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우리가 쓰는 돈이 물건의 값은 아니라지만,
가치가 아닌 욕망을 먹는 일이 상식이 된 오늘날에 어떤 물건의 값을 따지는 것은 모양 빠지는 일이지 싶다. 빵을 먹지 않는다. 빵을 먹기 위해 베이커리 카페에 가지 않는다. 입으로 들어가는 빵이 아닌 공감, 혹은 교양이다. 금액은, 소비하는 대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을 지출하는 나의 값이다. 비싼 옷을 사는 나. 비싼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는 나. 우리의 가치는 나 자신에 대한 다양한 가치투자로 결정된다. 돈이라는 한가지 기준에 매달려 나를 그리고 타인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의 문제는, 아끼는 것에 대한 획일적 시선에도 마찬가지로 자리한다.
알면서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도 세상엔 존재한다. 소금빵. 밥으로 따지면 흰쌀밥에 가까운, 버터롤이라는 솔직담백한 빵에 소금을 더한. 이제 퍼질대로 퍼져, 소금빵을 취급하지 않는 베이커리카페가 드물 정도다. 개중에서도 버터와 밀가루와 효모에 소금, 그리고 계란으로, 반죽 넉넉히 만들어두고 넓은 트레이에 가득 담아올릴 수 있는 이 소금빵은, 값으로 먹지 않는다. 바삭함으로 먹는다. 가치로 먹지 않는다. 혀로 먹는다. 나를 둘러싼 수십가지 다양한 가치를 가진 물건들, 개념들 사이에, 소금빵은 오롯이 나와 남는다. 단 둘만의 시간, 둘만의 대화다.
하여 소금빵을 먹을 땐, 다른 불필요한 것은 없었으면 좋겠다. 가격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일. 혹은 비싼 소금빵을 보며 뿌듯해하는 일. 그 소금빵의 값을 올리기 위해 요상한 재주를 부리는 일들. 소금빵은 소금빵이다. 버터가 가득 든 쫄깃한 빵이 입안에서 소금 조각을 터트리는 그 맛에, 카페의 분위기며 창밖의 하늘이며 둘러싼 사람들의 치장들 따위가, 필요한 일일까. 그 어떤 카페도 빨대며 냅킨이며 냉수 정도는, 마음껏 퍼가라며 널어놓는 판에, 가장 단촐하고 소박한 맛이 어울리는 소금빵에, 너도 나도 값에 대한 생각 정도는, 조금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
소금빵 지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1소금빵이 2천원이든, 2천5백원이든. 소금빵 지수라는 것이 있으면 우선 소금빵으로 이상한 짓을 안한다. 그 위에 명란마요를 올리는 일 따위는 없다는 일이다. 가장 기초적인 소금빵의 형태를 하나 골라, 그것을 1로 정해두면, 개개의 베이커리카페들의, 빵들 그리고 소금빵들은, 2소금빵, 3소금빵 등의 지수로 평가받을 것이다. 어이쿠, 여기는 3소금빵이나 되네. 그것치곤 버터를 아꼈는걸? 이런 평가도, 하게 될 테다.
넓은 매대에, 우리의 영혼을 위한 소금빵 하나쯤 올라가 있어도 다른 빵들의 가격을 깎아내리진 않을 것이다. 나의 가치를 매기는 시간에, 그렇게 꾸려진 테이블 위에, 소박한 소금빵 하나 정도 올라와 있어도 그것이 나의 품격을 훼손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미각으로, 미감으로 나의 가치를 더하고 싶다. 모든 것을 비우고 오롯이 식사에 집중하고 난 뒤에 교양과 공감을 채우고 싶다. 소금빵은, 그런 각별함이다.
소금빵 지수가 생겨서, 본래의 맛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우리가 식사를 하는 목적 중 하나가 완벽히 충족될 수 있다면, 우리는 식사의 나머지 가치로운 것들- 교양과 공감, 휴식과 충족을, 더욱 완벽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가치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2소금빵 3소금빵 정도의 빵들은, 보다 알뜰살뜰히 우리의 가치를 꾸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소금빵 지수가 생겼으면 좋겠다. 나에게 값을 매기는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가장 완벽한 소금빵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