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두 codu Apr 11. 2023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 (2015)

역사의 부끄러움에 대한 덧붙임


시의 힘을 빌리나 시적이지 않은

<동주>는 시의 힘을 빌려 민족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독립운동가 송몽규(박정민)의 생애를 엮어낸 영화다. 시 한 편 한편에 시인의 삶을 녹여냈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다룬 영화이기는 하나 이 영화를 시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인물들의 생애는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직접적이고 충실히 설명된다. 간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도쿄와 교토로 마침내 후쿠오카의 형무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충실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다. 직접적이라고 해서 시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와 함께 나오는 장면들은 시를 설명하는 데 그치고, 이들의 연대기에 따라 재배치된 시들은 설명적으로 덧붙여진다.



동주의 열등감과 수동성

공산주의에 대한 연설은 몽규의 적극성과 혁명가적 기질을 보여준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 “ 몽규는 문학을 도구로써 대하지만 그 재능은 신춘문예 당선될 정도다. 두 사람의 관계는 몽규의 재능과 기질에 대한 동주의 부러움과 열등감을 내포하고 있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글공부를 때려치우고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시와 문학을 낮잡아 보는 듯한 몽규의 말은 동주를 위축되게 만든다. 동주는 그럼에도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이다.


몽규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동주의 행동은 그림자처럼 수동적이다. 동주의 적극성은 그저 시상을 향한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강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비춰 시를 쓰는 것이 그의 삶을 향한 적극성이다. 일제에 억눌린 시대의 상황은 동주를 낭만적 시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남의 나라에서 자신의 언어로 시를 쓰려하는 시인의 고뇌는 사촌에게 느끼는 열등감 이상의 압박이다. 그리고 강한 압력을 받을수록 동주가 가진 순수성과 이상은 더욱 밝게 빛난다.


다르지만 같은 혁명가와 시인의 길


윤동주와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는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죽음을 맞이한다.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엇비슷하게 나아간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열망과 괴로움은 다르다. 송몽규는 연설과 혁명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꾸려 했고, 윤동주는 시와 문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동주>는 오랜 시간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윤동주의 시와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고뇌와 열정을 중심에 둔다. 몽규는 주권을 찾는 길, 혁명가의 길을 가려했다. 우리에게는 송몽규와 윤동주 둘 다 필요하다. 두 사람은 이성이자 감정이며 이상이자 현실이다. 없어서는 안 되는 민족의 몸과 마음이다. 몽규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될 것을 우려해 문학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시와 문학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 문학 속으로 숨”게 될까 봐 걱정한 것이다. 동주는 몽규의 말에 반발하며 “이념을 위해 모든 가치를 팔아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두 인물은 같은 마음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한다. 동주가 “시를 사랑하는 만큼” 몽규는 “세상을 사랑”하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시를 쓰는 행위가 어떻게 실천적인 운동이 되는지는 동주가 체포되는 것으로 반증된다. 영화는 동주가 심문과 약물 실험을 당하며 쇠약해져 가는 시기와 송몽규와 윤동주가 함께 한 시절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특히나 마지막 서명 장면은 동주와 몽규가 대구를 이루며 교차된다. 혁명가와 시인은 같은 자리에서 괴로움을 느끼지만 다른 선택을 내린다.



시의 울림


몽규는 동주가 시를 쓰기를 바랐다. 시인으로 남기를 바랐다. 자신처럼 총을 들고 앞장서는 혁명가가 있다면 동주와 같은 시인도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동주>는 두 인물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얕은 수준에서 비교와 대조를 이용해 극을 채운다. 그럼에도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미흡한 부분을 윤동주 시 본연의 힘이 메꿔주기 때문이다.  


감독은 또 한 번 영화로 한국 역사의 일부를 깨운다. 일제 강점기 개인으로서, 국민으로서 가졌던 고뇌를 시로 풀어낸 시인의 ‘부끄러움’에 구체성을 제시한다. 시인은 이미 심문받거나 고문받기 전부터 괴로웠다. 그의 시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의 언어였고, 부끄럽지 않게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시인은 부끄러웠기에 계속 시를 썼다.


내면의 깊은 진실이 드러날 때 힘이 생기고, 개개인의 깊은 내면의 변화가 모여 세상을 바꿔나간다. 무의미한 명분을 위한 서명을 앞에 두고 몽규는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쓰러워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괴로워서 “ 서명을 한다. 동주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 서명을 하지 못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마음이 나에게도 드리운다. 윤동주 시인의 주석과도 같은 이 영화는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노스탤지아>(198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