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대물림, 그 믿음에 대한 실질적 접근
*이 글은 "민주주의와 교육" 브런치 북에 게재한 글을 다듬어 본 매거진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1.
언어학에는 “결정적 시기 가설”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동이 언어를 습득하는 시기는 몇 가지 요인(양육자와의 강한 관계, 백지상태의 언어감각기관 등)으로 인해 인간의 생애에 특별하고 특수한 기간이며, 그 이후의 시기는 아동의 언어습득기 만큼의 언어습득효율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영어를 공부하며 지독한 학습의 비효율을 경험하며, 조기 영어교육을 받은 사람과의 차이를 보고 이 결정적 시기 가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가설”이란 것입니다. 즉,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을 띈 현상”, 혹은 “흔들리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결정적 시기가 틀린 이론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결정적 시기 가설은 다만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가설로 남아 있는 이론입니다. 아동기가 언어습득에 결정적인 효율과 성과를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만을 평가하는 것은, 혹은 제2언어를 습득할 때와 비교하는 것은 타당한 연구방법이 아니지요. 과학적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충분한 표본을 대상으로 변인을 통제해보고, 각 변인에 대한 대조군까지 만들어 보아야 비로소 가설이 아니라 이론으로 정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인지발달의 핵심인 언어를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칠 수 있을까요? 어린 아이에게 어떤 언어적 자극도 주지 않고 그저 감각을 통해서만 인지를 성숙시킨 다음, 결정적 시기를 지난 연령대에 언어를 학습시켜볼 수 있을까요? 충분한 표본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해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질 치명적인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결정적 시기 가설”은 그 연구영역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설로 남아있습니다.(다만 “늑대소년” 같은 케이스가 예전에는 종종 있어서 이 가설에 힘을 붙였던 바는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이론이 가설의 딱지를 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2.
대학 시절 학생회 선배들과 늦은 시간까지 토론을 할 때면 항상 “교육 문제는 너무나 복잡해서 해결할 수가 없다”라는 명제가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이것도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십 수 만 명의 수험생들. 수 십 만의 학부모들, 수 백 만의 교육관계자들, 수 천 만의 국민들의 평등한 교육의 권리. 왜 교육이 복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육 현상이 복잡한가? 그 복잡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이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교육 현상은 대단히 간명하게 드러나며, 많은 경우 우리의 보편적 인식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평등한 교육조건은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지지한다.>
<가난은 인간의 인지를 왜곡한다.>
<교육의 평등 강조는 교육의 수월성을 침해한다.>
이처럼 간단한 명제들이 큰 논쟁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는, 교육이 수십 수백 수천만명의 주체들이 함께 참여해 상호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교육 문제 빅데이터를 통해 “진리”라 말할 수 있는 여러 명제들을 경향적으로, 경험적으로 추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단지 복잡하기 때문에 해결이 어려운 것이라면 인간이 소수의 법칙 따위를 규명하려 하는게 넌센스죠. 우리의 시력으로 알아볼 수 있는 한계치를 아득히 넘는 멀고 먼 우주의 어떤 은하의 중력이 교육 현상보다 간명하기에 그것을 탐구하며 그것을 진리의 장으로 끌고 오려 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간명한 교육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사실들을 추출해 나가는 일련의 연구 분석이 어려운, 바로 그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학문인 탓입니다. “결정적 시기 가설”에서 보았듯이 말입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명확한 교육적 현상조차 우리는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 수 없으므로’ 번번히 걸음을 멈추도록 강요당하곤 합니다. 아무리 명확한 사실이어도 확증할 수 없기에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로막힙니다. 거꾸로, 어떤 드러난 경향성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에 근거하여 보편성으로 풀이되고, 진실에 근접하고자 하는 여러 도전들조차 인간의 문제 앞에 침잠콘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교육을 왜곡하려는 자들은, 인간성의 그림자에 숨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자신의 경제적 기득권을 확대합니다. 교육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결국 복잡한 교육현상이 아닌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교육학은 가장 인간적이어야 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인간화되고 있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3.
