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말이야. 장난이나 가짜로 글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대비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맞아요. 그래도 학교 측이 휴교를 결정해서 다행이에요. 빨리 범인이 잡혀서 애들이 안심했으면 좋겠네요."
"그렇지. 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원."
동료 교사의 말에 윤아가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부림 사건 자체는 옛날에도 꾸준히 있었지만, 올해에는 개인의 원한보다는 묻지 마 식이나 테러 형태의 난동이 많이 발생하고 있어 더욱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물들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 금방 사라진 글이라고 해도 안일하게 대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퇴근하고 돌아온 윤아가 구두를 벗었다.
"후우, 다녀왔습니다."
"딸~ 왔어?"
자신을 반기는 엄마.
윤아가 힘없이 웃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밥부터 먹자."
며칠 사이 더욱 힘들어 보이는 딸을 위해 혜연은 한상을 차렸다.
"괜찮아."
"아니야. 오늘은 꼭 먹어야 해."
혜연이 딸의 팔을 부여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엄마가 차린 밥상을 보자 피할 수 없었던 윤아는 자리에 앉았다.
간신히 수저를 든 손.
휘적휘적.
탁.
"잘 먹었습니다."
"겨우 그것만 먹고 돼?"
"더워서 그런가, 입맛이 없네."
"그러면 내일은 삼계탕 해놓을 테니까 그거라도 먹자, 응?"
"내일… 그럴게요. 가서 쉴게요."
가방만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딸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본 혜연의 속이 타들어갔다.
"우리 윤아가 저렇게 말랐던가? 하, 엄마가 돼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초임교사로 들떴던 딸의 얼굴이 어느새 잔뜩 지친 표정으로 바뀌었음에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
나오려는 눈물을 막은 혜연은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몇 분 뒤, 씻으러 나온 윤아는 식탁에 놓인 목록을 확인했다.
"엄마, 내일 이거 사려고?"
"응. 낮에 마트 들러서."
"내가 사 올게."
"응? 내일도 학교 가는 거 아니니?"
"일이 생겨서 휴교했어."
엄마의 질문에 답한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딸의 말을 듣던 혜연은 의문이 들었다.
"학교에 일 생길 게 뭐가 있지?"
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그녀는 기어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범인이 빨리 잡혀야겠네! 위험해서 학교를 보낼 수나 있겠니!"
"수사 중이라서 금방 잡을 거야. 아무튼 나, 내일 아침에 병원 들려야 해서 나가니까 돌아오는 길에 사 올게."
"그래주면 고맙지. 아니면 이참에 같이 외식할까?"
"아냐. 들어와서 쉬고 싶어."
피곤해 보이는 딸의 얼굴을 확인한 혜연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그러면 가서 쉬어~"
딸을 방으로 밀어 넣은 혜연이 거실에 서있다 뒤늦게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나갈 준비를 마친 윤아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몇 주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정신상담 센터.
어제저녁에 연락했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으로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 주셔서 놀랐어요~"
그녀의 상담을 맡은 원장이 그녀를 반기며 말했다.
"아, 학교에 일이 생겨서요."
"해결돼서 다행이긴 하네요."
윤아의 설명을 들은 빈우가 답했다.
병원에서 대기하던 윤아는 오늘 예고에 대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범인은 같은 학교의 재학생으로, 그저 재미와 장난으로 올린 글이었다고 한다.
윤아가 맡은 학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르는 학생이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죠. 그런데 정말 다행일까요? 칼부림 사건으로 다친 이들이 있는데도 그것을 재미나 장난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네요."
"아니에요."
"사실 우리 학교 학생이 그랬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어요. 혹시나 저희 반 아이가 그랬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을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제가 맡은 반에는 요주 학생도 몇몇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되는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기다렸지만 아무래도 제가"
쉽게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계속해서 지쳤던 윤아는 눈물을 흘렸다.
"그냥 저랑 너무 안 맞는 길을 선택했나 싶어요. 기본적인 업무부터 해서 주말에도 부모님들이랑 연락해야 하는 것도 힘들고, 또 한 번 받아주고 난 뒤에는 거절하면 그에 따른 욕도 제 잘못이 맞는 것 같고… 곧 방학인데, 그날만 기다려요. 어제도 휴교령이 나서 애들 걱정이 되는 한편으로는 남모를 해방감도 느꼈고요."
