힝 고지혈증
이제 나는 에스프레소를 먹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크레마인가.
커피를 좋아해 즐겨마시게 된 게 8,9년이 되어간다. 취업을 한 이듬해 정도까지는 믹스커피, 그중에서도 맥심 골드믹스 하나로 하루의 카페인을 충당하던 나였는데, 누나가 경품으로 받아온 커피메이커에서 시작해, 드립커피와 전자동커피머신, 그리고 로스팅을 해 싱글오리진과 블렌딩을 즐기게 된 수준까지, 남부럽지 않은 커피덕후로 살아온 나였다.
그러나 이제 커피행각에 강력한 제동이 걸렸다. 41살, 생애 첫 건강검진에서 고지혈증이라고 한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범위의 180%를 넘어갔다. 운동을 하지 못한지 3년이 되어가고,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몸이 살살 맛이 가고 있는 것은 알고 잇었지만 고지혈증이라니. 내가 고지혈증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며, 억울해했지만, 또 동갑내기들의 각자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니, 나이를 먹는 자연스러운 과정인듯 싶기도 하다. 그냥, 41살이라는 나이에 겪게 되는 작은 관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마침 운동도 조금 시작했는데, 3개월동안은 열심히 약을 먹으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도록 건강관리를 해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뜻밖에도, 에스프레소 금지령이 떨어졌다. 저 풍성한 크레마 탓이다.
나는 원래 강배전 되어 캐러멜향이 살짝 나는 플로럴한 원두를 좋아한다. 수프리모 한 종과 에티오피아 원두 두 종 정도를 합치면 내가 바라는 맛에 근접하다. 집에선 주로 그렇게 볶은 아이들을 블렌딩해서 먹는다. 전자동 커피머신을 쓰는 것도 드립커피보단 에스프레소를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 강배전된 캐러멜 맛은 드립커피로는 잘 살지 않는다. 내 커피 취향은 에스프레소로, 크레마를 쫙 뽑아냈을 때 살아나는 맛인데, 문제는, 그 에스프레소의 크레마가, 콜레스테롤을 훅훅 올린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일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깨 켜본 유튜브에, 뜬금없이 알고리즘으로 뜬 약사님의 채널을 보고 알았다.
세상 마상. 내가, 에스프레소를 먹으면 안되는 팔자가 되다니. 드립커피, 더치커피나 먹어야 하다니. 세상에나! 내가!
중격을 받아서 요 며칠간은 커피를 통 먹지 않았다. 같은 교무실 선생님들에게 내려드리지도 못했다 원두가 떨어진 탓에. 그- 에스프레소의 크레마 문제는 드립커피로, 종이필터를 써서 추출하면 해결된다고 한다. 물론 나는 아무 커피나 잘 먹는 막입이기 때문에 못먹을 건 아니지만, 또, 직장에서 대량으로 추출할 땐 에스프레소보단 드립이 편해서 그렇게도 자주 먹지만, 에스프레소가 선택지에서 제외되다니. 그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야.
그래서 안하던 짓까지 하게 되는데 나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 이외에 미국에서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을 충동구매를 해버렸고...아내에게 걸렸다. 당장 취소하고 병원 가서 제대로 진료받고 처방받으란 말에 깨갱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에스프레소. 아아! 에스프레소!
사실 에스프레소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인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로 먹으면 안되는 음식에 끼어있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체중은 6,7년째 거의 그대로고, 3년쯤 전까진 그래도 운동도 꾸준히 해왔는데 말이다. 그러나 당연히, 30대 초반의 집중력은 아니었다. 반성하자. 반성하고!
오늘은 철야로 글을 쓰는 날이다. 커피를 끊은지 일주일 간, 나는 거의 밤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깨꼬닥 잠에 들었다. 오늘은, 근 일주일만에 집에서 밤에 커피를 뽑았다. 그러나 진하게 뽑혀나온 저 크레마는 아숩게도 숟가락으로 모두 건져내야 했다. 하는 김에 종이 필터도 주문했다. 이제 집에서는...에스프레소를 필터로 한번 걸러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90% 이상의 커피 지방 성분은 걸러진다고 한다.
이제, 커피로 버틴 몇시간이 지나간다. 잠을 자야겠다. 그리고 내일 아침도, 부족한 잠을 때우기 위해서 일어나 커피 한잔을 또 뽑아야겠다. 필터가 오기 전까지는 또 숟가락으로 걸러내야겠지.
오늘도, 핏속의 콜레스테롤들이 내 심장을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