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단편 : 8월의 고드름

Based on a true story.

by 공존

그 해 나는 보았네. 눈 없이 맺힌 여름의 고드름을


그 남자의 이름은 골드였다. 이국적인 훤칠한 외모에 유쾌한 성격, 그러면서도 독특한 취향과 기이한 개성이 뒤섞인. 키는 보통보다 한뼘은 컸고 눈은 보통보다 위 아래로 콩 한알 크기만큼씩은 더 열려있는, 어느곳에서나 도드라지는 사내. 사람들은 호기심과 약간의 경계심을 담아 그를 골드라 불렀다. 그 이름 때문이었을까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는 쉬 여겨지지 않았다.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까. 그는 나와 다른 언어양식을 지니고 있었고, 나와는 다른 대화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 중 그 누가 당혹감과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느꼈던 이질감은 그의 모든 외양과 그 내면을 비추는 방식에 곁들여져 있었다. 누구는 그를 잡종이라 불렀다. 누구는 그를 외계인이라 불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만남이 시작될 무렵, 이미 흉흉히 퍼져있던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던 이들은 그와의 몇분동안의 대화를 도망치듯 끝마치고는 "잡종 자식!" "외계인이라더니 진짜로구만! 소름이 돋네!" 같은 말들을 뱉어내곤 했던 것이다. 어느 늦은 밤, 야간자습을 마치고 하교하는 날 그가 괴성을 길게 지르며 달려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그 괴성을 무엇이라 분간할지...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마주본 얼굴과 나, 당혹감이 거울을 보는듯했다.


그러나 그를 무엇이라 생각하든지...그는 우리 안에 있었다. 우리와 같은 교실 안에, 같은 공기를 마시고 뿜어내며. 우리와 때론 웃음을 나누고 때론 우리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기울이면서. 그의 큰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며 짓는 미소 안에는 얼마나 깊은 사악과, 음모가 깃들어있었을까. 마치 해질녘의 어스름이 땅을 덮쳐오듯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길들여지며, 천천히 그의 손아귀를 뻗쳐온 것이었다. …마침내 내게도 말이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었다. 에어컨이 흔하지 않던 시절, 찜통같은 교실 안에는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열기와 증기를 함께 뿜어내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나약하고 소심한 학생이었던 그 당시의 나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에 힘겹게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즈음 처음 도입되기 시작한 수시 전형에 응시할 요량으로 일본어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어라도 해야 하는 나이였고, 무어라도 해야 하는 계절이었으나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 그 질척이는 아스팔트 위에 내 몸과 마음은 하염없이 녹아내리곤 했다.


"너 일본어 능력시험 본다며?"

"어? 어…어."

"나도 일본어 공부하는데. XX대학교에서 다음달에 대회 있는 거 알아?"

"뭐라고?"


더위와 암기의 고통으로 책상 위에 거의 꺾어져내려와 있던 내 머리위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떨어져 내려온 것은 여름방학 첫날, 낡은 벽걸이 선풍기가 왱왱 소리를 내며 진을 빼던 오후의 교실이었다. 자습을 하려는 학생들이 드문드문 등교해 공부하고 있었으나, 점심밥을 먹고 우르르 농구를 하러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얇은 고음의 목소리. 골드의 것임을 듣는 즉시 알 수 있었다. 나는 갑자기 고개를 드느라 흐트러져버린 안경을 고쳐쓰며 겨우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이 끓어오르는 날씨에도 조금도 더운 기색이 없었다.


"대회 갈거야?"

"…가야하나…."


목이 막힌듯 목소리가 얼른 트여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만들어내는 모든 공기가 나를 누르는듯했다. 그 커다란 키와 방울같은 눈. 책상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에 비하면 나는 바닥에 붙어 오그라드는듯했다.


