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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10. 2020

오름, 미끄러지다

전날 비가 내린 오름을 함부로 걸어오른 댓가

 억새를 보러 제주도를 찾았다. 10월의 토요일 아침에 출발, 일요일 저녁에 다시 올라오는 평범한 일정. 내가 토요일에 수업이 있어 짬을 내기 쉽지 않았다. 중간고사 기간에 강의가 쉬는 덕에 여행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첫날인 토요일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서 바깥양반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금쪽같은 시간을 내서 고작 1박을 머무는데 비라니! 다행히 일요일에는 비가 그쳤지만, 날씨에 바깥양반은 심각한 유감을 표하시었다. 


 그래도 왔으니 가봐야지. 일요일에 아침을 먹고 새별오름을 찾았다. 억새로 유명한 오름들을 바깥양반이 몇가지 골라놓은 일정이었다. 10월의 제주도답지 않게 흐린 날씨와 전날 내린 비로 썩 쌀쌀했다. 새별오름에 도착했을 때는 꽤 많은 차들이 몰려있었지만 여전히 바깥양반은 영 시무룩한 기분이었다. 차에서 내려 이런 저런 농담을 던지며 오름에 오를 채비를 하는데, 

새별오름을 오르기 전에 먹은 츄러스. 배경을 보다시피 그렇게 가파른 능선은 아니었지만.

 나의 나쁜 호기심이 발동했다. 새별오름은 T자형 산책로 구조인데, 좌우 양방향은 일직선으로 뻗은 산책로에 바닥재가 깔려있고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가운뎃길은 가파른 흙길이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땐 정확히 두 아저씨가 멀찍이 떨어져 차례로 그 좁은 흙길을 오르고 있었다. 아니, 흙길이 아니라 숲길, 오솔길, 좁은 길, 힘든 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어야 마땅한데, 나의 이 호기심을 어쩔꼬. 그만 나는 바깥양반에게,


"저기 가운데 길로 가볼까?"

"응? 왜? 그냥 산책로로 가면 안돼?"


 시무룩한 바깥양반은 내 의견을 쉽사리 수용할 태세가 아니다. 나는 가운데 좁은 길에 대한 논거를 즉시 제시했다.


"억새 보러 온 건데, 양쪽 산책로는 사람도 많고 별로 억새 사진도 못찍을 것 같은데? 저기 가운데 길은 완전히 억새 밭이구만."

"흠..."


 바깥양반은 인상을 찡그리며 한번 좌우 길과, 가운데 좁은 길을 차례로 보더니 내 생각에 응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래 가운데로 가."

이때 사진만 찍고 돌아섰어야...

 약 10분 가량은, 나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억새로 가득찬 길을 해치고 가며 아낌없이 사진을 찍었다. 바깥양반은 기분이 풀어져서 실컷 풍경사진을 찍었다. 나는 억새밭을 배경으로, 그리고 반대편 지형을 배경으로 두루 사진을 찍어주며 차츰 위로 위로 바깥양반을 이끌었다. 마침 아주 조금 날씨가 개여 푸른 하늘의 일말이 사진에 담기면서 우리는 희희락락 억새를 구경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무드는 오름의 능선이 본격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깨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전날 내린 비가 문제였다. 온통 억새밭인 그 좁은 길을 뒤덮은 풀들이 습기를 잔뜩 머금고 거의 미끄럼들 수준의 마찰력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 바깥양반은 많이 걸을 것을 예상하고 스니커즈 단화를 신고 온 상태. 걷는 용도 이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는 스니커즈의 밑창은 그 미끄러운 오솔길에서는 공포로 다가왔다. 바깥양반에게는.


"오빠아!!! 나 미끄러져!!! 잡아줘!!!"


 함정에 빠지고야 만 것이다. 처음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바깥양반을 잡고 끌며 몇미터 올라갔는데 도저히 그 스니커즈로는 올라가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게다가 방향을 돌려 내려가는 것은 더 위험했다. 이 미끄러운 길을 함부로 내려갔다간 앞으로 엎어져 코가 깨지든 뒤로 엎어져 엉덩이가 깨지든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벌어질 일이었다. 아주 잠깐 생기를 띠고 웃던 바깥양반은 연신 비명을 지르며 내게 매달렸고, 나 역시 미끄러운 경사로 위에서 위태롭게 바깥양반을 겨우 지탱해줄 뿐이었다. 


"아니 저쪽에 편한 길로 가지...아 진짜..."

"어 미안해 빨리 올라가자 이리와봐."

"아아!" (미끄러짐)


 이내 화살을 내가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기분이 착 가라앉아있던 것이 간신히 조금 풀렸나 싶더니, 몇번이나 앞뒤로 미끌어지면서 바깥양반의 인내심은 수수깡에서 쿠쿠다스로 진화했다. 멘붕. 앞으로 가기도 힘들도 뒤로 내려가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위기상황에 나에게 마구 짜증을 쏟아냈다. 


"올라가자 올라가자 잡아줄게."


 나는 미안함이 조금 섞인,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바깥양반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둘 다 손이 차갑게 식어있었고 흙투성이었다. 나도 몇번이나 넘어지면서 렌트카의 열쇠를 떨어트리기까지 했으니 사정이 알만했다. 겨우 한걸음, 겨우 한걸음 어렵게 오르는 내내 바깥양반의 비명은 쉽사리 끊기지 않았다. 워낙에 겁도 많으니 짜증보단 거의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비명에 가까웠다. 

한번 제대로 미끄러져서 옷에 묻은 흙을 터시는 분노의 몸짓

 나의 낙천적인 기질은 이 상황에서도 바깥양반의 굴욕사진을 여럿 남겼다. 전날의 비와 습한 날씨 덕에 억새들이 물기를 가득 머금었는데, 바깥양반이 워낙 좌충우돌 하며 머리를 적시니 30분쯤 지나자 머리가 거의 인어공주가 뭍에 처음 나온 꼴이었다. 얼마나 힘겹게 올랐던 것인지 바깥양반의 얼굴이 창백해질 지경이었다. 내려가면 화장부터 고치라고 말해줘야할만큼. 한가지 다행한 점은, 어쨌든 비명을 꽥꽥 지르며 정상에 겨우겨우 닿아간다는 것이다. 겨우 다시 능선이 완만해지면서 둘 다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구름이 사라지고 어느정도 맑은 하늘이 오름 정상에 슬쩍 드리워져 있었다. 흐드러진 억새에 맑은 공기, 파란 하늘에 바깥양반은 급속도로 안정을 찾았다. 다 올랐다. 나는 장난기가 다시 발동했다. 방금 전까지의 그 미안함과 양심의 가책은 온 데 간 데, 없다. 


"이제부터어~"

"하지마라."

"웃음기 사라질거야아아아."

"진짜 죽는다."

"가파른 이 길을 좀..."

"야!!!!"


 다시 바깥양반의 인내심이 쿠쿠다스로 돌아올 뻔 했다. 다행히 이제 화를 내도 될만큼 완만한 길이다. 거의 반죽음이 되어 힘들게 정상에 오른 우리와는 다르게 좌우의 산책로엔 형형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바깥양반에게 맞추어 주는 만큼, 바깥양반도 나에게 맞추어 주느라 이따금 고생을 하곤 한다. 그리고 이날 새별오름을 오르며 두 손에 온통 흙을 묻힌 그 날의 기억은 유난히 즐겁고 살뜰한 추억이다. 나의 이 못된 호기심으로 톡톡히 고생을 시켰고, 어쨌든 같이 올랐으니까. 한걸음 또 한걸음. 

억새는 참으로 많고 많았다.
저 편한 길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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