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엄마가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듣기 좋은 말이나 끊임없이 지지하는 말을 해주는 식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걸 평소에 잘 봐두었다가 그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편안하게 배려받는 느낌을 받게 해 주는 식이었다.'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조너
잠시 본가에 왔다. 짧은 여행을 가기 하루 전날 밤, 짐을 싸는데 이미 온갖 파우치가 밖에 나와 있었다. 내가 부스럭거리자, 엄마가 일어나서 여행 갈 때 쓰라고 꺼내 두었다고 일러줬다. 이 파우치는 조금 크고 이거는 작다는 둥 이런저런 참견도 잊지 않았다. 문득 수영복을 넣을 가방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뒤적거리다 보니 내가 딱 생각했던 비닐 가방이 파우치 더미에 있었다.
또 해변가에서 쓰라며 예쁜 돗자리를 내게 안겨주었다. 허투루 물건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마 일터에서 받았던 것 같다. 엄마는 공짜 물건이 생기면 일단 나 줄 생각을 한다. 또 아침으로 당근사과주스를 꼭 먹고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내가 인공 감미료의 맛에 질색한다는 걸 기억하고, 부러 천연과즙만 넣었다는 주스를 샀나 보다. 꼭 기억할 것 한 두 개는 잊고 훌쩍 집을 떠나는 딸 때문에, 엄마는 그 얘기를 하고 또 했다. 자꾸 잔소리를 하니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막상 엄마가 권하는 것들은 다 맘에 들었다. 주스도 맛있었고, 돗자리도 요긴히 썼다.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에는 에어컨을 꼭 꺼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고 갔다. 엄마가 먼저 출근해서 텅 빈 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수십번 말하고도 모자랐는지 현관문에 대문짝만하게 ‘에어컨 끄고 갈 것!’을 써 붙인 것이다. 쪽지는 엄청 커다랗고 촌스러웠다. 미관을 한껏 해치는 그 사랑 넘치는 쪽지에 웃음이 터졌다. 나도 고작 몇 시간 더 있다 나갈 건데, 절대 엄마가 먼저 끄고 가지 않는다.
나는 참으로 엄마의 사랑을 갈망하던 아이였다. 내가 확신할 수 있도록 정확히 말해주고, 깊게 눈을 맞추고, 꼭 안아주길 바랐다. 기대에 비해 살가운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는 엄마가 너무너무 미웠다. 마음이 힘들다고 토로할 때마다 엄마의 어색하고 냉담한 반응에 매번 날카롭게 찔렸다. 그 문제가 극적으로 나아진 건 아니다. 그저 엄청 싸웠고, 그래서 서로 티끌만큼 발전했고 많이 포기했다. 그래도 후련하게 포기하고 나니 보이지 않던 사랑이 눈에 들어온다. 에어컨을 끄는 대신 지치지도 않고 잔소리하고 메모를 붙이는 수고를 자처하는 일. 새 물건이 생기면 당연하게 나를 떠올리는 일. 나의 예민하고 복잡한 취향을 차곡차곡 기억하는 일. 엄마는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톺아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