"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XX대학교 대회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거리에, 아직 일본어 실력도 썩 좋지 않아 접어두고 있던 참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이 순간. 텅빈 교실과, 쉭쉭 아프게 돌아가는 선풍기의 소음과, 나를 휩싸고 도는 이 더위. 모든 것이 나의 목을 조여오는듯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 오늘 이 시간이 골드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질 나의 운명이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웃으며 교실을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그로부터 일본어 대회가 치러지는 날까지 20여일간, 나는 숨죽여 살았다. 골드와의 만남 이틀 뒤, 교실에 있던 날 발견한 담임선생님은 '너 일본어 대회 갈 거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그 주의 토요일에는, 당직이시던 일본어 선생님이 교실에 있는 나를 교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일본어 문제집을 여러권 주었다. 이것을 행운이라 해야 할까? 마치 거인이 내 주위에 체스 말들을 둘러싸고 있는듯했다. 그의 존재가 의심될 때 나는 교실을 살폈다. 교실의 적막 속 가장 깊은 어둠 속에 그가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조차 발걸음이 무거워지는지 하루하루가 끝없이 길었다. 그럴수록 더위와 골드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점점 심해져갔다.


일본어 대회는 싱거웠다. 대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준의 암기력 시험이었다. 그것이 당시의 성적에 대한 관념이었겠지만 일요일 하루를 모두 써버린 댓가 치고는 너무나 저질이었다. 고작 이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골드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난 헤엄쳐온 것인가. 왜 골드는 날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일까. 터덜터덜 XX대학교의 캠퍼스가 올라앉은 산 중턱의 도로를 홀로 내려오며 나는 허탈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날씨는 여전히 지독히도 더웠다. 신발 밑창이 땅바닥에 달라붙는듯했다. 우르르 몰려든 다른 학생들이 대학에서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가득 채워 그 안의 열기에 질린 나는 혼자 산 길을 걸어내려가는 편을 택했다.


'어디갔을까.'


골드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와, XX시 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탈 때에도, 시험장에 들어가 문제를 풀 때도 골드의 모습은 눈에 비치지 않았다. 오지 않았을리는 없었다. 따로 대회 참가금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만 이 먼 곳에 보내서 무얼 한단 말인가. 아니,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구는 외계인이라고 하는 그는. 누구는 괴물이라고 하는. 그가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누구라도 알고 싶어하진 않을 테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것을 쫓고자,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느껴지는 인간적 체취가 없다는 것 뿐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듯한 인간.


콰과과콱 빠앙-


굉음소리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는 대형 트럭이 위태로운듯 경적을 거듭 울려대며 날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온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굉음, 굉음, 마치 장벽이 쏟아져내려오듯 가까워지는 거대한 트럭의 형상. 거듭 경적을 울리던 트럭은 비상등과 상향등을 동시에 점멸시키듯 쏘아대며 날 위협했다. 나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빠아아앙-------


트럭은 날 스치고 사납게 언덕을 내려갔다. 손바닥에서 타는듯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 살펴보니 트럭을 피해 몸을 굴린 나는 아직 도로 위에 있었다. 내가 도로 한가운데 서 있기라도 했던 것인가. 트럭이 지나간 길을 한참 살펴보았다. 사실 그대로였다. 트럭은 날 피해서도 찻길을 따라 그대로 미끄러져내려갔고, 언덕 위쪽으로 난 타이어자국은 정확히 오른편 도로 한가운데로 나 있었다.


"괜찮아?"


심장이 멎는듯했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상황. 이 익숙한 더위. 더위. 더위. 골드는 어느새 큰 덩치를 꼿꼿이 세우고 날 내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엔 더위의 흔적이라고는 비춰지지 않았다. 큰 눈에 주름을 가득 지우며 생글생글 웃으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 다시 경적소리. 언덕 위에서는 또 승합차가 연달아 내려오고 있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는 골드가 드리운 그림자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졌다. 나는 모멸감과 두려움, 황망함,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 속에 쳐박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승합차는 매끄럽게 우리를 스쳐지나가면서도, 짜증스럽다는듯 경적을 거듭 울려댔다.


"조심해야지."


