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아 Nov 29. 2023

망한 사랑얘기 중엔 제일 달달할걸?

커뮤니티에서 일과를 반쯤 보내고 준은 ‘여기 좀 꽉 막히고 재미없네?’라고 말하며 싱긋 웃었다. 너 같은 사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하루가 지루하게 흘러갈 법하면 그는 불쑥 이상한 행동을 했고 나는 숨길 수 없이 기뻤다.


준은 직접 가져온 샐러리를 갈아서 주스를 만들겠다며 나와 친구들을 꽤나 귀찮게 굴었다. 자기가 최근에 어떤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샐러리 주스를 매일 마시는 걸 종교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어디에서도 갈아주지 않아서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샐러리를 휘두르다가, 나중에는 샐러리교를 같이 차리자는 농담을 했다. 샐러리교에서는 찬송 시간에 누워도 되고 알몸 수영을 해도 된다고요! 우린 커뮤니티에 대한 불만을 농담 삼아 킥킥 웃었다.


준은 내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조잘조잘 말이 많은 준과 엘리를 붙여놓고, 언니와 나는 편하게 한국말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같이 제법 떨어진 목장에 걸어가 농부가 직접 만든 치즈와 와인을 사 왔다. 술은 커뮤니티에 들일 수 없으니 가는 길에 홀짝거리며 넷이 신나게 너른 벌판을 뛰어다녔다. 분명히 밋밋한 곳이었는데, 이곳이 어느새 이렇게나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다만 준이 다 같이 어울리는 것에 너무 심취해서 나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만 조금 불만스러웠다. 나는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져서 둘이 남았을 때 이야길 꺼내보았다.


”준, 나는 너랑 단둘이서도 시간을 좀 보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랬어? 그러면 앞으로 둘이 더 시간 보내자.“


틀린 답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너무 건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만으로는 내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준, 너는 우리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 이렇게까지 우리의 관계를 바꿔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음…. 사실 네가 친구로서 참 좋고, 성적으로도 끌려. 그런데 네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아.“


아!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충격이었다. 도무지 그와 마주할 수 없어 좀 피했더니, 준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너의 말이 괜찮지 않았다고 했고, 그는 얘기를 제대로 하자며 정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호수가 있는 작은 숲과 같은 정원이라 조금만 깊이 걸어가면 누구도 없는 조용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잔디밭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가 나를 연애 상대로 느끼지 않는다는 걸 좀 소화하는 중이야.”

“정말 미안해. 그럴 수 있어.”

”너무 슬퍼. 그리고 전에 말했던 것 말이야. 남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던 거. 그 마음도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아.“


나는 두서없이 나오는 말들을 뱉어냈다. 준과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왜인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자꾸 올라왔다. 말하자면, 두려웠다.


나와 연인이 할법한 모든 걸 같이 하면서도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니. 아마도 내게 어딘가 하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웃고 상처를 보듬고 맨몸을 겹쳐도 네가 날 사랑할 수 없는 거겠지?


아빠가 그랬듯이 남자들은 나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낡은 이야기가 다시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도, 실망하는 건 참 아픈 일이다. 생각이 나를 할퀴어서 오래된 고통이 줄줄 새어 나왔다. 너무 울어서 종종 숨이 모자라는 공황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내가 한참을 서럽게 울어대는 동안 준은 나를 계속 바라보면서, 쭈그려 앉은 내 발목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 발로 땅을 디디라는 듯 살짝 아래로 눌러줬다. 그 덕에, 숨 막히게 괴로운 와중에도, 내게는 바닥이 받쳐주고 있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놀라지 않고, 애쓰지 않고, 온화하게 곁을 내어주었다. 돌아보면 그는 언제든 그랬다. 본인이 나를 슬프게 하는 와중에도, 가장 섬세하게 나를 달래주고 있었다.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이게 사랑 같은데. 내가 좀 진정을 하니, 그도 조금씩 말을 꺼냈다. 


“사실 나도 사랑이 어려워. 가끔 난 스스로가 너무 독립적인 게 화날 때가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난 독립심이 너무 강해서 깊은 관계를 맺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누구를 들이는 게 내 삶에 위협처럼 느껴져. 그래서 나의 그런 마음이 화가 나.”

”그렇구나….“

“응. 한 2년간은 연애는커녕 사람도 잘 못 만났었어. 완전히 동굴 속에서 살았는데, 이제야 조금씩 나오고 있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게 어려운 것 같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 있어.”


그래서 내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거냐는 물음을 삼키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내겐 참 단단하고 따스해 보이는 준에게도 어떤 결핍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상담을 받고, 내면을 돌아보는 워크숍을 듣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여정을 보내고 있었다.


준은 언젠가는 자기도 누군가를 낫게 하는 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매번 적절한 위로를 해줄 수 있었구나 싶었다. 한없이 아끼는 사람이기에, 준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냈더니, 바뀐 건 없어도 마음이 무척 가벼워졌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름다운 순간에 쪽팔리게 엄청나게 큰 콧물이 맺혀있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더러운데 왜 빨리 말하지 않았냐고 그를 발로 찼다.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뭐가 그렇게 더럽냐고 했다. 네가 알맞은 말만 하는 게 오늘은 어찌나 얄미운지. 아무래도 나는 아직 그를 좋아한다. 한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