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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May 07. 2020

내가 HELP라고 말하면 HELLO라고 답해주세요

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 표류기> (2009)

김씨 표류기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빚 2억 1천30만 8천 원. 목숨을 끊기 위해 스스로 한강에 뛰어든 남자는 무인도인 '밤섬'으로 떠내려오게 된다. 63 빌딩에서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허사다. 결국, 남자는 무인도에서 살기로 한다. 무인도에서 먹고사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남자는 병에 든 편지를 발견한다. 'HELLO'. 


3년째 자신을 방에 가둬버린 여자도 있다. 여자는 온라인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사진을 도용해 가짜 인생을 살아간다. 매일 일정한 일과를 반복하며, 취미는 달을 찍는 것이다. 1년에 두 번 여자가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간이 있다. 바로 민방위 훈련 날이다. 그때 어떤 메시지가 여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HELP'. 


각자의 무인도에 갇힌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을까? 사회의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간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회의 가장자리 

무인도에서 탈출을 시도한 남자는 한강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남들 다 되는데, 너는 왜 안 되냐.'


무능한 어린 자신을 답답해하는 아버지, 많은 나이와 낮은 스펙을 무시하는 면접관들 그리고 자신이 무능하기에 떠난 애인 수정. '희망을 놓지 말고 대출을 받자'는 대출 광고는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만 남기고 만다. 남자가 물속에서 마주한 연극 같은 일련의 우스꽝스러운 시퀀스는 그의 무능함과 좌절의 경험이며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게 한 과정이다. 남자는 항상 사회가 원하는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이었다.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 사람은 바깥으로 밀려 떠돌게 된다. 여기서 남자의 도착지는 무인도 밤섬이다. 밤섬, 그곳은 한강의 쓰레기들이 떠밀려오는 곳이며 사람이 북적이는 유원지의 푸른 수영장과 대비되는 우중충한 한강의 물에 둘러싸인 무인도다. 


잡동사니와 쓰레기 그리고 옥수수 통조림이 산처럼 쌓여 있는 이 방이 여자의 무인도다. 3년째 방 안에 걸린 자물쇠는 굳게 잠겨 있다. 여자는 일정한 루틴으로 생활한다. 아빠가 출근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3번에 걸쳐 만보기의 숫자를 채우고, 컴퓨터로 가상의 자신을 꾸미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마지막으로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에 최면에 걸리듯 잠이 든다.


여자는 사람들 앞에 진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타인의 미니홈피의 사진으로 자신의 미니홈피를 꾸민다. 남이 산 구두, 남의 얼굴을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리면 그것은 내가 된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댓글들이 결정한다. 


여자는 달 사진을 찍는다. 아무도 없어서 외롭지 않기 때문에 달을 좋아한다. 여자가 바깥세상을 보는 날은 1년에 두 번 민방위 훈련이 있는 20분뿐이다. 그때는 달처럼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를 외롭게 만든 것은 사람이었기에 사람이 없는 공간에서는 외롭지 않다. 타인의 시선과 말들에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누가 봐도 번듯한 가상의 '나'만 온라인 세상에 만들어둔 채 진짜 '나'는 방 안에 숨겨 놓았다. 아니, 방 안에 가뒀다.   



HELLO 

사회의 변두리,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내몰린 두 사람은 서로 발견한다. 여자는 남자가 쓴 'HELP'를 발견하고 외계 생명체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충분히 잊어야 다음 날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데 그 신호를 잊을 수가 없다. 남자의 구조 요청은 여자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남자는 자신이 무인도에 갇혔음을 깨닫고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의 핸드폰으로 구조 요청을 한다. 먼저 119에 구조 요청을 한다. 남자의 정중한 구조 요청은 장난 전화로 치부된다. 다음으로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한다. 당연히 무시당한다.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전화가 온다. 통신사의 광고 전화다.


곧 핸드폰의 전원이 꺼질 위기에 처하자 남자는 절박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구조 요청을 하지만 친절한 상담원은 '전국 어디에서든 빵빵 터지는 통신망'으로 답한다. 남자의 모든 시도는 불통으로 귀결되고 실패한다. 아마 인생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HELP가 HELLO가 되었습니다"


남자는 섬에서 지내보기로 마음먹고 구조 요청 신호를 인사말로 바꿔 놓는다. HELP가 HELLO가 된 순간 소통이 시작됐다.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이해해 줄 것 같은 누군가를 찾았을 때 인간은 상대와 소통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결국, 남자의 간절한 외침이 닿은 곳은 여자뿐이다.


사회에 스며들지 못한 채로 부유하는 두 존재는 서로 소통하며 궁금해한다. 여자는 남자의 메시지에 답하기 위해 3년 만에 밖을 나선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 위해 헬멧을 쓰고 우산으로 몸을 감춘 채 한강으로 간다. 힘겨운 외출을 통해 전한 한마디 '안녕'은 절대 가벼운 인사가 아니다.   



희망 


영화는 희망에 대해 말한다. 죽음을 결심하고 목을 매려다 말고 큰일을 보다 발견한 사루비아 꽃의 달콤함, 처음으로 생긴 내 집, 버섯만 먹다가 발견한 짜파게티의 분말 가루가 모두 희망이다. 삶을 살아가게 한다. 


척박한 땅에서 키워낸 하나의 작은 새싹, 숱한 노력 끝에 재배한 옥수수, 그 옥수수로 만든 짜파게티는 말 그대로 희망의 요리다.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며 먹는 짜장면에는 삶의 중요한 무언가가 들어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의 답이 그 짜장면 안에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축하한다고 작게 읊조려주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은 생긴다. 


여자는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남자를 불편해한다. 'WHO ARE YOU?'라는 물음에 도망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인정하지 못해서 방으로 내몰렸기에 여자는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온라인상에서처럼 타인의 얼굴을 자신이라고 속이는 짓도 할 수 없다. 거짓으로 만든 관계는 모래성과 같이 쉽게 부서진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친밀함, 관계, 희망은 우리에게 무엇도 남기지 않는다. 


정화 작업을 하러 온 해병대와 공익 근무 요원에게 쫓기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사냥감 같다. 그들에게 처리해야 할 대상에 불과한 남자는 존중받지 못하고 처참하게 밟힌다. 다시금 좌절을 경험하고 세상을 등지려 할 때 여자는 남자에게 달려와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김정연이라고, 너는 누구냐고. 나를 궁금해하는 누군가와 나누는 진실한 소통이 희망이다. 


결국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언가, 우리를 살게 하는 무언가가 희망이다. 그게 무엇이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진실한 나를 드러내는 것이 희망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작품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정연의 쓰레기들과 헬멧은 그리고 한강을 떠다니는 오리배는 무엇보다 강렬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7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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