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것은 수업 이야기는 아니다.
"자 그럼 이어서 제 2회 도라에몽 그리기 대회."
"와와 빨리빨리."
"잠깐만...지우고. 시작."
모니터 속 하얀 화면을 어지러이 물들인 낙서를 한번에 지워 나는 새로이 흰 여백을 아이들에게 띄웠다. 그리고 마우스를 가지고 가 적당히 여섯개의 칸으로 나누는 선을 슥슥 그었다.
"야...온유 잘하네."
"으하하. 제가 도라에몽 전문가입니다."
"샘 저는요!"
"음...도라에몽 안같아..."
아이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마우스로 팔과 다리, 몸통을 한번에 그리고는 동그란 머리에 수염과 눈을 그린다. 꽤나 그럴듯한 실력의 아이가 있고 독특한 미적감각을 뽑내는 아이도 있다. 핑크색 두꺼운 선으로 영 도라에몽 같지 않은 형상을 그렸다.
"다음 시간에도 샘이 들어오세요?"
"내가 꿀잼인 걸 알아차렸구나. 그러나 다음 시간은 담임샘이 오십니다."
"아 쌤 자꾸 누가 제 그림에 낙서해요."
"야야 싸우지 말고. 근데 현지가 인싸구나. 그림 방해하는 절친도 있으시고."
"아닌데요오."
창의적인 현지의 그림에 자꾸 누군가가 어지러운 선을 덧그린다. 나는 곧 대회를 마치고 우승자를 가렸다. 그리고나서는 세번째 대회를 생각한다. 단발머리 정준하 그리기 대회. 재미나게 또 아이들이 그릴 테지.
아이들과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공간은 그러나 네모난 교실이 아니라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의 학급 대화방이다. 매주 네 시간이나 배정되어 있는 창의적 체험활동인데 코로나 덕분에 아이들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교과 담당이자 부담임 행세를 하고 있다. 낙서로 시작된 그림대회로 나는 오늘 비로소 처음으로,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성과 성품을 살짝 엿본다. 그러니까 이것은 수업이 아니라 관계의 이야기. 아이들과 나의 만남의 이야기.
본래부터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아이들이 지루해하기 마련인 창체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려니 어려움이 많다. 게다가 고작 개학 2주차다. 1학년들에게 뭔가 다양하게 활동을 시키기도 어렵다. 2학년은 지금 각자 동아리를 구성하고 1학년을 모집하려 바쁜 철이지만 진로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등학교 창의적체험활동이 내신과 생기부에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물색 없는 새내기들로선 그저 얌전히 학교의 안내에 따를 수 밖에.
그래 오늘은 아이들에게 "영상을 보고 개인별 프로젝트 고안하세요"라고 안내문을 띄워두고 논문을 한편 읽고 있는데 거기에 누군가가 하트를 여러 개 그려놨다. 줌에서 제공하는 그리기 기능이다. 수업 화면을 띄워놓으면 아무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나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마우스를 잡고 펭수 얼굴을 화면에 그렸다. 이내 여럿의 낙서로 화면이 어지러워진다. 내 펭수 그림에 누군가가 몸통을 그리더니, 잠시 후엔 누군가가 옷을 입힌다. 마이크로 작게, 웃음이 번진다.
교육 영상을 다 보고 나서 자습을 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마이크 소리를 일제히 껐다. 역시 줌에서 제공하는 회의 주관자의 권한이다. 그러고는 어지러워진 화면을 한번 정리하고 나는 채팅창에 이렇게 썼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본데...제 1회 짱구 그리기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ㅋㅋㅋ"
"잠깐만...메모장을 띄우고...자. 시작."
다른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열 몇개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번진다. 모든 아이들이 웹캠이나 노트북을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럿이 화면에 얼굴을 내어놓고 하루 종일 수업을 집중한다. 온라인 개학에 맞추어서 난 여러 수업 준비를 해두었는데 그게 또 아이들이 열심히 하다보니 50분 수업 내내 내가 설명을 하고 대화를 나누어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니 이렇게 아이들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2주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느라 어색한 표정들,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급우들과 모니터를 통해 소통하면서 어쩔 줄 모르던 표정들. 영상을 다 보고 남는 시간에 그림 그리기 놀이 하나에 이렇게 왁자지껄 즐거워한다. 나는 논문과 화면을 오가며 아이들과 채팅을 나누다가, 이내 초조함을 벗어던지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샘 누가 제 이름 따라해요."
저마다의 학번과 이름으로 대화명을 통일시켜놨는데, 누가 다른 친구의 이름을 똑같이 써서 들어온 모양. 줌의 헛점이다.
"어 이거 줌에서 이름 자기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어서 다 이름 똑같이 만들면 25명 분신술 가능해."
나의 대꾸에 채팅창에 어지러이 터지는 웃음, 그리고 각자 화면에서 신이 난 아이들.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내 못난 얼굴을 꽃다운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보여주는 것도 민폐구나 싶지만, 피둥피둥한 큰바위 얼굴이라도 화면에 띄우고 함빡 웃어야 아이들이 안심하겠지. 특히나 이렇게 즐거울 때에는 말이다.
온라인 수업에 지친 아이들과 비로소 관계를 맺는 행복한 시간. 모두에게 도전이고 새로운 시작인 계절에도 이런 다가섬이 서로에게 있어서 다행이다. 시작은 항상 즐겁고 새로워야 할 나이 열일곱인 아이들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모든 장난끼며 엉뚱함을 마음껏 뽐내서 아이들과 행복한 온라인 교실을 만들기로 했다. 온라인 개학이 나에겐 그래서 굉장히 소중한 선물이다. 하마터면, 이 어여쁜 아이들을 한참 뒤에나 만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