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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pr 08. 2020

큰일이다 공부가 재밌다

내가 여태까지 게으르게 산 건 아니지만,

 호주에 갔을 때 교수님의 조언으로 책을 한 권 샀다. 200페이지 분량의 영어원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다. 사전을 들고 꾸역꾸역 해석하고 읽을만은 했지만, 내 전공 분야도 아닌 바에야 빠르게 인사이트를 얻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얼마 뒤에 알라딘에 들렀다가 눈에 띄어 번역본을 샀다. 그리고 여러날에 걸쳐 천천히 읽었다.ㅇ


 책은 재미있지만 판본이 낡아서 번역투가 좋지 않았다. 성공적인 연구자라고 해서 성공적인 글쟁이가 되긴 어렵다. 원서부터가 누구에게나 두루 읽힐 쉬운 글이 아니다. 애초에 <과학혁명의 구조> 자체가 과학 전문 출판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고 하니, 과학자가 아닌 일반 성인의 교양 수준은 넘는다.번역과정에서 더더욱 읽는 이의 입장을 반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어로도 어려운 학술용어 등이 가득한데 그것을 적절히 우리말로 옮겨내기 어려웠을 역자 김명자 교수의 심정이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다보니 나도 그 어지러운 번역체의 문장들, 적지 않은 오역, 그리고 나의 과학지식의 한계로 인해 제대로 읽지 않고 버려내는 분량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지식에 기반하여 논리가 전개되는 이 책의 특성으로 인해 그리 효과적인 독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책을 좀 더 읽다가 발생했다. 그만, 이 책을 내게 추천해주신 교수님의 의중을 다른 책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교육을 바꿀 슈퍼맨을 찾습니다!(이하 슈퍼맨 찾기)>라는 신간인데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조만간 하기로 하고, 미국의 교육정책을 다양한 관점에서 다룬 아주 논쟁적인 책이었다는 점이 내게 문제를 일으켰다. 


 이 책 속에서 다양한 학자들이 미국의 "차터스쿨"과 그것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자본주의적 교육정책에 대해 비평을 나누고 있는데, 그것은 교사로서 내가, 그리고 교육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도의 입장에서 내가 아주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문제라는 점이 첫번째 자극이었고, 우리 교육계에서는 이런 수준의 교육정책에 대한 논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두번째 자극이었다.


 이를 테면 2017년 이후 내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정시 확대, 수시 축소 논쟁의 경우에도, 그것을 이론적으로 제대로 논박을 하고 있는 교육학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 정시를 강화하자는 것인가? 왜 다면평가인 수시와 학종이 불공평하다는 것인가? 교사의 자질에 대한 막연한 불신을 근거로 한 학종 비토는 어떤 교육적 가치를 갖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학계에서나 언론계에서나 소통되지 않았고, 어떻게 문항이 구성되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여론조사를 통해서 마치 정시 확대 지지자가 다수이니 옳다는 식의 주장만이 횡행했다.


 즉, <슈퍼맨 찾기>는 우리 나라에 부재한 학술토론 문화, 특히 언제 어느때나 가장 뜨거운 이슈인 교육문제에서 벌어지는 장구한 투쟁을 내게 보여줌으로써, 학문에 있어서의 논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미국 땅에는 꽤나 많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어떤 한 학문분야에서의 지배적인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이론이 인식체계로 보편화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비판과 위협을 당하고, 어떻게 해체되어 새로운 인식체계로 교체되는지. 즉, 어떻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하는지를 내밀하게 논증한 책이다. 나는 <슈퍼맨 찾기>를 통해서 어떻게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해 학자들이 논쟁을 하는지를 간접체험한 것이고,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절반 정도 읽은 상태였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선녀처럼 보였다. 이 중요한 책을 내가 번역체의 불편함, 과학지식의 부재함,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서야 말이 되나! 당장 번역서와 원서를 나란히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 정확히 맥락을 이해하고 넘어갔다. 꼭 그래야할까? 내 전공분야가 아닌 책을 읽는 것이고, 이해가 안되면 논문을 읽으면 되기 때문에 잘 모르더라도 휙휙 읽는 편인데 대체로 철학 서적은 한 줄 한 줄이 과학에서의 실험처럼 고도의 사고과정을 거치는 문장이다. 마구 넘기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도 대충 읽어넘겨서는 논지를 놓치기 쉬웠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이미 절반정도 읽은 것을 다시 보는 것이라 더욱 문장들이 잘 잡혔다. 그러면서 책에서 사용된 고급어휘들도 빼곡하게 단어장에 채우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도 언제고 설명하는 것이지만 특히 영어과목은 지금처럼 공부하기 쉽고 재미있는 때가 없다. 유튜브만 가도 “제발 내 수업을 좀 들어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수두룩. BBC와 뉴욕타임즈 등을 실시간으로 읽으면서 바로바로 번역기를 돌려도 된다. 그러다보니 영어에도 재미가 붙었다. 단어 하나에 예문 예닐곱개를 들으면서 예문에 나온 단어를 찾고 또 찾아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어제는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부터 자정까지 쉬지 않고 책을 봤다. 물론 중간중간 농땡이를 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몰입감 있게 공부한 게, 참 오랜만이지. 오늘 출근해서도 한참 책을 보다가 좀 머리를 식히려고 한 짓이 3학년 EBS교재 수업준비다. 영어 공부가 그나마 한가하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정말이지 열심이다.


 그러다보나 큰일인게, 교사들 직업병이지만 목 디스크가 살짝 도진듯하다. 뒷골이 아프다. 그리고 어젠 오랜만에 오래 앉아있어서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적응할 문제고. 더 큰 문제는 글 쓸 시간이 좀 줄지 않을까싶다. 쓸 글도 많은데 말이다. 이 책을 보면 끝이 나는 것도 아닌게, 읽어야 할 책은 늘 쌓여있다. 언제쯤 퓽 하고 현이 끊어질지는 모를 일지만 말이다.


 그래도...그러나. 그런 것보다. 어쨌든. 차암 공부엔 끝도 없지. 이 한국 교육의 자본종속에 더 큰 균열을 내고, 인적자원이 아닌 참된 자유인을 만드는 교육담론을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가뭇 없이 신난 이 철부지를 어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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