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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10. 2020

기생충의 특수성, <기생충>의 보편성

그리고 예술의 존재의 이유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말이 있다. 방금 구글링을 해보니 누가 창안한 말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생태주의적, 환경주의적 실천을 강조하는 말로 흔하게 쓰인다. 우리의 문제의식을 세계로 가지고, 그 실천은 바로 지금, 내 주변에서부터. 


 그런데 이 말은 뜻밖에도 인간의 이성과 우주의 진리를 상당히 관통하는 면이 있다. 자연과학자와 철학자, 사회과학자들이 지금까지 인류의 지식체계를 발전시켜 온 것이 바로, 지구적(우주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장에서부터 탐구를 실천해 온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이 내린 명령에 의해 물질의 본질을 탐구하다가 부피와 밀도의 이치를 깨우쳤다. 그리고 그는 모래밭(종이가 없던 시절이라 대신 모래밭에 글씨와 도형을 그렸다.)에 앉아 원의 길이를 계산하는 고통스러운 연구에 골몰하다가 그 자리에서 로마 병사의 칼을 맞아 죽었다. 한 인간, 한 사람의 과학자가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는 과정은 이처럼 자신의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한정된다. 


 현대의 학계에도 이러한 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따고자 하는 연구자들은 자신이 실제로 탐구할 수 있는 주제에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실험을 하고, 가설을 검증하여, 아주 작은 결과물 하나를 내놓는다. 그 연구 결과는 이전의 우리의 지식체계를 변화시킬만한, "특수한" 성격이어야 한다. 이전의 지식체계를 정방향으로든 역방향으로든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치 있는 논문, 다른 학자들이 인용할 수준의 연구는 그래서 그 연구를 시작하는 과정부터, 연구의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대단한 노고가 필요하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학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처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 이토록 "특수한" 과정을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지식체계가 정립하고 있는 보편성을 충분히,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 내내 쌓아올린 인간의 지성과 지식체계는 태양과 같이 지구 전체를 비추고 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인류의 지식체계에 속해있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인지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의 결과물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은 이 거대한 태양의 빛 앞에 전등 하나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지식과 지식인의 관계에 대하여 뉴턴은 말년에 하나의 아름다운 문장을 남긴다. "난 겨우 꼬맹이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업적이라는 건 그 꼬마가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질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가 느끼는, 한 인간이 지식을 탐구하는 어려움과 우리 지식의 방대함에 대한 아주 재미난 비유다. 


 그리고 나는, 영화 <기생충>의 이번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이라는 충격적 사건이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기생충>은 대단히 특별하고 특수한 영화다. 영화의 음악과 미술,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명작이라 불릴만하지만, 기생충이라는 특수한 주제를 탈장르화된 문법의 아주 특수한 각본으로 버무려냈다. 세계인들이 이 영화에 매력을 느낀 것은 이 영화의 한 없는 특별함이다. 이전에 <기생충>의 서사적 예술성https://brunch.co.kr/@coexistence/17이라는 글에서 지적한 바 있듯, 봉준호 감독은 서사적 개연성이나 인물의 합리성을 기택 가족에게서 도려내는 방식으로 기생충 가족의 특수성을 매우 심오하게 묘사했다. 그런데다가 정말 예측불가능한 반전과 전개까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영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기생충>은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빈부격차의 문제를 처절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빼어난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익히 알려진 바니 말을 더하는 것은 사족에 불가할 것이지만, 자본주의가 전세계를 할퀴어 지구상의 그 어느 지역도 빈부격차와 착취, 그로 인한 인간소외와 차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기생충이라는 소재가 <기생충>이라는 영화로 완성되어진 모습은 전 지구의 우리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높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영화 <기생충>은 전 지구인이 공감할 수 있는 빼어난 보편성과 동시에, 기생충이라는 매우 특수한 소재를 훌륭하게 묘사해냈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가 지식체계를 쌓아온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 해 전 세계에서 수천 수만편의 영화가 제작되지만 그것이 관객의 사랑을 받고 많은 지구인들에게 소개될 수 있는 "특수성"을 갖추는 데에는 한 없이 깊은 고민이 소요된다. 동시에 영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도록, 드넓은 보편성을 갖추는 것이 필수다. 


 그러나 보편성과 특수성은 하나의 창작물에서는 상당히 상충되는 가치다. 클리셰라는 말도 있지만, 관객은 기존의 장르의 관습과 문법에서 영화를 해독하는 것을 선호한다.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몰입감 있게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클리셰는 필수다. 즉, 클리셰는 영화의 보편성에 기여하고, 그것은 더 많은 관객이 영화를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영화가 보편성에 기울수록 창작물로서 특수성과 특별함은 감소한다. 클리셰로 범범된 영화는 말할 나위 없이 흔해 빠졌고, 좋은, 특수한 소재를 각본으로 뽑아냈어도 보편성을 탐내다가 그만 영화가 기우뚱 기울어 침몰하고 만다. 창작자로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두루 갖춘다는 것은 정말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한 없이 많은 재능이 있어도 평생에 한 두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이다. 


 그리고 <기생충>은 그것을 해냈다. 보편성의 바다에서 특수성의 조개껍질을 건져내어 전 세계인을 매혹시켰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넘어서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빈부격차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보고 소통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 창작물을 만들어냈으며, 장르의 관습을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문법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기존의 물리학을 뒤엎었던 것처럼, 봉준호는 <기생충>으로 기존의 영화 세계를 뒤엎었다. 나는 이번 오스카 4관왕 수상이 전혀 과잉된 성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이성 탐구의 과정을 그대로 영화로 선보였고, 관객과 나누었으니, 예술품으로서 그 자체로 최상의 가치다. 예술품으로서 영화가 감성이 아닌 이성에 호소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기생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본래 예술품인 모든 영화들이 모두 그렇지만, 좋든 싫은 모든 예술작품은 인간의 감수성을 흔들어 우리의 인간성을 환기하고, 이성에 침윤된 우리의 영혼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총칼이 전 지구를 휩쓴 광기의 시대에 철학자들은 이성의 처참한 몰락을 목도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감성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러한 철학자들의 탐구는 1960년대의 혁명의 공간 속에서 군인들의 총구에 꽃을 꽂는 히피즘으로 현시되었다. 끝 없는 자유에의 추구로 히피즘의 시대조류도 오래 가지 못하였지만, 21세기는 어떠한가. 결국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으로 모든 지구인들이 하나의 통신망에 연결된 속에서, 지구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기생충>이라는 예술작품이 전 지구적으로 빈부격차의 문제를 환기하고 있지 않은가? 


 봉준호 감독이 스스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오늘 밝혔듯이, 그는 보편성을 통해 특수성을,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 아주 드문 천재다. <기생충>은 인간의 이성의 탐구 과정에서 보편성을 극복하는 특수성의 구축을 위한 노력을 그대로 품어낸 텍스트임과 동시에, 인간의 영혼을 자극하는 드높은 감성을 지닌 영화로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킨, 이성의 측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만족하고, 감성의 측면에서도 특수성과 보편성을 만족시킨 그런 작품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고, 우리는 그로써 문화적으로 지적으로, 한단계 진화를 할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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