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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09. 2020

배제와 차별은 바깥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집단의 광기는 양심적인 내부자들에게 보다 치명적이고 지독하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생이 입학 포기 의사를 밝힌 다음 날 아침, 나는 존경하는 선생님 몇분이 해당 여성의 포스팅을 공유하며 남긴 가슴아픈 글들을 읽게 되었다. 먼저 그 선생님들의 경우엔 교육자로서 수십년을 실천과 학습의 시간으로 보내신 분들이다. 여성으로서나 교사로서나 존경할만한 점을 두루 갖춘 분들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글을 읽고, 또한 입학 포기를 택하게 된 당사자의 입장을 읽으며 나는 숙명여대 일부 집단의 광기의 희생양인 또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일말의 연민을 갖게 되었다.


- 저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숙명여대 내부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성전환 여성의 입학에 동의하고, 기꺼이 집단의 자리를 내어줄 의사가 있으며, 그의 벗이 되어줄 수 있었고 졸업을 포기한 지금에도 지속적이고 악의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과격한 폭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어느 곳에나 양심적인 사람이 있다. 미 기병대가 인디언을 학살할 때도,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살할 때도,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하던 르완다에서도, 그리고 중국정부가 신종코로나 정보를 은폐하며 사태를 키우고 있는 지금도 인간의 측은지심과 같은 본성의 작용에 의하여 자기의 사적 이익보다는 눈 앞에서 부당한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 기묘하게도 인간집단에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역사는 그런 이들에 의해 진전을 이루어 왔다.”


 지금 성전환 여성이 당하는 폭력에 대하여 그 당사자를 제외하고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바로 숙명여대 안의 그러한 양심적 소수자들일 것이다. 집단의 폭력은 늘 외부로만 향하지 않는다. 배제와 차별은 내부의 불순물들에게도 언제나 오픈되어 있다. 더욱이, 양심적 내부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을 떠나는 것이 외부자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기에, 집단의 배제와 차별에 훨씬 더 큰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너무나 커뮤니케이션이 넘치는 곳이 되어 있다. 소수자들은 인터넷만 켜도 자기 학교의 이름과 폭력의 기억을 만나게 된다. 카톡창을 열 때마다 수십명이 새삼스런 안부와 동시에 소식을 보내고, 꽤 많은 사람들이 실언을 하는 것을 견딜 수 밖에 없다. 에타라는 사이트에서는 평화롭게 강의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된다.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고, 승리자들의 노래는 집단의 광기에 비례해 길게 울려퍼진다. 그 속을 걸어야 하는 양심적 소수자들은, 무엇을 붙들고 자신의 이성을 버티어야 할지 안타까울 따름.


 박해받던 소수자들이 또 다른 약자와 소수자를 박해하는 것은 명확한 원인이 있다. 정의당이 “교육당국” 탓을 하는 성명서를 내놓았는데, 폭력에 관해 고찰한 프란츠 파농의 입장을 인용하자면 고스란히

숙명여대 이번 사건의 본래의 원인은 남성들에게 존재한다. 여성 집단이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자기보다 약한 소수자에게 퍼부은 것이고, 여성집단이 상정하는 자신들의 억압자는 명확히 기득권 남성집단이다.


 내가 남성이면서, 여성주의자들의 광기가 드러난 이번 사태에 대하야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명제일 가능성이 높으며, 둘째는 그것을 남성들 또한 받아들여야 숙명여대에서 발생한 집단의 광기와 폭력이 왜 발생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완다 내전 때 후투족이 투치족을 하루에 수만명씩 학살해댈 때, 벨기에가 그 양심적 책임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성이 다른 성소수자를 탄압한다면, 남성이 그 상황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조롱만 하기보다는 자신들이 가한 폭력이 다른 집단에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느낄 준비는, 어느정도 되어 있어야 그 또한 양심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책임 받아들이기”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폭력의 수위를 낮추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러는 남성집단은, 정작, 그래서, 성 소수자를 집단 내부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는 그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남성집단이 여성집단과 효율적으로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온 것도 아니다. 남성으로서 숙명여대 일부 집단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조롱과 비난을 하기보단, 그저 숙명여대 내부의 양심적 소수들에게 위로나 해주는 것이 고작일지 모른다.


 하루하루, 남성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면서 말이다.

인류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 르완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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