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Mar 09. 2020

소분

정말 좋은 것을 경험하면, 뒤로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

 호주에서 Campos 커피의 원두를 500g씩 두개를 사 왔다. 워낙 유명한 브랜드라고 하고, 라떼로 맛을 보니 그 복잡다양한 맛이 두고두고 먹을만했다. 하나는 남기고 다른 하나는 절친한 학교 선배에게 선물했다. 번번히 술과 밥을 사주시는 형이라 나는 주로 커피 원두로 보은을 한다.


 문제는, Campos의 원두가 내 인생원두였다는 것이다. 500g이면 40~50잔 정도 마실 수 있는 분량일 터다. 밸런스가 워낙 좋아서 투샷을 에스프레소로 추출해서 아메리카노로 진하지 않게 마셔보니 이런, 내가 직접 내려 마신 모든 원두 중에 최상의 최상이었다. 게다가 이 원두가 호주에서는 대략 500그램에 16,000원 가량의, 합리적인 가격이었다니.


 너무 맛있어서 주책을 부리기 시작했다. 봄 개학기간 동안 친한 선생님들에게 마구 내려서 맛을 보여주고 자랑을 했다. 내가 마신 것보다 남에게 퍼준 것이 더 많다. 하루에 6번을 내리면 내가 두잔 남에게 네 잔이 갔으니. 그렇게 300g 넘는 원두를 일주일도 안되어 소진했다. 그때쯤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원두가 떨어지고 있어! 호주에서 계산을 할 땐 인생원두라는 것을 몰랐다. 고작 500g이라니 너무 적게 사왔다. 아아. 타임머신이 있다면 2주 전의 나에게 달려가서 1Kg 들이 원두를 다섯팩은 안겼으리라.


 급기야 해외직구를 알아보기까지 했는데, 배송비에 수수료까지, 16000원의 500g 원두가 7만원으로 돌변했다. 이것은 비합리적이다. 인생원두라지만 그래봐야 기호품인데, 한잔을 내릴 때마다 원두와의 진지한 대화에 금전적 가치라는 이슈가 제기될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남은 원두를 봄방학 기간 동안 알뜰히 먹어보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이번엔 커피머신이 또 말썽이다. 학교에서 쓰고 있는 커피메이커는 높은 추출압력을 중시해 고른 모델이다. 집에서 쓰는 커피머신은 친구에게 중고로 산, 인테리어용으로 흔히 쓰는 모델이다. 압력이 낮고, 한번에 원샷 밖에 추출이 되지 않는다. 불편하기도 하고 몇번을 시도해도 학교에서 내려먹는 그 맛이 나오지 않았다. 추출압력이 낮은 것은 에스프레소에 치명적이다. 안타까움을 느끼며 원두를 밀봉해두었다. 개학하면 마셔야지. 그러나,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 개학이 연기되었다! 3주나 연기가 되면서 집에서 소중한 원두가 산소와 습기를 마시며 방치되고 있었다. 얼려둘까? 얼리기조차 아깝다. 우선 글래스락에 밀봉해뒀으니 제발 무사하기만을 빌며 200g도 남지 않은 원두와의 재회를 기다렸다. 그래서 한달 가까이, 바깥양반이 베트남 여행에서 사 온 원두들로 오랜만에 드립커피를 내려마시거나 했다. 마시면서 끊임없이 Campos의 그 맛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지난 토요일, 바깥양반 바람 쏘여주러 김포로 향했다. 미리 코로나 확진자까지 파악했다. 10일가까이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고, 김포 전체에 확진자가 5명 밖에 없다고 했다. 마스크와 세정제를 챙겨서 차를 끌고 나섰다. 두 군데 카페를 들렀는데 그중 두번째 카페가 김포에서 가장 유명한 로스터리 카페다. 가볍고 산미가 도는, 약하게 볶은 원두와 무겁고 쓴맛이 주류인, 강하게 볶은 원두가 있었다. 우선 두번째 원두를 한잔 마셨다.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강하게 볶아낸 원두의 쓴 맛이 복잡미묘한 향을 내뿜지는 않았다.


 자리가 좀 불편해서 구경도 할 겸, 매대를 둘러보다가 원두를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긴, 2층 건물의 절반이 조리실과 커피를 볶는 공간이었다. 10평 가까이 되는 넓은 공간에 커피로스터가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포에서 워낙 인기 있는 카페이니 커피를 생산하는 규모도 제법 될 것인데...어라, 가격이 저렴하다. 산미가 도는 블렌딩은 1Kg에 27,000원, 클래식한 블렌딩은 21,000원. 호기심이 들어 점원에게 몇가지 물어보았다.


"저, 원두 500g짜리는 안파나요?"

"네 200g이랑 1Kg만 있어요."

