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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23. 2020

어쨌든 만들었으니 됐잖아

그러나 다 먹지는 못했다

 언제나처럼 그 시작은 상상도 못하게...복숭아다. 9월 초였던가, 집에서 쉬는 중에 창 밖으로 커다란 스피커폰으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복숭아, 복숭아, 20개 단 돈 만원에 팝니다.


 나는 솔깃했다. 그 품질에 대해서야 뻔한 이야기지만 여름이 다 갈 끝무렵에 떨이로 파는 것이니, 20개 중 단 절반만 건져도 성공인 것이고 그렇게 하더라도 만원에 10개 정도. 괜찮다. 게다가 뭐 고속도로 타는 중에 차를 세우는 수고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집 뒤에 트럭으로 와서 파는 중이니, 가서 구경이나 하자. 나는 지갑을 챙겨 단지 후문으로 나갔다.


 예상대로의 품질이었다. 나 말고 손님은 없었고 나는 그래도 복숭아가 잘 팔리길 대신 기원하며 20개의 복숭아를 주는대로 받아 올라와서, 마침 끼니 때도 되었고 해서 좋아 보이는 걸로 2개를 씻어먹었다. 과일조차 많이 먹지 않는 우리집 식단이다. 여름 내내 열무김치를 먹었는데 이것도 조만간에 글을 써야지 싶다. 어쨌든. 여름 끝물의 복숭아는 과즙을 가득 머금어 단맛은 덜했지만 상큼하고 싱그러웠다. 복숭아는 복숭아. 나는, 그리고, 그 몇주전에 재방송 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던 <백종원의 맛남의 광장>의 복숭아 코블러를 기억해냈다.


 아직 더운 9월이라, 트럭에서 하루 종일 구르고 구른 복숭아들의 신선도야 뻔한 일이다. 아니, 딱한 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냉장고에 넣어놓은들 시시각각 맛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빠르게 먹어 치워야 한다. 그래서 복숭아를 빨리 먹어치울 요량으로, 그리고, 재밌어 보여서 만들었다. 복숭아 코블러.

 안타깝게도, 맛은, 실패.


 양 조절을 잘못했다. 근본적으로 너무 많이 했다. 치오피노를 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복숭아 코블러는 디저트에 맞춤한 양이었어야 한다. 그런데 둘이서 배 터지게 먹을 양을 만들었고, 게다가 복숭아 위에 올린 소보로 반죽이 빠르게 익어주지 않았다. 소보로가 익지 않으니 하염없이 오븐은 돌아가고 돌아가고...그러니 복숭아가 익어서 원래의 의도한 맛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복숭아는 복숭아, 소보로는 소보로니 어느 정도 먹을만한 결과물은 나왔지만, 실패.


 어쨌든, 이 날의 수확은 소보로를 만들어보았다는 것. 신혼살림으로 전기오븐을 장만해서 스콘은 몇번 만들어보았는데 소보로 반죽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버터를 많이 사용하는 소보로반죽이면 쿠키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직관이 즉각 발휘되었다. 오늘은 소보로 반죽으로 코블러를 만들었으니, 내일은 소보로 반죽으로 쿠키도 해볼 수 있겠구나. 나는 생각하며 기회를 살폈다. 그리고, 쿠키를 만들 기회는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불현듯,


 M&M's 초콜렛을 바깥양반은 좋아했다. 신혼여행에 가서 반드시 가보고 싶다고 꼽은 곳 중 하나가 뉴욕의 M&M's 스토어였다. 평소엔 잘 먹지도 않는데 알록달록한 그 초콜렛들에게 홀딱 빠지는 것은 또한 바깥양반다운 점이겠지. 기념품도 몇가지 사서 직장에도 가져가고 뭐, 재밌게 쓰셨나보다. 하고 이 건은 넘어갔나 했더니.


 나중에 다녀온 라스베가스 여행에선 한 술 더 뜨는 일이 있었다. 카지노에는 관심이 없어서 슬롯머신에조차 1센트 한푼 쓰지 않고 내내 돌아다녔는데, 라스베가스 끄트머리에 M&M's 매장이 있었다. 바깥양반이 맛집을 지나칠 쏘냐. 어김없이 들어가서, 이번엔 기념품은 사지 않고 다른 엉뚱한 것에 둘 다 꽂혔다. 우리 이름을 새긴 초콜렛. 재미나게 생긴 키오스크의 단순한 프로그램을 조작하면 그 색색의 알록달록한 초콜렛에 이름과 메세지를 새길 수 있다. 자라락 하고 통에 떨어지는 초콜렛을 받아, 소중하게 포장을 해서 한국으로 가져왔다.


