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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Jan 21. 2020

같은 눈높이의 사랑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한 수많은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가문의 대립과 출생의 비밀에 이어 동성애까지 이제 내성이 생겼을 법도 한데, 아직 그렇지도 않나 보다. 시대에 가로막힌 금지되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또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으니.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유럽, 두 여성의 사랑 이야기이다. 




셀린 시아마 (Celine Sciamma)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귀족 아가씨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섬으로 가게 된다. 초상화의 주인공 엘로이즈(아델 에넬)는 포즈 취하기를 거부해 이미 화가 한 명을 돌려보낸 전적이 있다. 언니의 죽음 이후 외출이 금지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산책 친구로 소개받는다. 마리안느는 낮에 산책하는 동안 엘로이즈의 면면을 눈에 담고 밤에는 그를 떠올리며 초상화를 그린다. 마침내 초상화를 완성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왔다고 밝히고 완성된 그림을 보여준다.

"당신이 본 난 이랬나요?"

엘로이즈의 반응에 마리안느는 스스로 그림을 지워버리고, 엘로이즈는 스스로 포즈를 취하겠다고 나선다. 두 사람은 다시 초상화를 완성해 나간다.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기 


미술사에서 여성은 언제나 객체였다. 여성은 남성 화가와 남성 관객을 위한 오브제이지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는 없는 존재다.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남자 쪽에서 여성과의 결혼을 판단하기 위한, 말하자면 '상품 미리 보기'의 역할을 위해 제작된다. 마리안느가 처음 그린 초상화는 전적으로 결혼시장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요소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피부는 밝고 투명하지만 분홍빛 생기가 돌아야 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은 정숙한 숙녀의 모습. 엘로이즈는 그 그림을 보고 '생명력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 안에 '엘로이즈'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결혼시장에서 여성이 인간을서 생명력이 있는지,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여성 화가가 같은 눈높이로 여성을 그리기 때문일까. 영화 속에서 어떤 시선과 응시도 폭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카메라 역시 그렇다. 감독과 촬영 감독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담은 여성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보는 사람과 담기는 사람이 같은 선상에 놓여 어떤 우열도 없다. 영화 속의 두 인물 뿐만 아니라 카메라 역시 그러하다. 관객은 언제나 인물들의 시선과 비슷한 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항상 여성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볼 떄만큼은 그들과 같은 눈높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기존 가부장제와 계급사회를 상징하는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떠나자 하녀 소피를 포함한 세 인물은 더욱 평등하고 자유로워진다. 이들의 평등함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하녀인 소피는 자수를 놓고, 귀족인 엘로이즈는 요리를 하고, 중간 계급의 마리안느는 가운데에서 술을 나눠주고, 마시고 있다. 한 화면을 삼등분해 수평으로 공간을 점유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개인이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하며 또 함께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각자의 카드를 가지고 룰에 따라 이긴 사람이 카드를 가져간다. 계급 같은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소리를 모으다


소피의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세 사람은 힘을 합친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모든 민간요법을 동원해 소피를 돕는다. 달리기, 약초(?) 달여서 마시기, 매달려 있기 등. 인상깊은 점은 소피의 결정과 행동에 토를 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그저 소피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존중해 준다.

한편 마을에는 축제가 열려 커다란 모닥불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든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모아 음악을 만든다. 처음에는 그저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여성들의 목소리로가 켜켜히 쌓이고 박수로 리듬감을 더하자 이는 마술적이고 신성한 음악이 된다. 음악이 고조될수록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강렬해 진다.


그때 엘로이즈의 드레스에 불이 붙고, 쓰러진다. 쓰러진 엘로이즈와 일으키는 마리안느의 손. 맞잡은 두 손은 곧장 다음날의 키스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첫 관계까지 5분 안에 이 과정이 모두 이루어진다. 사랑의 불꽃에 휘말려 버린 사람들의 숨 막히도록 가슴 뛰는 속도감과 찰나의 꿈 같은 감각이 그대로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의 음악, 소피의 임신 중단 돕기, 두 사람의 사랑은 사회적 거리에 따른 공동체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목소리를 모아 풍부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성부를 맡는 공동체적인 크고 가벼운 연대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과의 연대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달리기를 격려해야 하고, 풀을 같이 뜯어주고 달여 주어야 하며, 쓰러지면 부축해 줘야 한다. 또한 임신 중단 시술 장면을 그림으로써 이는 더욱 사회적 행위가 된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에 이르면 더욱 가까운 개인과 개인간의 연결을 볼 수 있다. 마주 잡는 손, 부딪히는 입술, 몸을 어루만지는 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가깝고 강력하다. 둘은 서로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는 일생동안 각인된다. 마리안느가 자신을 변화시킨 결정적 순간을 잊지 못하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그렸듯이. 



사랑과 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 뭔가 창조하는 느낌일까?"

예술은 곧 사랑이고, 사랑은 곧 예술이다. 엘로이즈는 드레스의 녹색을 직접 만들며, 마지막으로 초상화를 왼성할 때는 마리안느의 옆에 캔버스를 마주하고 나란히 서 있는다. 엘로이즈는 모델로만 남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림에 개입한다. 그 그림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창조해낸 그림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림은 혼자만의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그릴 때에야 비로소 초상화는 완성된다. 그림은 그리기를 멈출 때 끝이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언제 끝나는가? 마리안느의 "(그림이)끝났어"에 심장이 쿵 내려앉은 까닭은 두 사람의 사랑도 곧 끝임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끝이 예견된 그림처럼 이들의 사랑 역시 예견된 헤어짐을 향해 달려간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는 영화 속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뛰어난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독사에 물린 에우리디케를 되살리기 위해 애절한 음악으로 저승의 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저승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끝에 이르러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 만다. 에우리디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으나 둘은 영영 만날 수 없게 된다.

이 이야기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은 전부 다르다. 소피는 남자의 어리석음을 힐난하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보다 예술가의 선택을 했다는 신선한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여기서 선택의 주체를 바꿔버린다.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봐'라고 했을 수도 있다고. 

"뒤돌아봐"

우리는 에우리디케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최소한의 주체성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가 시대에 맞서는 주체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운명 정도는 남의 손에 내맡기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있다. 그들이 헤어질 때, 엘로이즈는 뒤돌아 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지만 나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이는 너와 나의 선택이다.'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영화는 말한다. 사랑과 예술은 한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고. 그 사랑과 예술의 범위에 포함된 사람들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사랑과 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평생 기억할 사랑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헤어진 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헤어지는 찰나를 그려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품한다. 신화 이야기로 둘의 사랑을 표현한 것과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품한 것은 시대적 상황에서 용인되는 마리안느의 최소한의 주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엘로이즈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엘로이즈와 그의 딸을 그린 초상화를 발견한다. 마리안느는 이것을 '재회'라고 표현한다. 엘로이즈는 그림 속에서 마리안느가 그려진 책의 페이지를 손으로 표시하고 있다. 둘은 언제나 서로를 그리워하고 기억한다.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에는 둘의 사랑과 그 순간들이 담겨 있다. 엘로이즈는 어설프게 피아노를 치던 마리안느를 생각한다. 폭풍우 같이 몰아치던 사랑을 기억한다. 행복했던 만큼 아픈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 동시에 눈물을 흘린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보고 있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기억하는 그 순간을 카메라는 끈질기게 담아낸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이. 우리도 아마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이들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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