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배움을 딱 두 단어로 줄이면 :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얀마에서 군부가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총칼로 짓밟는다 해도 우리의 고통이 그와 같이 크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물리적 실체로서 그것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아무리 참혹한 고통이라도 그를 직접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과 타자의 것으로서 바라보는 것은 조금의 유사점도 없다. 우리는 사회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지만, 모두가 순간순간 자신만의 인식으로, 자신만이 경험하는 것을 감각하고 그것을 해석하기에 결코 모든 사안을 똑같이 바라볼 수는 없다. 진실을 찾아나가는 긴 여정에는 종국엔 인간 개인 개체에 갇히게 된다는 근원적인 장애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규정할 것인가? 인간의 언어와 사고 체계, 지구권의 물리적 조건으로 형성되는 실험의 결과들은 흔들림 없는 자명한 이치인 것일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보는 사실과 현상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 어려운 일인 만큼, 인간 시대가 지금까지 수천년간 쌓아올린 진실에 다가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은 이미 확립된 진실의 아주 짧은 편린을 잠시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토대 세우기가 필요할 것이며, 데카르트와 마찬가지의 독서와 사색을 했다 한들 현대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현대인이 그와 같이 방법론적 회의를 해낼 수 있을까.
문제는 그런 조건을 딛고 아동들에게 진실과, 올바르게 진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심어주는 것이 교육의 과업이라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역사를 통하여 실체에 근접한, 진실에 근접한 여러 지식을 누적해 그것을 사회의 유산으로써 후대에 전수하고 있다. 성인인 교육자와 양육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체득하고 누적한 지식을 그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경험하고 인식할 학습자 아동에게 가르치게 된다.
성인이 의도적으로 조직화하여 짜낸 교육의 방식은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경험인식을 갖게 되는 아동에게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여러 주변지식을 전달한다. 이를 테면 교사의 태도, 가정에서의 부모의 실천, 성인들의 저문해력과 빈곤한 독서율 등, 교육과 뒤섞여 아동이 취득하는 다양한 경험인식은 그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아동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부유하고 좋은 교육환경을 갖고 있는 가정이라면 이 세계는 풍성하고 조밀할 것이며, 불공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척박한 교육환경을 경험하는 아동이라면 그 세계는 대체로 바위산의 소나무처럼 삐뚤빼뚤한 모양이 된다. 좋은 학업성취도를 가진 아이라도 다른 분야의 성장이 크게 못미친다.
그러므로 아동의 참된 배움을 위하여 고려해야 할 첫번째 원칙은 관계맺음이다. 하나의 현상으로부터 모든 개인이 갖는 개별 경험과 인식의 차이를 관계맺음을 통하여 모두가 함께 메우는 것이다. 유아가 자기인식을 하고, 주변인에 대한 인식을 하고, 가족과 친척, 친구에 대한 인식을 해 나가는 관계의 확장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아동의 관계맺음은 학령기가 시작되면서 경직되고 한정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동은 자연스럽게 형성하고 있던 성역할 인식을 학급관계를 통해 고착화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따라 체육활동과 단체활동의 선호 등 또래문화가 형성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그리고 집단문화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가정에서의 성역할 인식, TV 등 대중문화를 통해 받아들이는 사회적 성차별의 토양이 영향을 미친다. 그로 인해 학습자는 자신의 성별에 따라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러한 성별-학습관의 결합 위에 학교 교육과정을 따르게 된다. 관계맺음에 대한 교육자, 양육자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이 없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집단을 분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로부터 분리하고, 실제로 자신의 삶의 양식을 타인과 분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스러운 한 개인의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역할과 노동에 감춰진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함께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관계맺음에 대한 교육자, 양육자 본연의 내밀한 고민이 아동의 관계맺음 속에서 항상 살아있어야 한다. 관계맺음을 통하여 타인과의 더 많은 교류, 다시 말해 정보교환이 가능하고 그를 통하여 아동은 생애 전과정에서 총체적으로 더 많은 경험인식을 쌓게 된다. 그러한 경험인식과 지식이 수평적 세계관에 입각해 쌓이게 되기 때문에 성장의 영역도 총체적이다. 민족사관학교나 하나고 같은 한국 사회 최고의 엘리트학교에서 1인 1기로 예술/체육 동아리 활동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학생들이 다양한 영역을 발달시키기 위해 노력하듯, 관계맺음을 통한 아동의 경험인식은 아동의 세계를 확장하고, 총체적으로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며, 그를 통하여 더욱 명확한 진리의 탐구, 배움의 자발성이 가능하다.
