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우리 손 안에 빅데이터
호주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맨 뒤 좌석으로 죽 이동하는데 비행기 벽의 수납장에 <시사IN>과 <씨네21>이 보였습니다. 반가워하며 하나씩 집어와 좌석 서랍에 집어넣었습니다. 두 잡지는 제게 애틋합니다. 전역 후부터 취업사이의 3년 반의 시간을 함께 한 벗들이기 때문이죠. 군대를 제대할 무렵에 잡지 <시사IN>이 창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참 전부터 "시사저널 사태"를 겪었습니다. 벌써 십수년전 사건이니, 글을 읽으시는 분들 기억에 가물가물하겠습니다.
시사저널은 제가 군대에 가기 전에 가장 애독하던 주간지였습니다. 대학교 학생회실로 매주 한겨레21이 배달되어왔지만, 한겨레21은 그 당시에도 다양성을 중시하던 매체였습니다. 노무현 정권 후반기의 복잡한 정치상황에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사안, 특히 다문화 문제나 청소년 문제, 성 다양성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고자 했습니다. 저는 물론, 한겨레21의 그러한 편집방향에는 공감했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이 너무나 복잡했기에 추적저널리즘으로 심층보도를 하는 시사저널에 보다 관심을 갖고 사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휴가를 나오는 길에 제격이지요. 세시간 정도면 중간중간 눈을 쉬기도 하면서 주간지 하나 뚝딱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사저널이 삼성에 대한 비판보도를 실었다가 사장이 그것을 일발적으로 삭제시켰고, 그로 인해 기자들의 파업, 직장폐쇄, 어용기자 채용 등의 사건까지 이어지다가 마침내는 시사IN이 탄생됩니다. 딱 제가 전역하던 주에, 창간호가 나왔습니다. 어김없이 강원도 한 소도시의 버스터미널에서 시사IN을 샀습니다. 그리고 한겨레21도 샀지요. 위에서는 씨네21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자매지인 한겨레21입니다. 두권을 사서 즐겁게 마지막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읽다가 구비구비 꺾어진 도로를 달리며 현기증을 느꼈던 기억도 아늑합니다.
그로부터 3년 반의 시간동안 매주 두권의 주간지를 샀습니다. 보통 시사IN을 먼저 읽었습니다. 성미대로 이슈에 집중한 보도를 중심으로 읽고 다음으로 한겨레21을 마저 읽습니다. 한권을 통독합니다. 그러다보니 재미난 취미도 생겼습니다. 맨 뒤에서 부터 읽었습니다. 시사주간지의 편집은 앞이 가볍고 뒤가 무겁습니다. 편집장의 말, 주간 말말말, 기자들의 이모저모가 앞에 오고, 맨 뒷장엔 깊이 있는 에세이, 그리고 기자들의 취재 뒷이야기, 비평글이 실립니다. 어차피 통독하는 습관이고, 귀한 지면들을 먼저 찾아읽다보니 맨 뒷장부터 열었는데, 그러다보니 맨 뒷장부터 읽습니다. 어차피 두권의 주간지를 모두 읽으려니, 중요한 보도들이 겹치기도 하지요.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습관은 두번의 굴절을 맞습니다. 첫번째는 스마트폰 중독입니다. 제가 스마트폰을 사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당시에 교제 직전까지 갔던 여성이 먼저 스마트폰을 사서 쓰면서 "문자 갑갑하니 카톡으로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었거든요. 어차피 수개월 안에는 살 스마트폰이었겠지만 그보다는, 폰을 산 뒤에는 그 여성분과의 카톡 문자가 출퇴근 시간을 상당히 차지합니다. 게임도 하게 되었지요. 기성 폰의 허접하기 그지없는 게임들을 하다가 스마트폰으로 최신 게임들을 하게 되니 출퇴근 시간에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팟캐스트. 밀린 나꼼수를 나중에야 들으면서 출퇴근 시간에 새로운 시민의 교양을 쌓았습니다. 종합하자면, 제가 글을 읽던 주된 시간들이 모두 스마트폰에 잠식되어버린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극히 사소합니다. 2016년 전후로 언론집단에 대한 시민들의 대규모 반발이 있었죠. 제가 애독하던 시사IN과 한겨레21도 충분히 반성하지 못하더군요. 정기구독을 해지햇씁니다.