예의 생글거리는 미소, 공기 중에 흩어지듯 가벼운 고음의 목소리. 느껴지지 않는 인간의 체취. 나는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골드는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일까. 트럭 앞으로 홀리듯 내밀어진 나는, 그리로 날 이끈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무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기척이 겨우 보이는 거리까지 그가 떨어졌을 때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XX시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온 몸이 땀에 절여진 뒤였다. 뙤약볕 아래를 한시간여나 걸었다. 가난이 몸에 베인 탓에 익숙한 일이었지만, 아까 트럭을 피하느라 넘어져 찢어진 손바닥은 씻을 곳을 찾지 못해 흙먹지와 피가 꽤 적당한 모양새로 범벅이 된 채였다.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와 목, 손과 팔까지 거의 온몸을 씻을 기세로 찬물을 부어대고 나서 거울을 보니 안경 속 움푹 파인 두 눈에 핏기가 가득했다. 나는 한참이나 거울을 마주보았다. 서울로 가는 버스는 아직 40분이나 남아있었다. 삼 주 전, 골드가 처음 내게 말을 건 날을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이 건냈던 말, 일본어 선생님이 건냈던 책, 하루하루의 일과. 그는 언제 나에게 그물덫을 놓았단 말인가. 숨 막히는 고등학교의 일상 속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질문을 던져도 거울 속의 내 얼굴 속에는 혼란함이 더해질 뿐이었다. 나는 발을 떼어 화장실을 나왔다. 터미널의 플랫폼은 두꺼운 시멘트 벽과 기둥이 햇빛을 가려 어두컴컴했다. 뒤늦게 걸어온 탓에 터미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리문과 창문 밖은 여전히 작열하는 태양. 터덜터덜 홀 안을 거닐던 내 귀에, 갑자기 커다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터미널 한쪽 벽에 난 문 위에는 XX오락실이라는 낡은 간판이 보였다. 소리가 난 곳은 그곳이었다. 아직 버스가 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오락실 문 안으로 발을 딛은 내 눈에 보인 것은 골드였다. 좁은 오락실 한 가운데, 당시 유행하던 댄스게임기가 있었고 음악은 빠르게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발판 위를 골드는 빠른 몸놀림으로 누비며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땅바닥에 못이라도 박아놓은 듯 그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락 보컬의 그로울링 보컬과 속사포같은 신디사이저, 배경 영상의 싸이키델릭함에 파묻혀 쏟아져 나오는 음표의 공세는 혼을 쏙 빼는 화려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골드의 춤사위. 그것은 마력같았다. 어두운 오락실, 그 속에서 가장 빛나는 댄스게임기의 발판을 화려하게 수놓는 그의 몸놀림. 길 팔과 다리는 매끈하면서 유려했고, 흰 나시티 위에 햇빛을 가리기 위해 걸친듯한 얇은 셔츠무늬 티셔츠는 그의 몸의 반동을 따라 너울이다 펄럭였다. 골드는 허리를 꺾기도 하고 휘기도 하며 화면 위의 음표들을 놓치지 않았다. 드럼의 비트가 가슴을 쾅쾅 두들기는 가운데 그가 크게 뛰어올랐다. 쾅! 하며 첫 곡이 끝났다. 골드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왔어?"


땀이 보였다. 거친 골드의 호흡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보고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듯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더운 기색을 보인 적이 없는, 마치...인간이 아닌듯 느껴졌던 그의 몸이 나와 같은 이 여름의 열기에 빠져든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와 같은 열기를 느끼고 있다. 나는 경악했다. 그러나 나의 혼란은 짧은 여유를 끝마치고 다음 곡이 시작되면서 다시 음악 속에 빨려들어갔다. 이번엔 여자 보컬의 EDM 곡이었다. 주문을 외우는듯한 코러스음, 흑백이 명멸하며 교차하는 배경화면, 비트를 넘나드는 연주음 그 모든 것에 골드의 몸놀림이 합일되었다. 그는 뛰어오르며, 팔과 다리를 쭉 뻗으며, 발판과 발판 사이를 날아오르듯 움직였다.


"후!"

"효우!"


