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돼지등뼈다.
지난 설 때 엄마가 건네 준 마지막 식재료를 해동했다. 검은 봉지 속에 5키로는 될법한 묵직한 고기덩어리였는데, 나는 이것이 갈비탕에 들어갈 갈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워낙 엄마가 챙겨주는 것들이 많아 설명도 대충하시고 나도 대충듣고 집에 와서 봉지째로 그대로 냉동실에 넣었다. 당시에도 이미 얼어있는 상태였던데다가 소분을 하겠다고 녹이고 어쩌구 하기엔 그 때 이미 받아온 게 꽤나 많았다. 일단 이 정체불명의 검은 봉지는 나중에 열어보기로.
그래서, 설날 직후엔 녹두전을 해먹고, 호주를 다녀와선 만두를 빚고, 그러고 나서는 다른 검은 봉지를 먼저 풀어 그것이 돼지갈비임을 알고 양념을 재워서 갈비구이를 해먹고 나서, 설날로부터 두달이 다 되어서 이번엔 최후의 설날의 과제를 풀어내기로 했다. 일단 뭔지를 알아야겠으니 냉동실에서 꺼내 검은 봉지를 풀었다. 흰 봉지에 검은 묵직한 고깃덩어리인데, 어라...얘도 돼지갈비인가? 또 돼지갈비를 하겠군. 생각을 하고 일단 녹여뒀다. 내일 아침이면 뭐든 해야지.
그런데 아침이 되어 해동된 고기를 물에 헹구려 꺼내보니...어? 등뼈다. 돼지 등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의, 돼지등뼈다.
집에서 돼지등뼈로 엄마가 요리를 해준 게 두 해 전이었는데, 그때까진 한번도 만드신 적이 없다. 왜 환갑이 지나서 돼지등뼈로 요리를 하시고, 또 이번 설에도 어마어마한 양을 사서 내게 건네셨는가 하면...아마도 젊으실 땐 손이 워낙 많이 가니 시도를 안해보셨던 거고, 이젠 나이도 드셨겠다 조금 생활도 여유로워지셨으니 이렇게 명절이 되면 새로운 요리에 도전을 해보시는 것인가 싶다. 게다가 요 두어해 전부터 집에서 명절음식 만드는 것을 그만두셨는데, 명절 때마다 이것저것 음식을 차리던 습관은 그대로인지라...뭔가 스스로 힘에 부친 뭐라도 사서 만드시려던 것이 아닐까.
다만 이번엔 내가 그 짐을 얻어지게 되었지만.
그건 그렇고, 두 해 전에 처음 먹은 엄마의 김치등뼈찜은 굉장히 맛있었다. 사먹는 돼지등뼈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고기가 부드러웠다. 대체로 맛있다는 감자탕이나 뼈해장국집들도 어김없이 등뼈에 고기가 많지 않거나 고기도 퍽퍽한 경우가 많은데 그 찜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냉동기간과 관리 문제가 가장 클 터다. 냉동 상태든 조리 과정이든 공기에 노출되어 말라있는 시간이 많으면 고기의 수분이 날아가고 육질이 나빠지는데 등뼈는 워낙 덩어리도 크고 식당들에선 손질을 마치고 육수와 별도로 마련해두고 손님에게 음식이 나가기 전에 합쳐서 내놓다보니, 당연히 고기는 마를 수 밖에.
그와 반대로 집에서 한번에 조리를 해서 먹은 등뼈는 당연히 부드럽고 신선했을 것이고, 그러니까...나는 그런 등뼈를 지금 녹여서 앞에 두고 있단 말이지. 이를 어쩐담. 일단 소분을 해야 하나? 김치찜을 해야 하나?! 감자탕을 끓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가장 위에, 그리고 가장 흔하게 나오는 레시피는 당연히 감자탕이다. 감자탕. 맛있지. 나도 좋아해. 그러나 레시피만 봐도 손이 너무 많이 가는 게 엄두가 안난다. 게다가 난 이 등뼈의 정체를 알아낸지 5분도 되지 않았다. 차라리 갈비탕 재료였다면 무랑 팔팔 끓여서 내면 쉽지. 감자탕은...감자탕은...쉽지 않다. 요리 솜씨가 좋은 엄마가 평생 한번도 해주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마침 재택근무 중이고, 게다가 어제는 꽤 중요한 업무도 처리해둔 참이라 시간에 좀 여유가 생겼고, 게다가 이미 내 손을 거친 실팍한 등뼈들을 보고 나의 이 미친 긍정주의는 마침내 발동해서, 나는 기어코, 감자탕을 끓이길 결심했다. 먼저 한번 피를 빼둔 감자를 솥에 옮겨담고 한번 끓여냈다. 이제 시작이다.
레시피를 봐도 그랬지만,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뜨거운물로 한번 끓여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러고 다시 본격적으로 끓이기 시작하는데만도 1시간이 넘고 몸이 시달리는 대장정이다. 등뼈가 저렴한 식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해먹기 이리 구구하니 밖에서 원재료에 비해 비싼 값을 물고 사먹는 것일 테지.
일단 불순물을 제거하는 단계에서부터는 한시간 가까이 꽤나 몸이 바쁘다. 끓여서 피를 뺀 등뼈들을 다시 찬물에 헹구고, 핏물로 더러워진 냄비를 닦는다. 아...냄비가 크다. 우리집에서 가장 큰 냄비다. 그런데 그 냄비에 가득 등뼈가 차 있으니, 뜨거운 물로 끓여내기도 어렵다. 냄비에 물을 조금 채우고 나서 등뼈를 착착 쌓아올렸다. 대충 우수수 부었다간 공간이 뜨면서 다른 재료들을 넣을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테트리스를 하듯 빈 공간을 착착 채워서 등뼈를 쌓아올리고, 물을 찰랑찰랑 부었다. 그리고 된장과 간장, 마늘과 생강을 넣고 마지막으로 파를 올렸다. 이제는 조금 쉴 수 있는 시간.
