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부를 잘 쓰는 교사의 조건(하)

아동의 자발성의 일반화 규칙을 찾아보기(4) 숙의, 내면화, 보상체계

by 공존

당연한 이야기들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좋은 생기부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작성해줘라." 맞는 말, 옳은 말입니다. 동시에,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아이들은 공부해야 한다." 맞는 말, 옳은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현실에서 제대로, 뜻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발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자발성이 발현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해서 문제를 제거해야 할 테지요. 모든 일은 이유가 있습니다. 등이 간지럽다면 뾰루지가 났거나 모기가 물고 간 것이고, 집안에 날파리가 많다면 제때 처리 못한 쓰레기가 베란다든 현관에든 쌓여있다는 것이죠. 이유를 따지지 못하는 습관 혹은 태도는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충분히 깊이 성찰하고 사고하여 쟁점을 발견하고 타협점을 찾아나가야겠지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당연한 일이 뉴턴의 우주 속에서 만유인력의 아이디어로 다시 태어났던 것처럼요.


그럼 아이들의 학습 자발성엔 어떤 쟁점들이 있을까요? 몇가지 대표적인 것들을 뽑아보겠습니다. 실제론 훨씬더 많은 것들이 작용하지만요.


1. 하고 싶은 공부 VS 해야 하는 공부


아이가 성장하면서 축적하게 되는 경험은 모두 다릅니다. 아주 많은 요소가, 우연과 운이 합쳐져 상호작용한 결과죠. 자신이 발견한 흥미와 욕구를 해결해나가며 어른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차 많은 책, 영상, 그림 등을 보며 인지를 확장해나갑니다. 진심 반 장난 반으로 아이들 돌잔치에서 부모님들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집어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학령기가 되기 전까진 대체로 아이들의 흥미와 욕구를 따라가며 자발성을 키우는데 집중합니다. 그 시기에 아이들은 양육자가 제공하는 경험의 질료들과 풍성하게 만나게 됩니다. 춤, 그림, 노래, 자동차, 뭐든지요.


그러나 아이가 한글을 마스터하면 그 다음부턴 부모님들이 바라는 공부를, 부모님들이 바라는 만큼 공부할 것을 요구받게 되지요. 이때까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쌓인 다채로운 경험은 싸그리 학력 줄세우기와 함께 획일화됩니다. 친구네 아이는 학원 다섯개를 버틴대, 언니네 아이는 벌써 도형 들어갔대 등등. 걸음걸이가 늦었다거나 말문이 늦게 트이기 시작했다거나 하는 것처럼 발육단계에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다양한 성장의 차이가 “못난”, “뒤쳐지는”것으로 인식되게 되죠.


그럼 그냥 더딘 성장을 인정하면 끝나느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12년의 학력경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받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아이의 동기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혹은 그 전에 학원에서 유치원에서 우등생으로 인정받는 것은 이어질 12년의 학력경쟁에서 남들보다 앞선 출발선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역량에 달렸죠. 아이의 자발성과 개별차를 압도하는 부모의 환경조성, 사교육비, 선행학습의 결과물이니까요.


경쟁은 현실이고 미취학 아동의 조기교육이 아동의 성장 자체를 저해한다는 근거는 빈약하므로 이런 개인들의 노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학력경쟁에서 앞섬으로써 아이가 얻는 기쁨과 즐거움 또한 자발성의 매개가 된다는 점도 명확합니다. 그러나 한계가 많은 방식이죠. 선행학습은 선두그룹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겐 대단히 부정적인 효과만을 남깁니다. 자기 성장 단계에 맞지 않는 지식을 고통스럽게 삼켰는데 자기보다 뛰어난 아이들만이 인정받는 환경을 마주하게 되고, 1등 효과도 누리지 못하고 승부욕과 경쟁심리를 키우지도 못하고 내내 상실감을 맛보게 됩니다. 억지로 억지로 따라가보지만 12년을 참고 견뎌봐야 인서울의 문은 좁습니다. 입시생 열명 중 하나만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니까요.


그러니, 학력경쟁은 아이들에게 고통이지만 부모님들에게는 그 이상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경쟁은 시작되었고 우리 아이가 뒤쳐지는 것이 눈에 선한데. 아이가 잘하는 것을 미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밀어줘야 하나 아니면 안정적인 길을 걷도록 할까. 아이가 하고픈 공부가 우선일까 아니면 해야할 공부를 시킬까.


