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야파티

귀환하는 세계의 희망

2023_이야챌린지_048

by 이야
임시 표지

"뭐야?"


유하는 갑작스레 달라진 시야에 눈을 비볐다.

어느새 숲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

그녀가 팔을 꼬집었다.


"아야. 후우, 침착하자. 언니가 알려준 호신술도 있잖아!"


심호흡하며 평안을 찾은 그녀의 눈에 무언가 반짝였다.


"이건?"


손을 휘적이자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대상자를 식별합니다. 진입 확인이 완료됐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그녀가 연달아 울리는 시스템을 확인했다.


[스킬을 획득합니다.]


"고백(D)? 뭔 스킬이야?"


순수한 의문이 든 그녀가 창을 넘겼다.


-최대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패시브)


"이딴 스킬이 세상에 어딨어!"


억울하게 항변했으나, 들어주는 이는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뿐이었다.

한참 푸념하던 그녀는 뒤늦게 발견한 퀘스트창을 읽었다.


-당신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차원(11783)에 강제로 진입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적을 죽여 SP를 획득하세요. 당신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SP는 계속해서 줄어들 것입니다. SP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0이 될 경우, 해당 차원에서 당신의 생존이 더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단, 차원신의 배려로 진입 후 한 달(28일)에 한해 당신의 SP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심플한 설명과 경고였다.


"28일 동안 SP가 줄지 않는다고? 그러면 적을 죽일 필요 없겠지? 그런데 적이 설마"


원래도 낯설었던 숲이 더욱 을씨년스러워진 유하가 양팔을 감쌌다.


"진짜 같은 인간이라고?"


어디선가 날라온 화살을 운 좋게 피한 유하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금방 숨이 차올랐지만, 다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어깨로 화살이 박혔다.

바닥으로 쓰러진 유하의 시야가 흐려지는 때, 그녀를 표적 삼은 궁수들이 한 인형에 의해 하나둘 사라졌다.


"살,려주세요."


유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의 얼굴이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제가, 얼마나 불쌍하냐면요. 여기에 오기 전만 해도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고백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알겠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눈이 어디를 향했는지 알아서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기로 끌려왔죠. 게다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무리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지만, 그건 또 어땠냐면요…"


흙이 묻은 손으로 여자의 다리를 붙잡은 유하가 쓰게 웃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 보답은 해야겠군. 한 번에 보내주겠다."


유하의 마지막 말에 짧게 감상을 뱉은 해령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역시 살인귀라 그런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군."


정혁이 자신의 무리로 해령을 에워쌌다.


"대답할 가치도 없단 건가?"


그저 검을 다잡은 해령은 순식간에 끝을 냈다.


"큭. 어떻게 그렇게 무감하게 살인할 수 있는 거냐!"

"이상한 말을 하는군."

"며칠 전 우리 조가 정찰을 떠나있을 때, 마을을 다… 헤집어놓고 갔지. 거기엔 아이들도 많았어!"


해령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자신을 탓하는 정혁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그렇게 모여 살았을 때, 마음에 들었나?"

"무슨 그딴. 차라리 죽여라!"

"나는 이 세계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사는 곳이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아야겠다고 정의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곳으로 끌려들어 온 우리를 위해 울어줄 사람들은 생사 여부 따위 알 수 없겠지. 더는 사회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곳에서 굳이 생존이 아니더라도 살인은 반복될 거라는 거."


말을 하던 중, 정신을 잃어가는 정혁을 확인한 그녀는 그대로 베어냈다.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꽤나 공허한 눈빛이 붉게 물든 숲을 훑었다.


"커억-"

"목표물 발견 완료."

"여긴?"


눈을 뜬 정혁이 주위를 살펴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령의 유하에요."

"너는 몇 분 전에 죽은 여자?"

"어머? 절 아세요?"

"그래, 네가 죽고 우리 조가 살인귀를 상대하다"

"아~ 그 정찰조 리더구나? 여기로 귀환할 때, 시간이 다 다르거든요~"


정혁을 데리고 벤에 탄 유하가 입을 열었다.


"여기 푸른 불 보이죠? 이거 아저씨한테도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살펴본 어깨에는 정말로 문양이 있었다.


"살인귀 박해령에게 죽어 돌아온 이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표식이에요. 일단 거기서 제가 죽고 나서 저는 한 달 동안 실종 상태였어요. 이동한 날에 바로 죽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답니다?"


상쾌한 목소리가 골을 울렸다.


"아저씨 조원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일부는 이미 찾았어요~ 아마 아직 못 찾은 분들은 시간적으로 늦게 나타나거나 혹은 저희가 못 발견한 거겠죠."

"그곳을 다녀왔다는 게 실감이 나는군."

"네, 실제 있었던 일이죠. 그래서 트라우마 치료도 돕고 있으니 상담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정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귀환이라 했지? 그 말은 살인귀에게 죽으면"

"이렇게 돌아온답니다."