그러나 등뼈가 너무 많다. 그렇다고 육수를 내기 위한 재료를 뺄 수도 없다. 겨우 냄비 뚜껑을 닫았다. 분명히 넘친다. 약불로 해도 넘친다. 그러나 뭘 뺄 수가 없다. 더 큰 냄비도 솥도 없다. 에라 될대로 되라지. 일단 잠깐 쉬자.
한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국물 향이 진동한다. 넘쳤구나. 후다닥 가서 행주로 흘러넘친 국물들을 닦아낸다. 냄새가 그런데 퍽 좋다. 졸여져야 할 테니 뚜껑을 열고...졸이면서...이번엔...기름을...걷어낸다...기름이...많다. 끓이면서...또 걷어내고...또 걷어내고...팟캐스트를 들으니 시간이 잘 간다. 밥공기 하나가 기름으로 가득 찼다. 워낙에 고기가 많으니 기름도 많다. 이 기름을 싱크대에 버렸다간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한번 떠낸 기름들은 변기에 버렸다. 그런데도 기름이 계속 나와 계속 숟가락을 놀렸다.
육수를 맛을 보니 순하고 시원한 맛이다. 딱 시원한 돼지고기 국물. 그러나 너무 싱겁기도 하고, 감자탕의 맛은 아니다. 감자탕을 끓이기로 했으니 감자를 넣어야지. 지난번에 카레를 하기 위해 사서 남겨둔 감자를 모두 꺼내서 껍질을 깎았다. 차암 손도 많이 가지. 파에서는 채수가 충분히 우러나왔을성 싶어서 기름을 떠냈던 공기에 파를 모두 담은 뒤에 숟가락으루 꾹 눌러 진액을 빼낸다. 그렇게 만들어낸 여유공간에 감자를 넣었다. 다시 냄비 꼭대기까지 국물이 차올랐다. 더 끓이는 김에 마늘도 한주먹 더 넣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쉬었다. 벌써 또 30분을 서서 고생을 했다. 다 만들면 엄마에게 자랑해야지.
다시 한참을 끓여냈다. 슬슬 점심때도 다가오고 해서 먼저 감자를 찔러봤다. 다 익었다. 잘 부스러진다. 국물에도 충분히 감자의 단맛이 전해졌을 것이다. 국물 맛을 봤다. 여전히 싱겁다. 엄마의 집간장과 깻잎, 된장을 더 넣고 또 끓였다. 한참을 끓이며 간을 맞추고, 깻잎에서 향과 함께 쓴맛도 우러나는듯해서 깻잎은 건져냈다. 슬슬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얼추 국물 간을 맞췄는데, 한가지 결정할 사항이 남아있었다. 다시다가 없고, 들깨가루도 없다. 그게 왜 문제냐면...사먹는 그 맛, 익숙한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된장과 고춧가루, 간장이 만들어낸 지금의 국물도 감칠맛 있고 시원하지만 그것이 평생 먹어온 감자탕의 맛이 아니라면, 나야 어찌 먹는다고 쳐도 바깥양반은 또 어떨지. 어차피 더 끓여야하니 다시다와 들깨가루만 나가서 사 오면 땡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만큼이나 귀찮았는데 조금 더 귀찮으면 또 어때. 나갈까? 말까?
당연히 나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인공조미료 없이 천연재료들로만 맛을 낸 지금의 시금털털하고 심심한 육수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당장 라면 하나 꺼내서 스프를 넣고, 면은 감자탕 사리로 만들어먹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늘 그렇듯 나의 미련한 고집이 이번에도 말썽을 피운다. 아니 좀 심심하게 먹으면 어때. 맛만 있으면 되지.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팔팔 끓이면서 다급하게 김치를 썰었다. 안그래도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들이 이유없이 늘었는데 김치도 썰어둔 게 떨어졌다. 하이고야...딤채에서 꺼내와서 썬다. 지금 한창 김장김치가 맛있을 때다.
바깥양반을 불러 식탁에 마주앉았다. 차암...사진이 안나온다. 그리 크지도 않은 국그릇에 우겨담았으니 보기 좋게 찍힐 리가. 게다가 국물도 아래에 깔려있다. 앞접시들을 하나씩 놓고 뼈를 올려, 밥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역시, 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젓가락으로 충분히 좍좍 찢어지는 풍성한 고기들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바람을 쏘이지 않아 마르지 않았고, 푹 끓여내 부드러운 등뼈. 노력의 댓가로는 충분하다. 그리고 엄마가 내 준 과제를 잘 해결해냈다는 뿌듯함이 부상으로 따라왔다.
다만, 국물은 저녁에는 다시다와 들깨가루를 사오기로 했다. 잠깐 멈추어서 내 식대로 한번 했으면 된다. 바깥양반이 고기는 맛있게 먹으면서도 국물은 미심쩍어했고, 한번쯤 내가 하고픈대로 해보았으면 이제 남들 다 하듯이도 해야지. 고집을 피우고싶은대로 피웠고, 그래서 맛있게 한끼 먹었다. 다행히도 네댓개의 등뼈만 꺼내도 솥에 남은 감자탕이 훅 줄었다. 앞접시엔 어느새 뼈가 수북하다. 맛있게 먹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저녁엔 다시다와 들깨가루를 넣어서 만들었더니, 아니 그 맛이 글쎄! 정말로 사먹는 그 감자탕 맛과 똑같더라니까. 원래 감자탕이라는 게 그 맛이 뻔하긴 하지만. 물론 고기는 차원이 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