못박혀 있는 채 눈을 떼지 못하는 나. 화면이 쏘아내는 광채를 온몸으로 받으며 땀과 열기를 쏘아내는 골드. 그의 몸놀림이 내 눈을 가득 채우며 점차 내 몸도 마음도 상기되어갔다. 마침내, 나는 그와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가 뛰어 오를 때, 팔과 다리를 뻣을 때, 발판을 넘나들을 때, 그의 모든 행동과 동작에 내가 흡수되어갔다. 아니, 나는 골드가 되어갔다. 그가 나였고 내가 그였다. 나는 손바닥의 고통도 잊고, 찌는듯한 더위도 있고 정신없이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그와 함께 춤을 췄다.


"효우!"

"호우!"


골드와 나, 둘의 탄성이 정확히 일치했다. 두번째 곡이 끝났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당당하게 발판 뒤에 멈춰선 그의 몸에선 열기가 뿜어져나오는듯했다. 나는 그 뒤에, 역시 같은 동작으로 서서, 그를 경외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늘 보여주는 그, 생글거리면서도 인간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 밝은 미소를 가득 띄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는 마지막 곡을 선택했다. 나는 온 몸에서 땀을 가득 흘리며 초조하게 음악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세번째 곡은 더욱 신비로운 곡이었다. 영어일까? 아니야 어디 나라 말일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었다. 나는 골드의 춤사위에 마음이 빼앗겨 그를 따라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화면과 음악에 눈과 귀를 온통 집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화면 속에 비추어지는 형상들. 내 귀를 쟁쟁하게 울리는 이 음악. 그리고 골드의 몸놀림. 뜨거워지는 몸의 움직임과 맥박과 다르게 내 심장은 싸늘히 식어갔다. 그것은…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했다. 화면 속을 채우는 검은 안개와 같은 형상들. 핏빛 파도 위로 스쳐가는 손목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아니 본능과는 다르게 내 몸은 골드에게 완전히 속박되어 있어서,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라할 수 밖에 없엇다.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 속에는, 형상을 알 수 없는 눈길이 날 쏘아보고 있었다.


"효우!"


또 다시 터져나온 골드의 괴성. 빨라지는 음악들, 빨라지는 몸놀림. 내 온몸의 혈관이 끓어오르는듯했다. 본능적 공포와 골드의 마력의 팽팽한 긴장이 내 몸 전체, 구석구석에서 충돌하는듯했다.


"효우!"


그가 다시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나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음악은 점점 빨라지고, 골드의 붉어진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이 그의 몸의 진동에 따라 마구 튀었다. 음악이 점점 빨라진다. 그의 몸눌림도, 나의 몸동작도 점점 빨라진다. 코피가 터져나온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었다.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뛰어오른다. 안경이 튕겨져나갔다. 도망치고 싶다. 도망쳐야 한다. 고통 공포 충동 격동. 내 인식의 모든 벽채가 무너져내리는 초월의 공간 속에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 빠져내려갔다. 음악은 점점 더 빨라져서, 그의 발놀림도 몸놀림도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치달았다. 나는 탈진해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눈은 골드를 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저주의 끝에서 나는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가.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했다. 확인해야 했다.그것이 나의 처참한 죽음이든, 지옥의 불구덩이든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효우!"


음악이 끝났다. 절정 속에서 모든 춤을 마친 골드는 입고 있던, 땀에 흠뻑 젖은 셔츠를 높이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의 손은 셔츠를 벗어던진 그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쭉 뻗은 당당한 자세 그래도 프리즈 되어 있었다. 생글거리는 그의 눈을 나는 보았다. 평소와 같은 싱글거리는 웃음과, 큰 방울같은 눈을 나는 보았다. 이채롭게 땀이 가득 흐르는 이마와 뺨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을. 그러나, 그것을 보았을 때. 나의 눈은 공포에서 경악, 혼란스러움에서 혼돈으로 변했다. 나의 머리속을 완전히 불태우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골드라는 남자가 나에게 건 저주, 이 날카로운 쇠줄이 피부를 찌르는 그물덫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나의 눈과 내가 본 광경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내 눈길이 닿은 곳, 그곳은, 나시티로 인해 완전히 드러난 그의 겨드랑이. 그리고 겨드랑이를 가득 메운 그의 겨털. 그리고, 그 수북한 겨털 하나하나에 달린 노란, 지금도 믿을 수 없는 굵기와 길이의,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그의 겨털에 달린 고드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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