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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멋대로 살고 싶다

김소연의 시 <남은 시간>을 읽고

by 코두 codu

시를 많이 읽지 않아서인지,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서툴어서인지 나는 종종 마음에 와닿는 시를 읽어도 왜 좋은지 모를 때가 많다. 왜인지 모르지만 마음에 드니 일단 표시를 해 두었다가 나중에 필사를 하면서 깨닫는다. '이 시와 나의 연결고리는 이것이구나'라고. (물론 쓰고 나서 모르는 경우도 많다.) 김소연의 시집 『i에게』에 실린 <남은 시간>도 그랬다.




나는 아직도
멋대로 듣고 멋대로 본다


'아직도'와 '멋대로'는 주로 철이 안 든,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인 시인이 아직도 멋대로 듣고 본다는 것은 오히려 어떤 의지가 느껴진다. '멋대로'해도 되는 시기를 지나서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듣고, 보는 사람. 멋대로 듣고 멋대로 보는 일은 사실 어렵다. 나도 자유롭고 천진하게 '멋대로' 세상을 듣고, 보고 싶다. 다른 사람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세상에 휩쓸려 가지 않고 '멋대로'.


등을 돌린 그 방에는 아직도 내가 남아있었다


'나'를 남겨둔 채 나는 등을 돌려 방을 나왔다. 아직 방에서 나오지 못한 채 쪼그려 앉아 악을 쓰고 있을 남겨진 '나'를 떠올려 본다. 우리는 많은 과거의 순간들에 자신의 일부를 두고 온다. 그런 '나'는 불안과 후회, 두려움을 가득 껴안고 등 돌린 나를 야유한다. 그 야유를 들으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분노에 차 방에 남은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외면하는 용도로써 손을 사용했다


나는 '나'의 손을 맞잡지 못하고 그 손으로 얼굴을 가려 모든 것을 외면하려 한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느껴지는 것은 '나' 뿐이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만이 느껴진다. 외면하려 했으나 오히려 거대하고 끔찍한 내가 덮쳐오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겪어내고 있을 때에도 멋대로 기울고 자라난다. 휘몰아 치는 나의 고통과 분노와 두려움을 겪어내며 자유롭게 자라난다.


두 팔을 휘저어 공기를 헝클며 나는
앞으로 앞으로만 걷는다 이제 앞이 알고 싶다
뒤 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


그리고 이제 뒤 같은 건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앞으로만 걷는다. 내 뒤에는 언제나 '방 안의 나'가 남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뒤는 항상 궁금하고 돌아보게 된다. 후회와 불안은 자꾸 나의 발을 붙잡을 것이다. 그래도 두 팔을 휘저어 앞으로 걸어야 한다. 앞이 알고 싶다면.

바드득, 운동화가 은행알을 으깬다
나는 아직도 씩씩하고 아직도 아름답다


은행나무는 인간보다 몇 배의 시간을 존재한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왔을 나무들의 엄호를 받으며, 나는 운동화발로 그들의 열매를 씩씩하게 밟고 나아간다. 은행나무에게 있어서 '방 안의 나'는 은행알이다. 나무는 은행알을 떨어트리고 새 잎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무를 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좋다. 나도 그렇게 치열하게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 속에 몸을 내던져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언제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그 이전의 공포와 해일 같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자만이 그렇게 걸을 수 있다. '멋대로' 사는 것은 그렇게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고통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는 서사를 이렇게 짧은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느낀 점을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려니 '참 멋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써보면 알게 되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계속 필사를 하고, 문장을 모으고, 뭐라도 쓴다.

시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날 때마다 '왜 이것이 나의 마음에 들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그 순간들이 내가 모르던 나를 알게 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발견할 때마다 나를 조금씩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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