"그녀는 어째서 알리지 않았지? 그랬다면 내 손으로 죽인 이들은"

"진정하세요."

"몰랐던 게 아니라면 왜 공유를!"

"아휴, 진정하시라니까."


흥분한 그에게 진정제를 놓은 유하가 혀를 찼다.


"죽으실 때, 들으셨죠?"


잠시 후, 깨어난 그를 안심시킨 그녀가 물었다.


"뭘?"

"시스템이 파괴됐다는 거요."

"그 알림이 그거였군. 웅웅 거리는 소리로 들려서 몰랐다."

"그것도 그녀가 유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서 우리는 그때의 힘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날뛰어봤자 평범한 인간인 거죠."

"아까는 미안하군."

"알았다면 됐어요. 령은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로, 귀환자를 돕고 이세계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해요."


령의 구역으로 그를 데려온 유하가 빔 프로젝터를 키며 설명했다.


"비밀 유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서 혹시라도 그녀가 위험해진다면 더는 떠나는 이들이 돌아올 수 없게 되니까요. 그래서 알리지 않는 거죠. 물론 웬만해서는 그녀를 못 이기겠지만요."

"그 빌어먹을 세계는 여전히 사람을 납치해 가는군."

"그쵸. 무작위로 넘어가는 세상에 공표해 봤자 혼란만 가중시키겠죠."


유하가 리모컨을 조작해 화면을 바꿨다.


"실종자를 위한 자료에요. 또 언젠가 나타날 귀환자를 위한 거기도 하고요."


이윽고 진정혁을 위한 헌정 영상이 틀어졌다.

오랜만에 가족을 확인한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현재 가족분들은 외국에 나가있네요. 갈 수 있게 티켓을 준비해 줄까요? 아니면"


그간의 힘든 시간을 위로한 유하가 제안했다.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령은 꽤나 괜찮은 조직이거든요."


유하가 한창 령을 자랑하고 있을 때, 해령은 물가에서 피를 씻어냈다.

자신의 스킬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람을 베는 감각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반증이 이거였으니,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본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쏘게?"

"무기를 버려!"


애초부터 치안이란 게 없는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해령은 손쉽게 경찰을 제압했다.


"총이라. 오랜만에 쥐네."


그녀가 능숙하게 총기를 다뤘다.


"내 동생이 실종됐었어! 그런데 한 달 만에 무사히 돌아왔지!"


자신을 겨냥한 총을 보고도 침착한 여인이 소리쳤다.


"그리고 하는 얘기가 여기였다. 살인귀 박해령. 우리 애를 죽여줘서 고맙다."


해령은 인사와 함께 실현된 스킬을 재밌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건 신선한데? 취조 스킬이라."

"박해령, 당신이 가진 스킬이 뭐지?"

"그쪽이 고마워한 스킬? 귀환. 거기에 이런 허접한 스킬을 쉽게 깨뜨릴 수도 있는 파훼까지."

"귀환, 그건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나 보지?"


해령이 작게 폭소했다.


"그래. 맞아.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거 아니겠어?"

"당신이 작가였다는 걸 알아. 우리는 그동안 당신이 쓴 글들을 열심히 읽었어. 당신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건 좀 부끄럽네."


하지만 말과 달리 무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는 해령이었다.


"당신의 방식이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당신은 분명한 우리 세계의 희망이자 구원이라는 거야."

"동생이나 언니나 참 솔직하네."


해령은 언제나처럼 유나를 죽이려고 했다.

아니, 언제든 그녀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대여서 그런 걸까?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음이 풀어진 해령은 잊은 줄 알았던 과거가 떠올랐다.


"이젠 우리가 빚을 갚을 차례지. 기회를 줘. 당신도 고향을 찾을 권리가 있으니까."

"…"


한때 자신이 쓴 글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어쩌면 내 이름처럼 나는 박해받은 이들의 혼이 모여 만들어진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더는 사람들이 세상에 박해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언젠가 고향을 잃고 떠나야만 했던 이들을 다룬 역사책을 보고 썼던가.


"내 진짜 능력은 귀환이 아니야. 맹세컨대, 나는 귀환이란 스킬을 얻기까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운이 좋게도 나는 이세계로 떨어진 첫 번째 생존자거든. 딱히 달아두진 않았지만, 갚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더는 이곳으로 아무도 오지 않게 된 다음에는 말이지."


굳은 의지를 몸소 느낀 유나가 전율했다.

그녀는 가족의 은인을 넘어 세상의 구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따를 이유는 충분했다.

해령이 작게 웃었다.

이 삭막한 곳에서 마음을 둘 사람을 찾은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결국 죽여 돌아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을 내주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희망으로 스며드는 때였다.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떠나도 남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