"언제 볶은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어제요."

 

 헐. 어제 볶았다고?


"아...그럼..."


 여기서 조금 고민을 했다. 방금 마신 클래식 블렌딩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다. 싸긴 하지만, 굳이 살 정도는 아니다. 산미가 도는 다른 블렌딩은 27,000원. 가격차이가 나는 것은 에티오피아 등 원두의 구성이 크게 다른 탓이겠지.


"볶음도는요?"

"우노 블렌딩은 약배전이고 클래식 블렌딩은,"

"아 그럼 이건 강배전인가요?"

"네."

"음..."


 나는 조금 고민을 했다. 맛을 감안해도 클래식도 파격적인 가격인데다가 어제 바로 볶은 원두다. 직접 내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봉지만 살 것이라면 굳이 마셔보고서 인상적이지 않은 클래식보단, 다른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조금 고민해보고, 테이스팅을 하기로 했다.


"그럼 우노 한잔 주세요. 아메리카노로요."

"네."


 아메리카노도 저렴한 편이다. 가격정책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의외로 산미가 도는 우노 블렌딩도 훌륭했다. 테이크아웃 잔의 뚜껑을 따 보니 추출과정에서 뿜어져나온 기름과 거품도 적절하다. 음. 맛이 괜찮다. 더 고민하지 않고 사기로 했다.


"우노 1Kg 주세요."


 그러고 집에 오면서 바깥양반과 커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개학이 아직 2주 정도 남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학교에 둔 커피머신을 집으로 가져오는 대공사를 하고 싶지도 않고, 집에 있는 약한 커피머신으로 내리는 것은 참고 싶고, 볶은지 하루밖에 안된 1Kg의 원두를, 그것도 꽤 흡족한 원두를, 어떻게 보관하면 좋을까?


 답은 냉동이지. 사실 지금까지도 1Kg씩으로 주로 사는 편이었고, 그냥 별도의 통에 먹을만큼 덜어내고는 학교에 있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아직 커피를 내리는 것이 서툴던 시절인지라 맛도 잘 몰랐던 데다가 소분 같은 요령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실, 제대로 맛도 모르고 오랫동안 먹어왔던 시절이다. 그런데 Campos 원두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좋은 원두를 제대로 추출하고 관리했을 때의 그 훌륭한 맛을 허술하게 추출함으로써 잃어버리는 상실감을 몸소 경험한 것이다. Campos 원두를 이대로 놓아버릴 순 없었다. 개학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고, 당장 최상의 상태로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1Kg의 원두도 말이다.


 답은, 소분 냉동이다.


 오늘 학교에 출근해서 재택근무를 결재 상신한 뒤에 앞에 있는 슈퍼에 들렀다. 지퍼백을 사서는 원두를 적당량씩 담았다. 촤라락-. 원두가 달그락거리며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게다가 1Kg의 원두 봉투를 뜯는 순간의 그 강렬한 향기는 얼마나 좋던지. 집에서 통도 준비를 해 갔다. 김치를 담던 통이라 심하진 않지만 냄새가 조금 났다. 신문지를 깔았다. 다른 큰 통을 사왔어야 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신문지가 어느정도 역할은 해줄 수 있길 기원했다.


 소분을 금새 마치고 테이프와 포스트잇을 가져와 통에 이리저리 표시를 했다. 공유냉동고이니 사람들이 모르고 치울 수 있다. 특히나 방학 때는 주의해야 한다. 누가 훔쳐가거나 할 일은 없지만 교사란 사람들은 거추장스럽고 수상한 것이 보이면 여지없이 치워버리는 본능이 있다. 필사적으로 이 원두의 중요성을 알려야 했다. 덕지덕지 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과하게 표시를 해 두었다. 신나고 재미있게 소분 냉동을 마쳤다. 이제 하나씩 꺼내서 해동한 뒤에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 전에, 먼저 다른 일을 처리하며 Campos 원두로 한잔, 새로 산 원두로 한잔씩 내려 마셨다. 안타깝게도 Campos에선 처음의 그 환상적인 맛을 되찾을 순 없을듯했다. 당연하지. 호주에 다시 여행을 가는 날까진 안녕이다. 한 동안은 김포 카페에서처럼 괜찮은 원두를 찾아서 모험을 하며, 이번에 처음 소분 냉동을 하며 배운 것처럼 평범한 원두를 잘 관리하는 습관부터 익혀야겠다. 기회가 된다면 통도 새것으로 바꾸어야지. 또 하나 배웠고, 인생의 나이테에 얇은 고리가 하나 추가되었다. 앞으론 과거보다 훨씬 맛난 커피를 내려먹을 수 있겠다.


 이게 다 Campos 덕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어쨌든 만들었으니 됐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