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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Nov 26. 2023

우리가 분노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때

독일의 공동체에서 만난 사랑하는 여자친구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셋은 모두 똑똑하고,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알아가고자 하는 영혼들이었다. 둘 다 참 조용조용한 사람들이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점차 어울리면서 우린 아이처럼 뛰어놀기도 하고, 쉽게 나누기 힘든 깊은 이야기도 털어놓곤 했었다. 두 친구를 만난 것만으로 내 여행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


그러나 헤어진 후에는 서로를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나 반짝였어도, 여행지의 인연이란 거진 좋은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몇 달 만에 연락이 와서 화상통화를 한번 하자고 했다. 그 제안이 정말 마음 깊이 기뻤다! 친구들을 만나기 몇 시간 전, 뜨는 시간에 책을 읽고 싶어서 내 책장을 돌아봤다. 그때 우연히 집어 든 책이 릴리 댄시거의 “불태워라-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였다. 그건 어떤 직감이었는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 차츰 ‘분노’가 우리를 특별한 유대로 이끌었던 중요한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셋 모두 아시아계 여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독일 땅에서 각자 차별을 겪어내는 와중이었다. 그 뜻은, 수시로 화날 일이 있었다는 것과 같았다. 나는 셋 중에 유일하게 외국인이라 영어로만 소통할 수 있었는데, 분명 외국인 게스트가 있을 때 늘 영어로 이야기하거나 적어도 통역을 해줘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영어를 게을리하곤 했다. 독일어로 의논하니 내 의견은 자꾸 의사결정에서 빠져버렸고,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몰라서 자꾸 불이익을 받았다. 내 친구들은 매번 통역을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통 나서지를 않아 점점 지쳐갔다. 우리는 참 많은 것들에 화가 났다.


그래도 셋이 함께 있으면 참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혹은 화를 내면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말들을 되도록 하지 않았다. 그저 듣고, 함께 화내고, 무언가 바꿔보려고 함께 머리를 싸맸다. 사실은 제 일도 아닌 일에 둘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날 지지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커뮤니티 사람들에게 차별에 대해 직접 이야기할 수 있었고, 백인 친구들은 사과하고 바뀌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작은 변화의 불씨를 함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분노로 가득한 늑대의 입술을 빨았다. 그리고 그 분노를 어떠한 빛도, 식량도, 자매도, 잘 곳도 없는 장소들에 빛과 웃음과 보호와 불기를 가져가는 데 썼다.”,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내 가슴에 화살처럼 박힌 한 장면이 떠오른다. 친구 중 하나가 괴로워하고 있는 내게 대뜸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는 독일에서 나고 자라며 이 정도의 차별은 숨 쉬듯 겪어서 이런 일이 차별이라는 사실조차 잊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화내는 걸 보고 있으니, 자기가 그동안 조용히 겪어낸 사건이 목소리를 갖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잠깐 경험하는 고통 덕분에 그녀를 더 이해할 수 있어서, 한편으론 감사하기도 했다. 친구는 내 대답을 듣고 아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울고 있었지만, 활활 타오르는 눈에서 모든 걸 녹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친구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너처럼 아름다운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하네. 너는 분명,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야.”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동시에 나의 삶에 중요한 좌표가 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우리의 분노는 서로를 살게 했다.


줌에서 만나 이런 내 생각을 친구들에게 나누었고, 자연스레 우리가 최근에 느낀 분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는 또 불안과 두려움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의 시간을 보내서 무료 줌 미팅이 계속 꺼지기 일쑤였지만, 우리는 더없이 깊게 연결되었다. 함께 만든 시공간에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없었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도 한없이 모자랐다. 그렇게 자유로이 여행하던 감정들이 차츰 내려앉을 때,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함께 나눈 것들을 음미했다. 그러고 나니 한없이 말랑말랑하고 따듯해져 있어서, 예쁜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이거 나에게 새로운 일이네. 끝내고 싶지 않은 줌 미팅이 있다는 거."

"그래도 누군가는 먼저 방에서 나가야 해! 누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낼 거야?"


그 뒤로도 한참 사랑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다가, 또 각자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던 불기의 따듯함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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