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두 codu Mar 16. 202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노스탤지아>(1983)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을 향한 느리고 유약한 숭고함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음악가 소스노프스키는 지독한 향수병을 겪는다.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소스노프스키의 발자취를 따라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는 고르차코프 역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제니아는 고르차코프와 동행하며 그를 도우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 사실 유제니아의 바람은 멋진 모스크바의 남자와의 사랑에 가깝다. 유제니아는 자신이 아닌 성모와 종교에만 관심을 두는 고르차코프에게 화를 낸다. 고르차코프가 더 흥미를 느끼는 상대는 세상의 멸망을 대비하여 7년 동안 가족들을 집에 감금했던 도메니코다. 도메니코는 고르차코프에게 양초를 부탁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로 향한다. 러시아 음악가 소스노프스키의 전기를 쓰려고 이탈리아에 온 작가 안드레이 고르차코프와 그의 통역을 도와주는 유제니아 그리고 광인으로 불리는 도메니코는 각기 자신의 노스탤지아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고르차코프는 번역된 시를 읽는 유제니아에게 문학은 번역될 수 없다고 말한다. 고르차코프에게 시란 자신이 돌아가기 간절히 원하는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도구 중 하나다. 음악도 그러하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은 도메니코와 고르차코프를 그 어떤 말보다 가깝게 만들어준다. 노스탤지아로 향하는 데에는 어떤 번역도 무의미하다. 정상인의 언어로 통역되고 번역된 진실은 짙은 안개처럼 세상에 드리워졌다. 안개를 걷어내는 방법은 소리를 듣고,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화면 중앙의 문 혹은 통로로 들어간다. 넓은 공간의 중앙으로 깊이 침투하며 인물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흑백의 화면과 의미를 종잡기 힘든 느린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깊숙한 심연으로 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인물들이 갈망하는 노스탤지아는 그들의 내면에 존재한다. 실제로 닿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곳은 비단 공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그곳은 한 시기와 공간이 합쳐진 시공간이다. 따라서 내면에만 존재하는 그곳에 닿을 수 있는 길은 영적인 길 뿐이다.


앞으로 가지 않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다. 지붕 곳곳에서 새어 들어오는 빗물을 유리병으로 받는다. 가고자 하지만 가지 못하고, 담고자 하지만 담지 못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가려하는 기억 속의 그리운 고향과 영적 구원의 공간은 어쩌면 자신을 불살라 재가 되어야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럽혀지지 않은 물의 시대, 그리운 고향의 들판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갈구하는 무의미한 몸짓은 그렇기에 무엇보다 숭고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속에서 세상은 분열되고 있다. 오직 광인만이 희뿌연 안갯속에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도메니코는 “생명이 시작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도메니코는 물이 더럽혀지지 않은 시대로 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맹목적인 믿음과 고독한 외침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무관심한 광장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한 것처럼 외면할 뿐이다. 오직 개 ‘조이’만이 애처롭게 울부짖는다.


영생을 위한 온천욕과 구원을 위한 촛불 옮기기는 언뜻 비슷한 행동처럼 보인다. 온천욕을 하며 도메니코를 조롱하던 자들의 대화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에게는 무의미한 대화다. 그러나 정상인들이 광인이라 칭하는 도메니코는 시인의 관심을 끈다. 마침내 물이 빠져 더러운 바닥이 드러난 유황 온천은 영생을 이루어줄 무엇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위를 건너는 고르차코프의 촛불만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그렇게 위태롭게 빛을 발한다.


쉽게 꺼지는 촛불을 감싸 바람을 막아 본다. 세 번의 시도 끝에 고르차코프는 타오르는 양초를 온천의 반대편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도메니코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동안 온천탕을 가로지르는 촛불도 아슬아슬하게 불타오른다. 쉽게 꺼지고 마는 촛불은 인간의 마음만큼이나 연약하다. 이를 지키기 위해 고르차코프는 손으로 옷으로 바람을 막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관객은 8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를 지켜보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보는 이들은 인내와 고통을 견디며 기다린 끝에 숭고함에 도달한다. 촛불을 들고 온천탕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롱테이크는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유약함과 숭고함을 보여준다.



호텔 방의 낡디 낡은 성경 안에는 머리카락이 엉킨 빗이 들어있다. 구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소스노프스키는 결국 노예가 되기를 감수하고 러시아로 돌아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가 돌아간 러시아는 그가 꿈꾸던 그곳이 아니었다. 소스노프스키는 돌아가고자 했던 내면의 노스탤지아에 갈 수 없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안드레이 고르차코프가 소원하던 그곳을 그에게 허한다. 꿈에 그리던 고향의 풍경과 영적인 공간이 현현한 그곳에 고르차코프는 도달한다. 고르차코프와 ‘조이’를 비추는 물웅덩이는 모든 생명의 시작이 된 그 물이리라. “다 타버린 양초”는 구원의 장소에서 안식을 찾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니와 알렉산더>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의식의 넓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