정기구독 이야기를 하니 또 한가지 추억이라 말할만한 사례를 말씀드리자면...저는 정기구독을 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기 전까지 3년 반의 시간동안 "가판대 정기구독"을 했습니다. 학교를 오가는 지하철의 신문가판대에서 매주 아침에 샀습니다. 그리고 취업을 한 뒤에는 출퇴근 길의 가판대가 되었죠. 시간만 달라졌을 뿐 같은 가판대였습니다. 그쪽이 제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소비"였기 때문입니다. 정기구독의 편의를 구하지 않고 매주 가판대에 가서 두 권을 사는 습관이 그 가판대 상인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3년반의 저와 두권의 주간지와의 동거는 끝이 났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독서를 팽개친 것이죠. 물론 그 시기에, 저는 취업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새벽에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에 주간지 읽기를 하던 것은 제 개인적인 언론인으로서의 꿈이 습관으로 남아있던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쯤은 교사로서 진로를 확정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주간지 읽기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원서를 넣고 학교를 떠돌아다니면서 내가 이제까지 읽던 그 많은 정보와 지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회한이 문득 들더라구요.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매주 두권의 주간지를 읽는 시간동안 직업훈련에 매진했더라면? 임용고사 준비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저는 훨씬 덜 불안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테지요. 제가 주간지 읽기를 포기한 세번째 이유가 도출된 것 같군요.
그런데,
방금 비행기에서 시사IN을 펴고 읽으며 오랜만에 주간지 읽기의 가치를 되짚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주의 심층보도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였습니다. 메르스와 사스를 비교분석한 세명의 기자와 한명의 전문연구원의 원고가 이번 사태를 입체적으로 조명해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심층보도를 마무리하는 한 편의 기사는 정말 수준이 높았습니다. 기자가 다섯권의 도서를 참고해서 썼더라구요. 주간지의 심층보도, 기획보도만이기에 가능한 취재활동이고 보도문이었습니다.
저는 담임을 하면서 문해력(문자를 깨우치고,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주간지 읽기를 권해왔습니다. 단기간에 문해력을 증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떄문입니다. 취업하기 전까지의 저의 개인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한 권 한 권의 주간지는 매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기자들의 고민이 담긴 깊이있는 종합정보텍스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깊이있는 칼럼이 한 주를 마무리합니다. 그 앞에는 다양성 이슈를 다루는 문화면의 지면, 사회정보 지면이 자리합니다. 그리고 보통 커버스토리와 심층보도로 두가지에서 세가지의 깊이있는 보도지면이 준비됩니다. 그리고 전문기고칼럼이 있습니다. 독서 칼럼과 시사 칼럼은 지식인들의 품격있는 글쓰기를 선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마트폰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빅데이터가 주간지에는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정보탐색은 알고리즘에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튜브와 구글은 사용자 본인과 다른 유사 사용자들의 검색화 정보선택 경향을 빅데이터 통계로 활용해서 가장 신뢰도 높은 컨텐츠를 코디네이팅합니다. 빅데이터의 역설인 것이죠. 빅데이터가 우리에게 가이드하는 것을 따라만 가도 정말로 유의미한 매체경험을 얻을 수 있는데, 그 대신에 우리의 인지 바깥의 새로운 영역에 접근하는 것은 어려워졌습니다.
이번주 코로나에 대한 시사IN의 심층보도가 빅데이터의 역설을 그대로 잘 보여줍니다. 포털들은 기사를 제공하며 "관련뉴스"를 어휘 중심으로 분석해 제공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는 주간지의 심층보도 시리즈를 통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기사 읽다가 출근해서 일해야지요. 폰은 주머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보의 홍수인 바다 속에서 점심시간 쯤 되면, 내가 읽었던 기사를 수백개의 다른 기사가 뒤덮지요. 다시 내가 읽던 기사를 찾아 추적해 읽는 것은 각별한 주의력이 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주간지 시대에는 아무렇지 않게 가능했던 일인데 말입니다.
아이들의 발달 측면에선 어떨까요? 인터넷과 유튜브가 유해정보의 바다라는 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가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단지 정보의 유해성 문제가 아니라, 알고리즘으로 인해 제공되는 정보의 경향성과 취사선택의 편향성, 비자발성은 아동의 상상력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비행기에서 시사IN을 펴고 느꼈던 충격처럼 말이죠.
