베어무는 장면이 소은을 반겼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잠에서 깬 소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바나…나?"
비몽사몽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어제 잘 보관해둔 편지지를 찾았다.
"응? 이게 뭐야?"
편지 봉투 위로 바나나 그림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놀란 소은이 눈을 비비자 더는 보이지 않았다.
"뇌가 착각한 건가?"
꿈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소은은 화장실로 이동했다.
"이모티콘이 대화를 차리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네."
양치와 세수를 마친 소은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출근 준비를 끝낸 그녀는 어젯밤 불탄 채팅방에 몽몽이로 인사를 보냈다.
-내가 만나자고 하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외계인 설은 뭐야ㅋㅋㅋ
계단을 내려가며 친구들의 대화 내용을 읽은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방에서 미니 손풍기를 꺼낸 그녀는 아침부터 찌는 더위 속에서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평소보다 밝은 얼굴로 회사에 도착한 소은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결국은 또 내가 도움을 받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처음처럼 친해진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