2. 택할 수 있는 교육여건의 한계 VS 현실적인 대책


아이의 자발적인 성장을 격려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아이가 보이는 흥미가 설령 오랜 시간 유지되고 그것이 배움으로 전환된다고 해도, 그것을 지속해나갈 교육자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테면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아이나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겠죠. 전자는 교육자원이 일부 지역에만 있거나 비용이 많이 들고, 후자는 그것을 배워나갈 교육과정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아이의 자발성을 키워줄래야 키워줄 수가 없는 경우가 많죠. 경제적인 이유도 한몫할 것이구요. 그 밖에도...키는 작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않지만 밤낮으로 운동만 하며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처럼, 아이 본인의 적성과 흥미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교육의 목적으로 자아성취만큼이나 사회적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발적으로 평생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에서 쓸모가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한국같은 학력중심사회, 지식정보산업사회에서는 지식의 고도화, 정교화에 따라서 부가가치가 발생되는만큼 아이가 자발적으로 구축한 지식체계가 사회적 효용이 떨어질 경우 그 상실감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자발성만을 강조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가 크겠지요.


TV 프로그램에서 이따금 특정 분야의 영재들을 소개해주고, 그 아이들이 발휘하는 천재성을 키워줄 전문가를 소개시켜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만 그것을 모든 아이들의 자발적인 배움의 과정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성장 단계를 뛰어넘는 큰 가치를 지닌 아이들의 경우인 것이고, 그런 영재들이 아니어도 모든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적정한 수준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육의 수월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도모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아이가 원하는 공부가 정말로 현실적인 효용이 크지 못하거나, 적절한 교육자원이 지역에 없거나, 비용이 지나치게 들거나, 아예 그를 위한 교육과정이 없다면 당연히 양육을 담당하는 부모님들께선 아이의 관심분야를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아이의 상실감이 클 수도 있을 것이지만, 현실적인 대책으로서 학교 교육을 강조하여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나가면서 천천히 적성을 찾고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부모님들로선 당연히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풍부한 재력만 있으면 이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고 산다는 점이고, 이것이 교육의 대물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이지요.


3. 공부해서 어디에 써? VS 일단 대학부터 가야지


선행학습과 조기교육의 욕망과 싸워가면서, 아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뜯어말리고 현실적인 미래계획을 설득해서 아이를 책상 앞에 앉히거나, 책을 읽도록 하는데 성공한다고 한들, 진정한 고민은 이제 시작입니다. 아이들이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교과의 지식들을 탐구해나가야 하고, 그것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고민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니까요. 아무리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아이들이 이해를 하고 타협을 한다고 해도, 자기가 원하지 않는 형식의 이런 공부에 호감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아이는 이내 묻게 될 것입니다. “이거 공부래서 어디에 써?” 오래된 질문이죠. “일단 대학부터 가야지.” 역시, 오래된 답변일 것이고요.


배움의 목표를 자아성취에 두든, 사회적응에 두든 그것이 달성되는 것은 아이들에겐 한 없이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미래의 행복이 현재의 불행의 보상이 되진 못하지요. 왜 공부를 해야 할까요? 목적 없는 공부는 아이들을 예정된 미래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요? 대학을 기준으로 하면 인서울은 고작 10%의 아이들이 갈까말까합니다. 초중등교육 12년의 자원 투여에 비해서 성공률이 썩 좋은 게임은 아니죠. 부모님들의 고민을 더욱 키우는 것은, 공부를 흉내내기는 너무나 쉽다는 점입니다. 생기부를 열심히 써주는 척 흉내를 내는 것이 너무 쉬운 것처럼요.


잠깐 생기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자. 어차피 대학은 결과물만 놓고 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교사와 학생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배움의 성과를 일구어냈는지는 알 수가 없죠. 그럼 수업을 주관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셀프기재, 없는 말 지어내기, 멘트 돌려막기 등으로 누가 봐도 썩 괜찮은 생기부를 휘다닥 써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 두번은 대학마저 속아넘어갑니다. 몇번 속아넘어간 뒤엔 자기들이 누적한 데이터와 비교하면서 잡아낼 순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학교 당국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속일 수 있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배움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부모님들을 속이며 공부하는 척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 아니요, 실제로 흔히 보이는 일이죠. 우리 평생 영어 배우고도 한마디도 못하잖아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학원, 책상을 빙빙 돌면서 시험 준비만 딱딱 하고 나면 그 시간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지 딴 생각을 하는지 알 게 뭘까요. 초등학교 때까진 아이들의 철없는 태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학교 때쯤 되면 그런 관성에 완전히 젖고, 뒤늦게 고등학교가 되어서 스스로 대학에 가지 않고는 대접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공부를 시작하려 해도 고치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발성은 커녕 부모님과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성장 없이 성장단계를 밟아오르죠. 부모님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아이에게 설득할 순 있지만,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보상, 그리고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 그리고 공부를 하는 즐거움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것은 잘못된 투자, 그것도 과잉투자에 그치고 말겠죠.