안타깝게도 이 문제 역시 앞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인지발달의 경향성과 방향성을 통제한 실험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그리고 실제로는 아이들의 인지 발달은 단지 유튜브와 스마트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 부모와의 정서적 교감, 독서지도, 대화법 등 그 밖의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글을 익힐 때까지 하루종일 유튜브만 보던 아이라 해도, 그 뒤의 교육환경과 아이의 잠재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높은 학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발성의 차원에서는 알고리즘형 정보취득은, 당연히 권장되지 않은 사항이겠지요. "서울대 100명의 입학생 중 창의성을 갖춘 학생은 1명이 될까말까다."라는 평가가 종종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자발성이 전혀 없어도 대학, 그 중에서도 서울대를 가는 수준의 학력을 갖추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게 우리 교육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즉시 그러한 "혜택"을 학부모들은 빼앗기게 됩니다. 대학생, 성인인데도 부모의 지원 없이는 취업 준비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노량진의 수섬생들은 생활비를 어디에서 마련할까요. 그리고 경제사정 탓이라고는 하지만, 모두가 공무원 취업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길을 택하지 못하는 것을 어찌 바라보아야 할까요. 다행히, 일자리 문제는 마침 좋아지고 있습니다.
정보지식산업시대에 노동자의 부가가치는 높은 전문성에서 발견됩니다. 로봇이 일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대체불가능한" 역량을 갖추는 것이 생존의 열쇠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알고리즘이라는 온실에서 키워낸 지식능력은 그래서 한계가 명확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AI가 알고 있을 확률이 한 없이 높습니다.
알고리즘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빅데이터를 스스로의 인지구조에 갖추어야 합니다. 백과사전을 달달 외우란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를 보든, 인터넷을 검색하든, 도서관을 가든, "새로운 정보"에 접근하고, "정보의 디테일"을 탐구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고등학력"의 실제입니다. 대학원 과정이 정확히 자신의 전문분야를 정해, 새로운 정보와 그 정보의 디테일을 탐구해 나의 지식체계를 정교화해 새로운 지식체계를 열어내는 일입니다. 모든 학습자가 석사 박사 학위를 딸 필요성은 없지만, "학습"이란 것은 실제로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자발성이라곤 조금도 없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는 교육제도와는 먼 거리가 있죠.
아이를 알고리즘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뒤따르겠죠. 빅데이터 수준의 가정 내 장서, 가정 내 독서지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가시간이 최소조건인데 이것을 갖춘 가정이 얼마나 될까요. 그뒤에서 수십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스마트폰에 빠져 주간지를 놓았던 것처럼 고작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난 일들이 인터넷 하나로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아이들에게 형성된 자발성과 자기주도역량 같은, 도덕규범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자발적 학습에 수십가지의 장애물이 있다는 것은 수십번의 변화의 기회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연속된 변화는 다음 변화를 추동합니다. 장애물을 하나 넘으면 다음 장애물을 넘는 것도 쉬워질 것입니다. 일단은 해볼 일이고 말입니다.
당장 아이를 스마트폰에서 떼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가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연령별로 다르겠지만 보통, 알고리즘으로 취사선택된 정보를 본다기보다는 한가지 시리즈를 계속 보는 수준입니다.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까진 여유가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까다려워지겠죠. 학력경쟁은 심화되는데 스마트폰에 종속되고 중독되는 아이들이 속속 나타납니다. 이 나이가 되면 학력경쟁에 아이를 내모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아이가 활동할 영역을 아이가 좋아하는 영역으로 합의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우니까요. 아이가 어느날 아주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인터넷 스타가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례도 매번 나오고 있고요. 부모님으로선 어려운 결심일 것이지만요.
관심분야에서의 새로운 정보와, 정보의 디테일. 오늘 제가 비행기에서 주간지를 오랜만에 펴보고 다시 되싶게 된 아주 평범한 "공부"의 진리였습니다. 고작 매주 4천원으로 내 곁에 진리의 장이 열린다니 학습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무척, 효율적입니다. 무엇이든 공부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부가가치의 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