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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n 25. 2020

장마철 첫날의 파전은 천하무적이지?

그러나 막걸리는 먹지 못했고

 냉장고를 뒤져보아도 딱히 마음에 드는 재료들은 나오지 않았다. 파전을 하기로 결정을 한 참이고, 지난주에 한단 사서 다듬어놓은 대파를 쓰기로 했다. 낙지도 좋고 굴도 좋을 텐데 냉동실에 달랑 바지락 살 뿐. 하 참, 그러고보니 해물을 장을 봐 온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구나. 퇴근길에 시장이 딱 있긴 한데 정차를 하기에 너무 복잡한 도로고 해서 뭘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분명히...냉동실에 굴이 한봉다리 있었는데, 언제 다 먹었지?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고 냉동실을 조금 더 후벼봤다. 흰다리새우가 나왔다. 이것도 언제 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두 팩을 샀었는데 한 팩은 지난번에 멘보샤 만들 때 썼다. 남은 한 팩. 반을 꺼내 씻어서 해동시키고 반 남은 것은 두겹으로 비닐에 싸서 다시 냉동실로. 바깥양반이 미용실에 들러서 염색을 하고 온다고 하는데, 두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출출해서 쥐포를 하나 굽고, 씨리얼바를 하나 먹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다. 뒷베란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에게 공간을 터준다. 


-얼마나 더 걸려? 배고픈데

-이제 가요

-응 그럼 이제 준비할게


 기다리던 소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해동된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벌써 한시간도 더 되었으니 바지락살도 흰다리새우도 맞춤하게 녹아있다. 새우들부터 손질한다. 껍질을 벗기고 머리쪽 살을 짜낸다. 싱크대에 버려놓으려다가 생각을 하니 조금 아깝다. 팬에 올려서 기름을 조금 내면 괜찮겠다 싶다. 기름을 두르고 벗겨낸 껍질들을 올려둔다. 바깥양반이 도착하면 그때 불을 켜야지. 


 어릴 땐 아무 생각없이 새우 내장에 느껴지는 특유의 식감을 참고 먹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손질하는 수고가 충분히 보상이 되어준다고 느껴질정도로 필수적인 공정이다. 하나 하나 칼로 내장을 도려서 빼낸다. 이정도는 쉽지. 그런데, 쉬운 공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나보다. 바깥양반이 벌써 집에 도착했다.


"아우 다 젖었어. 차가 옆에서 지나가다가 물 튀겨서."

"ㅋㅋㅋ고생했네 얼른 옷 갈아입어."


 인덕션을 켰다. 기분좋은 풍미와 함께 새우가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젓가락을 꺼내 두어번 휘적이면서, 파를 먹기 좋게 다듬었다. 홍고추가 있으면 좋으련만, 고명으로 올라가는 음식이라, 아직 두명 살림에는 홍고추가 살뜰하게 소모되지 않아 잘 사지 않는다. 영 볼품이 없을 것 같지만 맛이 좋은 것이 최고지. 파를 구울 차례. 구워진 새우껍질은 작은 접시에 빼낸다. 이번엔 파를 두어번 뒤집으면서 바지락과 새우 다짐 위에 메밀가루와 부침가루를 적당히 붓는다. 계란도 하나 까 넣어야지. 메밀가루는 부침가루처럼 간이 되어 있지 않아서 싱겁지만, 바깥양반이 요즘 저염식 얘기를 자주한다. 편식이나 고칠 것이지 저염식 타령이람. 어찌되었든, 싱건싱건한 해물파전이 될 것이고, 아마도 그 주인은 요 대파가 될 테다.

 고추는 잘 쓰지 않지만, 파는 정말이지 쓸 데가 많다. 짜파게티에 미리 볶아서 넣어도 좋고, 돼지고기 약간이랑 굴소스와 함께 볶음밥을 만들면 다른 재료도 그리 필요하지 않다. 김치찌개에도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도...장을 보는 수고 없이도 해물파전이라는, 장마철 첫날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 수도 있지. 그 파가 고루고루 잘 익어서 숨도 죽고 적당히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반죽을 올릴 차례다. 


 늘 보는 거지만 메밀의 색이 티티하다. 김치전에 섞어넣을 땐 괜찮은데 흰 전을 할 땐 밀가루의 노릇한 색감을 상당히 해친다. 회색 반죽. 거기에 새우에서 짜낸 머리육수까지 있으니 반죽색이 고울 리가 없다. 노릇노릇하긴 커녕, 티티한 색이 딱 흐린 하늘 빛이다. 바깥양반이 싫어하는. 그러나 나는 비 오는 날을 워낙 좋아하고, 그래서 이런 탁한 색이 나쁘지 않다. 배추전이 딱인 예쁜 색이다. 생각이 떠오르니 배추전이 먹고 싶지만, 사먹는 게 경제적이리라. 후라이팬을 흔들어서 파전이 잘 떨어지도록 한 뒤에, 늘 그렇듯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들어올린다.


"과연?"

"아 나는 이게 진짜 아무리 해도 어려워."


 심호흡. 착. 성공이다.


"오오오."

"아.하.하."


 대학생 때였나, 행사 때 파전을 굽다가 360도를 회전시켜서 원래 구워지던 면이 다시 아래로 가게 공중제비를 돌린 적이 있다. 고명이나 속재료를 많이 쓰는 터라 부침개가 항상 얇지 않고 두껍고, 게다가 메밀가루를 섞는 식으로 해서 찰기도 조금 부족하기 때문에 뒤집개를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게 참 어렵고 싫은 일인데, 그래도 부침개는 맛있고 결정적으로 바깥양반의 편식을 견제할 수단이니 부침개를 만들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대체 왜, 생 김치는 안먹고, 찌개나 볶음으로만 먹는데다가, 김치전을 만들면 신나하는 걸까. 그래도 지난 주말에 만든 부침개는 두장 다 잘 뒤집어졌다. 늘 긴장되지만.


"오빠 있잖아- !@#$%^&*(조잘조잘)"

"바깥양반...하나도 안들려."


 식탁에 잠깐 나와 앉아있던 바깥양반은 다시 침실로 들어가서 직장에서 있던 속상한 일이 뭐가 떠올랐는데 쉴 틈 없이 입을 놀린다. 들릴리가. 지금 집중해서 부침개 하고 있는데. 아 그런데 마침 식용유도 떨어졌네. 아까 새우기름을 낸 것이 마지막이다. 두번째 장은 올리브유로 굽게 생겼네. 아무렴 어때. 지글지글 익어가는 부침개를 바라보며 짬짬이 설거지를 한다. 


"막걸리 없지?"

"응."

"아 냉장고에 유통기한 지난 거 있던데."

"먹지마! 무슨 소리야 유통기한 지난 건 빨랑 빨랑 치우지 않고."

"...나만 하냐?"

"차라리 맥주 먹어."

"하나 꺼내줘. 다 됐어."

"잠깐만. (달칵) 수~고~했~어~ 오늘도~"


 바깥양반이 퇴근X이라는 맥주를 하나 꺼내왔다. 그래. 배고픈 거 참느라, 새우 손질하느라, 그리고 이런 저런 일들로, 수고했다. 그러나 역시 이 장마철 첫 날엔 해물파전이 최고지. 수고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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