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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pr 02. 2020

글감이 두개나 생긴 밤에

그리고 밀린 글감이 한 스무개

 학교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다. 내가 어제 쓴 글을 페북에도 링크했는데, 온라인 개학에 대응하는 교사의 주체적인 태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친한 동료교사에게 좀 거슬린 모양이다. 3학년 교무실에 놀러갔더니, 훅 찌르고 들어온다.


"야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는 건 아니지 않아?"


 재미난 주제다. 흥미진진하게 글을 한편 쓸 수 있겠다.


 그리고 나는 오늘 학교에 가서 온라인 수업을 위한 세팅을 두가지를 실험해봤다. 수업을 해야한다면 판서를 해야한다. 그럼 어떻게 판서를 할 것인가? 컴퓨터를 통해서 판서를 할 것인가, 아니면 칠판에 판서를 한 걸 찍을 것인가? 각자 한계가 있다. 그래서 A4 용지에다가 손으로 써서 그걸 그대로 찍는 세팅을 완성했다. 아래 사진. 실시간으로 책상 위를 찍어서 온라인 생방송이 가능하도록 삼각대에 웹캠을 테이프로 둘둘 말라 고정시켰다. 이 세팅을 만들기까지 한 20분 여러가지 고민과 실험을 했다.


 집에 와서는 정말 재밌는 일을 겪었다. 거두절미. 집에서 미니화로에 숯불구이를 했다. 야자숯에 불을 피워서 고기를 굽는데까진 성공했는데...야. 이거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라서 그런가, 연기가 어마어마하게


진짜 어마어마하게

진짜 어마어마어마하게

진짜 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진짜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진짜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연기가 난다. 와 이거...어쩌지?


 창문이란 창문 그리고 베란다를 다 열고 고기를 구웠다. 언제 경비실 혹은 윗집이 초인종을 누를지 모르고, 언제 맞은동에서 창문을 열고 "앞동에 불이야아아아!!"를 외칠지 모른다. 다행히 일교차가 큰 철이라 앞 베란다로 들이친 바람이 뒷베란다로 말끔하게 연기를 쓸어갔지만, 바깥양반은 오들오들 떨면서 바지와 윗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아 그래도 참, 재밌는 사건이었다. 화창한 봄 날씨에 아무데도 못나가서 갑갑해하는 바깥양반이 딱해서 그냥 충동구매를 한 미니화로. 가로세로 15센티짜리인데 저녁식사를 맛있게 했다. 이 코딱지만한 화로가 소꿉장난 수준 밖에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여기에다 600그램씩이나 고기를 구워먹었으니, 내가 초인종 소리를 겁낼 수 밖에. 그러나 역시,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만든 재미난 사건.


 글감이 두개나 새로 생겼고, 밀린 글감이 스무개는 되는데 여러가지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무국을 끓이고 있다. 소고기를 한번 끓여내 핏기를 빼고 지방을 가위로 삭삭 제거했고, 제주도산이라는 무를 썰어서 넣고...지금 팔팔 끓는중.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얼갈이를 썰어넣는 것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식감이 살아있는 얼갈이를 먹고 싶어서다. 풋내가 가시면 얼갈이의 시원함이 더해질. 아 근데 또 이 얘길 쓰려면 책도 못보고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고.


 고작 먹고 사는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풀어낸 이야기인데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어주니 계속 쓸 말이 생긴다. 인터넷이라는 광장의 힘이다. 누구나가 풀어놓을 이야기만 있다면, 사람과 만날 수 있다. 그런 한편, 학교에서 담임으로서, 혁신교사로서, 교육사회학 연구자로서 역할갈등에 시달리면서 집에 와서는 또 프로주부로서, 게이머로서, 오덕후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역할갈등에 시달리는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또 한 없이 즐거운 유희이면서 동시에 매 순간이 막막한 길목이다. 나는 문단이 아닌 글은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꼬리를 물어야 생각이 논리가 되고 이성의 체계로 전달될 수 있다. 각 문장과 문장이 개별로 존재하는, 서로 꼬리를 물지 못하는 글은 이성이 아닌 감정과 감수성에 머문다. 하나의 문단 속에서도 매 순간 갈등하고 충돌하는 그 고난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나 역시 상대방의 의견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세지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글을 쓰고 난 뒤의 퇴고도, 글을 쓰기 전의 구상도 하지 않는 나 역시도 매번의 글은 쉬이 쓰여지지 않는다.


 9월까지 긴 호흡으로 차차 글쓰는 시간이 줄게 될 것이다. 영어 시험도 봐야 하고 전공서도 더 봐야 한다. 이미 붙었다가 입학을 포기한 대학원에 다시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한다. 한번 붙었던 것이라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놀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재밌으니까. 글쓰는 이로서의 나보단, 읽는 이로써의 내가 여름의 고비를 지나 가을에 물들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 하나의 글은 어때야 할까. 오늘 새로 생긴 두개의 재미난 글감을 나는 후루룩 쓸까- 아니면 며칠쯤 굴리고 다스려 더 재미나게 써볼 궁리를 할까. 이 글을 쓰는 사이에 또 몇개의 글감이 더 생길까. 그렇게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쓸 짬은 나려나. 그러니까 이를테면,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 맛나게 저녁을 차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이구 이 많고 많은 고기랑 과일이랑 채소들을, 언제 다 치우지 싶은, 그런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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