"윤아 씨도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에요. 저도 이렇게 상담하는 게 일이지만, 제가 근무하는 시간 외에도 따로 요청이 들어오면 곤란하죠. 그럴 때는 매정하다 해도 확실히 생각을 말해야 해요. 그 잠깐의 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신을 옥죄는 걸 감수하다 보면 결국 남뿐만 아니라 자신도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제가 스스로를 보호하기보다는 계속 낭떠러지로 밀고 있는 것 같아요. 거기까지 절 몰고 가서는 괴로운 걸 반복하게 되는 악순환이 끊이지를 않아요."
상담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윤아는 전보다는 편한 얼굴로 마트를 찾았다.
속에 있던 말을 나름대로 꺼내고 와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그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랑 외식할 걸 그랬나."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윤아는 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엄마한테 연락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그래. 오히려 내가 요리해 주고 같이 밥 먹으면 더 좋아하실 테니까."
최근에 엄마한테 보여준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그녀는 기운을 차려 장 볼 목록을 수정했다.
마트에 들어온 그녀는 안쪽에서 카트를 빼다 손이 미끄러졌다.
소독액이 손바닥에 남은 상태여서 그런 걸까?
놀란 윤아가 팔을 뻗었지만 이미 밀려나간 카트는 지나던 여자의 몸을 스쳤다.
"헉. 깜짝이야."
옆으로 지나가는 카트를 붙잡은 여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죄송해요.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놓쳤는데. 어?"
"응? 혹시 서명초 임윤아?"
"진예원?"
카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알아본 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와, 여기서 동창을 만날 줄이야. 게다가 그 동창한테 카트로 암살을 당할 거라고는"
"아잇. 소독액이 제대로 안 발려서 한 실수래도."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어~ 어떻게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 있지?"
"너야말로 키도 안 크고, 완전 초딩 때 그대로인데?"
마트에서 만나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둘은 생각보다 편하게 수다를 시작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예원이 넌 친화력이 좋은 것 같아."
"그럴 리가. 억지로 텐션 높인 거임. 나 파워 I야."
"헐? 진짜? 바뀐 거 아니야? 어릴 때부터 완전 E라고 생각했는데."
"그런가? 확실히 초딩 때는 애들이랑 노는 걸 좋아했던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진짜 신기하다~ 지역도 달라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서 알아볼 수가 있지?"
윤아는 오랜만에 만난 예원을 정말로 반갑게 느끼고 있었다.
"나도 놀랐어. 내가 밖을 자주 안 나오기는 하지만, 오늘 산책 삼아 들린 마트에서 암살자로 전직한 동창을 보게 될 줄은."
"아닛. 그만 놀려! 나도 진짜 왜 그랬나 모르겠다니까?"
"미안~ 내가 어릴 때부터 놀리기 신동 아니었나 싶어."
"아~ 맞아. 되게 까불었던 것 같아."
기억을 더듬던 윤아가 예원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생각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꿈이 개그우먼이었나?"
"그건 무대공포증 때문에 도전을 안 했고. 기자가 되려고 신방과 진학했다가 지금은 그냥 백수로 글이나 쓰고 있어."
"글? 진짜? 내가 기억하기로는 너 책 되게 싫어하지 않았나? 교과서도 왜 읽냐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랬었나? 중학교 때부터는 좀 많이 읽긴 했는데. 다독상도 받고 그랬어."
예원의 말에 놀란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뀔 수도 있겠다 싶네."
"그치. 아, 너는 선생님 되고 싶어 했었나?"
"응. 올해 여기 예인초에 발령 났어."
"어? 진짜로? 대박! 와, 벌써? 신기하다. 25인데 능력자다."
"26인데?"
"엥? 아, 생일 지났나 보네?"
만 나이 계산에 적응 중인 예원이 손뼉을 쳤다.
"아무튼 25에 들어간 거 아님?"
"생일이 2월이라 26에"
"아, 너도 빠른? 그런데 맞춰서 들어온 거였구나."
"보니까 며칠 동안만 동갑인 거네~"
"언니라고 부를까요?"
"됐거든~"
서로 번호를 교환한 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랑 단둘이 먹지, 나는 괜찮다니까?"
"아냐~ 어차피 밥 먹어야 하잖아? 그리고 친구 데려가면 좋아할걸?"
결국 윤아의 손에 이끌려 따라간 예원이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혹시 이거 장본 거 심부름꾼이 필요했던 거니?"
"아. 들켰나? 하하, 갑자기 많이 사게 돼서"
"아냐. 얻어먹는 데 이런 거라도 해야지. 좀 많이 덥긴 하지만."
두 손에 한가득 짐을 든 예원이 땀을 흘리며 윤아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동창을 보며 잊고 있었던 지난날들이 떠오른 윤아는 이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손은 비교적 가벼운 것도 한몫했을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만났기에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하는 편안한 대화여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