내면화와 보상체계, 그리고 숙의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공부의 억압에도 이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쟁점이 있습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는 당연히 누구에게라도 좋죠.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것에는 합리적인 딜레마들이 존재하구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런 쟁점들을 보고 어떤 시사점을 뽑아내볼 수 있을까요?


생기부 기재와 공부처럼 "자발성"을 가장 핵심으로 하는 영역에서는 가치와 목표의 내면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실제로 교육정책도 이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혁신교육이 도입된 이래로 학교의 가치관을 모든 구성원이 내면화할 수 있도록, "학교 비전 세우기"라는 활동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우리 학교의 모습, 우리 학교의 인재상, 우리 학교의 핵심 교육사업 등을 논의하고 그것을 실제로 학교 교육 계획서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학교 구성원들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는 학교들, 그리고 좋은 학교장 리더십이 존재하는 학교들에선 학교 비전을 세우고 교육계획을 같이 논의하는 것이 실제로 학교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교사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공부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것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중요한 것은 "어떻게"하느냐가 될 것입니다. 조금 뒤에 같이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보상체계 역시 중요합니다. 어지간한 교사의 자발성 이끌어내기도 여기서는 탁 막혀버리고 맙니다. 마땅한 보상체계가 없습니다. 성과급, 당연히 소용 없구요. 승진, 너무 먼 일이거나 교육적이지 못한 목표입니다. 교육적이지 못한 보상체계가 교사의 자발성의 댓가로 교육적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이쪽은 아이들 쪽의 사정이 조금 낫네요. 아이들의 자발성을 위한 다양한 보상체계가 존재합니다. 우등생이라는 지위, 그 지위를 얻음으로써 부여되는 상당한 혜택, 주변 어른들의 칭찬과 용돈, 시험을 잘 봤을 때의 보상 등등. 달콤한 캔디가 아이들의 교육의 길에 늘어서 있습니다. 단, 그 모든 보상은 한정된 아이들만이 얻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죠. 승자독식입니다. 교육경쟁의 패배자에게 보상은 가혹할 따름입니다. 이런. 교사들에 비해서 그리 사정이 나은 것도 아니군요.


자 그러니까 생기부를 내실있게 쓰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우리에게 "당위성"으로서만 존재하고, 그를 위한 보상체계는 불투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명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네요. 이걸 정말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어려운 과제를 굳이 해야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아이들의 학습의 자발성도 그리고 생기부를 내실있게 작성하는 것도 모두 "함부로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라는 해답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쟁점들이 토론과 대화 없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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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고민을 하지 않아도 생기부는 쓰여지고 아이들은 대학에 갑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월급은 나올 거예요. 같이 고민을 하지 않아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숙제를 시키고, 어떻게든 키워서 대학에는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될지는 열심히 기도를 하시거나, 운에 맡겨야겠지요. 오랜 시간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를 겪었고, 교육에 있어서도 대량산업사회의 수요에 맞춰서 인재를 육성해 온 우리의 교육환경에서 대화, 숙의, 성찰, 협의는 너무 먼 이야기이니까요.


자 그러니까 당위는, 아이들이 공부를 해야하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교사들이 생기부를 개별화해서 모두 쓰는 것에만 있지도 않지요. 우리가 진정 당위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견해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 노력하며,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품게 되는 고민이나 현실적 한계들을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보호자에 대한 진실된 신뢰를 품고, 납득하기 어려운 바람이라도 따르려고 노력을 합니다. 어른들의 인내에 비해서 아이들의 인내가 짧은 것도 아니지요. 왜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인내심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할까요? 어째서 어른 되면 안다거나, 일단 대학에 가고서 하고픈대로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이들에게 공부라는 당위를 납득시키기 위한 노력만큼, 우리 스스로 대화라는 당위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고민할 순 없을까요?


일상의 대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평생의 대화, 그리고 공부라는 숙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하나 둘 어이가는 고민들이 실제로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의사소통역량이라는 것도 명확히 존재하는 지적요소입니다. 부모님이 직접 아이의 중요한 미래역량 하나를 길러주는 셈이겠네요. 그리고 학령기 이후에도 직접 아이의 성장단계를 감각하며, 적절한 언어적 자극을 주는 것도 부모님과 자녀 양쪽에게 의미있는 배움의 과정입니다. 결정적으로, 위에서 살핀 쟁점들, 그리고 가정에서 발견되는 다른 쟁점들을 하나 하나 풀어가는 것은, 서로간의 긴밀한 대화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답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모두가 힘겨운 줄다리기 속에서 그저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낼 뿐일 테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스스로, 그리고 부모님들이 스스로 찾아낸 중간지점이 아니라면 그것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공부는 책에만 있지 않습니다. 답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는 연습을 충분히 시켜야 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앞에 놓여진 질문들의 해답부터 하나 둘, 해결해 나가야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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