 문제는 정작 그래놓고 둘 다 집에선 간식을 일절 안먹는 편인지라 그 초콜렛이 잘 소진되지 않았다는 점. 나는 프로주부이기 때문에 식재료를 아낌없이 잘 활용하기 위해 끼니를 거하게 먹는 편이고 바깥양반은...쌀밥충이다. 라기보단,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뒤에 간식을 생각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무-려 라스베가스에서 무-려 우리 이름을 박아넣은 소-중한 초콜렛들이 고이고이 잠들어있던 것이렸다.


 나는 M&M's cookie를 검색해봤다. 역시나 있구나! 나에겐 소보로 반죽을 응용해 쿠키를 만들 의지가 있었고, 초콜렛칩도 있고, 집에는 전기 오븐도 있고, 게다가 이걸 먹어줄 시식단, 바깥양반도 있다. 그날 밤 쿠키를 난 생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원래 의도한 비주얼

 일단 소보로 반죽. 버터와 밀가루를 1:1 비율로 치댄다. 설탕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코블러를 만들 때 보니까 너무 달다. 감으로 때려잡아서 설탕 양을 상당히 줄였다. 그리고 이건 실수임을 만들고 나서 알았는데, 물을 정량보다 더 넣었다. 쿠키니까 양은 조금 넉넉히 해도 되겠지. 바깥양반이 사무실에 가져가서 먹을 수 있게 오븐에서 두번 정도 구울 양이면 충분할 것 같다.


 반죽을 치대서 판 위에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콕콕 초콜렛칩을 올리고, 돌린다. 아쉽게도 색깔이 조금 채도가 낮다. 아마도 초콜렛에 프린트를 하는 제품들의 경우, 검은색 잉크가 잘 먹도록(물론 식용 잉크겠지.) 초콜렛들은 채도가 낮은 색상들을 배치하는듯하다. 그것도 나중에 완성되고 나서 아쉽다고 생각하게 된 점.

 첫번째 판 완성. 오븐에 구웠다.


 ...어라라?

 온도가 문제였을까 싶은 결과물이 나왔다. 쿠키는 어느정도 익었는데 버터 비율이 낮았던 탓이다. 구워진 버터와 계란 흰자의 갈색 빛이 나지 않는다. 희멀건한 반죽 색이 여엉 요상하다. 그나마 초콜렛 시럽을 반죽에 탔...초콜렛 시럽이 범인이었구나! 수분이 없어야 버터로만 반죽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버터가 구워진 예쁜 색상이 나는 것인데, 결정적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콜렛시럽이었다. 초콜렛맛을 원하면 당연히 생 초콜렛을 중탕해 넣거나 분말을 넣었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일이었다.


 초콜렛은 녹고 그 바람에 잉크도 녹아내리고 맛은...어라. 맛은 괜찮다. 이미 저녁을 먹은 뒤였기 때문에 바깥양반과 한쪽을 반씩으로 노나먹었다. 갓 구워진 쿠키는, 아무리 망했어도 옳지. 각자의 이름과 행복, 영원히 등의 문구가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남은 반쪽을 오븐에 마저 구웠다. 익혀진 쿠키를 모두 식혀서 통에 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


 제빵이란 오븐에 들어간 뒤부터는 조리사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반죽과 성형에서 거의 조리가 끝나는 요리다. 그래서 나와는 안맞다. 이놈의 자율성과 창의력. 제 멋대로 추가한 초콜렛 시럽 하나 때문에 결정적으로 쿠키가 망가졌다. 복숭아 코블러를 할 때만큼도 글레이즈드가 되지 않았다. 물론 버터가 갈색빛이 나도록 구워지려면...어김없이 초콜렛의 프린트들은 녹아내렸겠지. 제대로 된 레시피가 필요하다. 나는 레시피를 지키지 않고 항상 요리를 하는 편이고, 그 과정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스콘 같은 워낙 간단한 제과라면 레시피를 지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쿠키만 하더라도 그 색깔 하나가 이렇게 요상한 감정을 내게 줄 줄이야.


 그래도, 맛은 괜찮다. 이번에도 하나 배웠어. 어쨌든 만들었으면 됐잖아. 게다가 나름 의미있게 초콜렛을 활용한 요리를 만들었고, 바깥양반에게도 재미난 선물이 된 거니까. 이거면 됐다. 그러나 결국 그 쿠키를 다 먹진 못했다. 나는 매일 아침을 푸짐하게 차렸고 바깥양반은 배부른 상태에서 쿠키를 오전에 넘기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점심 시간이 되면 또 쿠키가 남겨지니, 한두번 차려주다 말았다. 나는 당연히 끼니 외엔 뭘 먹지 않으니 쿠키는 우리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다음에는 더 잘 만들어봐야지. 하고 M&M's 초콜렛 쿠키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또 하나의 항아리를 깨먹었다. 그 이야기는 또 하나의 장독이 되어 내 선반 위에 오른다. 재미있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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