로버트 퍼트넘의 <우리 아이들>은 학습자 아동과 그의 가족, 그리고 지역 공동체에 대한 심층면접과 통계분석을 통해 미국의 교육현실과 교육현상 속에서 최대한 진상에 근접하고자 노력한 각고의 저작물입니다. 러스트벨트를 포함하여 미국 여러도시와 부촌, 도심의 빈민가에서 아동과 부모의 삶을 깊이 있게 추적하여 양적 질적 분석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우리가 갖고 있는 “가설”이라 할만한 교육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제시합니다.
1960년대, 재건의 시대에 우리 사회공동체는 국가의 미래인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함께 키웠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함께, 마을공동체, 경제공동체, 교육공동체, 육아공동체는 모두 분화하게 됩니다. 집단의 문화만이 아니라 가족구조의 변화는 임신과 양육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 미국에서 심각한 2차, 3차적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다관계 다자녀들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발전이 예상치도 못한 사회현상으로 발화한,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경제 붕괴-사회 분화-개인인식의 변화로 가난한 아동과 부자집의 아동들이 거주부터 인식까지 모두 분리되고, 마침내는 낮은 교육과 열악한 경제조건에서 가난한 아동들이 범죄와 폭력에 내몰리는 현상들을 이 책은 개인들의 생생한 사례, 구담으로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책은 드넓은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한 통계자료와 함께 개인사를 밀도있게 조명하여 우리 아이들이 실제 겪은 교육현상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그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있고, 참신한 관점에서 문제를 고찰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주요하게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장기간의 데이터분석을 시행하여 대체적으로 교육 내부에서 “가위 모양 그래프”라는, 계층간의 분리가 여러 변인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책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아동을 둘러싼 모든 교육적 변인들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계층간 격차가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커져오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오늘날의 여러 교육 개혁의 갈래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거나, 직접적으로 연결성을 띱니다. “마을교육공동체”, “교육복지”, “교육격차 해소”, “교육투자와 편익” 등, 우리가 ‘문제’로 인식하고 있거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담론들 중 대다수가 이 책 안에 여러 조각으로 담겨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들의 탐구과정을 따라 걸으며 나 자신도 새로운 문제의식을 품게 되곤 합니다.
왜 교육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는가? 어떻게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뒤로 미루어져도 좋습니다. 그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우리가 길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국가공동체 모두가 함께 달려들어, 해결을 위해 노력해가는 것이 가장 쉽고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교육격차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감으로써 국가의 비용을 장기적으로 누수시키는 일련의 노력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당장이라도 과감히 제동을 걸어야 할 때임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소외된 아이들이 범죄에 빠짐으로써 생기는 비용, 마약에 물들어 생기는 비용, 편부 편모와 자라게 되어 생기는 추가적 지출들, 그 또한 국가 예산이고 결국은 우리 납세자들이 낸 우리돈 아닌가요? 교육의 계층분리는 경제적 계층분리와 한몸입니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몸"입니다.
4.
연구분석으로는 입증하기 어려운 교육분야의 증명을 거대한 통계분석으로 수행한 저자들의 노력과 인내에도 진정으로 감사하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된 책입니다. 그동안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어 오지 않았던 이유들에 대해서, 이 또한 단지 가정에 불과하지만 어느정도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육정책당국이 아닌 한 사람의 교사로서는, 그만큼의 실마리면 충분할 테지요. 교실 안의 모든 아이들을 보살피는 수업. 계층간의 실질적 평등을 이끌어내는 계획. 학생들의 배경과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장기적으로, 다면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평가. 그리하여 모든 학습자들을 “우리 아이들”로 생각하는, 철학을 담아낸 교사.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학부모님들께 책을 소개시켜드리면서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 든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꼭 들었고, 이러한 대화가 길게 이어질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조금쯤은 푸른 색으로 바뀌어나갈 수 있겠지요. 봄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