이를 테면 미얀마에서 발생하고 있는 민주주의 투쟁과 학살은 어떤 연원이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라는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스스로 탐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현실의 구체적인 실체로, 역사 공간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두번째 원칙은 실천이다. 이것은 경험인식에 따라 형성된 아동의 잠재적 지식이 실제로 옳은지, 맞는지를 확정하는 일상의 과정이다.
이를 테면 최근 발생하고 있는 학교폭력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폭로는,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실체로서 세상에 드러나고 그것의 진실성이 규정된다. 폭로와 고발이 없다면 모든 경험, 인식, 지식은 잠재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누구나 자신의 몸에 후대를 만들 생식능력과 유전자를 갖추고 있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길고 긴 실천의 고통의 노정인 것처럼, 우리 모두는 진실의 씨앗을 자신의 마음과 정신 속에 감추고 있고, 그것은 오로지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교육과정을 통해 체득한 교과지식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학습자들이 얻게 된 모든 지식은 오로지 실천행위를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다. 수능 위주의 문제풀이식 교육이라 할지라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암기지식일지라도 그 지식의 정확성에 대한 판별은 학습자 스스로 문제풀이를 함으로써 정답으로 판별할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에서 받아쓰기를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도, 그처럼 학습자의 실천행위를 통해서만 학습자의 지식이 객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자, 양육자는 일상의 실천 행위를 통해서 아동과의 관계맺음을 해야 한다. 특히 실천적 지식관이 가장 중요하다. 현실세계의 산물이 아닌 추상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설거지가 깨끗하게 될까?"를 고민하는 것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를 고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우리가 받아들인 어떤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이 지식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탐구하기 위한 실천이 아동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실제로 아동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경험인식을 참으로 확인하기 위한 실천행위를 끊임없이 한다. 아동 스스로가 경험인식과 세계와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연스러운 노력으로 행위 표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지식관, 실천을 통한 지식습득의 경험이 없는 교육자와 양육자는 그를 제대로 인식하지조차 못한다. 아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지식이라는, 관계맺음의 실패가 동시에 발생한다. 결과는 교육의 실패, 지식의 추상성의 강화, 결과적으로는 피상적 지식습득에 그치고 학습자는 장기적으로 학습동기의 큰 동기를 상실한다.
관계맺음과 실천의 두가지 배움의 원칙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와 가정에서는 학습자에게 내면화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경우 해방 이후로도 폭압적인 군사독재가 30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 후유증으로서 극한 정치갈등이 또한 20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노동개혁으로 초 고강도의 교육경쟁이 지속되고 있다. 교육의 권위와 강압성이 학습자의 관계맺음과 실천을 전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사회나 마찬가지다.
비록 아이폰이 초래한, 최근의 범지구적인 관계맺음의 확대와 함께 정보공개의 투명성이 강화되면서 한국사회의 경직성이 다소 완화되었으나, 이러한 가치가 양육자와 아동의 관계맺음의 가치로까지 내면화되기에는 또한 긴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이다. 양육자가 내면화한 노동관, 성역할인식, 노동과 가정 내 성역할의 실천은 사회변화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분리해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성인이며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 교사와 양육자들이 세계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를 감수하며 세계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큰 고통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맺음과 실천의 두 배움의 원칙을 지닌 채로 "미래세대"를 대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우리가 아동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다만 메워나가는 일일 뿐이다. 애초에, 관계맺음 속에서 배우는 아동, 실천을 통해서 배우는 아동에게 우리가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단지 답습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그들의 배움의 본래 덕성을 박탈했던 것일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