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커뮤니케이션(완)
언어는 지식습득을 매개합니다. 그리고 언어작용의 양과 질은 학습효과를 좌우합니다. 학습자, 아동은 내면커뮤니케이션부터 그룹커뮤니케이션, 국가/문화간 커뮤니케이션까지 다양한 언어작용을 경험하며 인지체계를 성숙해 나갑니다.
그러한 언어작용은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네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정보" 혹은 "지식"의 형태로 우리가 습득하는 언어자극이 학습자의 인지구조화의 핵심입니다. 배운 것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거나, 엄마 아빠에게 설명을 하거나, 생각한 것을 그림을 그려보는 등, 아동은 성장단계에서 네가지 언어기능을 두루 키워나가며 지식을 습득하다가, 학령기에 접어들어 읽기에 편중하여 언어능력을 강화할 필요성에 직면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교육열이죠. 학생들은 경쟁에 직면해 서로 누가 더 많이 읽고 외울 수 있는지를 경쟁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네가지 언어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지, 그 의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다시 읽기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습 목표와 발달단계의 결절, 그리고 해결책
예를 들어 삼각함수를 배울 시기가 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수학의 걸림돌 중 하나지요. 사인 코사인 탄젠트, 이해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 이게 그 용어와 개념이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니 아동은 단순한 암기로 받아들입니다. 학습목표와 아이의 학습발달 단계에 결절이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수학포기자가 되어서 학력경쟁에서 조기 탈락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시겠죠? 이런 경우에 학부모가 채택하는 전략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1) 아이가 수학을 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여러 보상을 준다
(2) 아이가 수학을 하도록 강제력을 부과한다. 사교육, 강한 훈육 등.
(3) 아이가 수학을 하도록 아이에게 호소한다.
당연히 두번쨰 전략이 가장 선호됩니다. 학부모님들의 입장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가족의 미래가 걸린 필수이기 때문에 (1)번, 보상 전략을 채택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3)번, 호소 전략의 경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죠.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학령기 아동은 자기의 성장 발달 단계와 맞지 않은 지나치게 많은 학습량을 부여받습니다. 대부분은 자연 발달 단계로서는 그 학습량을 소화하지 못하고, 부모는 그에 대하여 사교육과 훈육을 강제력을 행사하죠.
학령기 초기부터 이런 강제력이 발생하니 당연히 아이의 학습 자발성은 소실됩니다. (1)번과 (3)번 전략이 더 좋지만 학부모들이 갖는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채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12년의 초중등교육과정은 너무 길지요. 맞벌이와 야근을 아무리 해도 아이의 사교육비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다른 탈출구도 없습니다. 학력경쟁 초기에 아이의 자발성을 육성하지 못했으니 머리가 굵어지면 더욱 어렵죠. 그나마 참한 마음씨를 함양할 수 있는 부모님들이시라면 아이가 부모님의 노고를 깨우치고 스스로 공부를 하기는 합니다만, 그런 요행도 아무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봐야 고작 스무명에 한명꼴로 서울 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구조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학습능력만은 반드시 향상시켜야 합니다. 같은 사교육을 받더라도 누구는 집에 와서 서너시간을 더 공부를 하는 아이가 있고, 폰을 쥐고 몇시간 동안 "페메"만 하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사교육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가 가하는 강제력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가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도 영 소득이 없는 아이가 분명히 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는 아이가 스스로 공부를 하든, 부모가 설정한 강제력에 따라서 하든간에, 어떻게 하면 높은 지적능력을 갖출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높은 지적능력을 지닌 아이는 더 이상 사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단계가 언젠가는 오니까요. 결국 높은 지적 능력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 만들기"의 핵심입니다.
다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으로 돌아가시죠.
아이와 언어의 "관계" : 취학 이전과 취학 이후
우리는 언어를 왜, 어떻게 습득할까요? 생존을 위해서죠. 인간은 우리 가족과 사회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하여 아이를 낳고 양육하고 교육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생존을 위하여 언어와 지식을 습득합니다. 아이에게, 아동에게 언어와 학습은 곧 생존 그 자체입니다. 이 시기의 아동은 모든 외부의 자극을 모두 흥미롭게 바라보죠. 왜일까요? 첫번째 이유는 당연히 자신의 생존에 직결된 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아동이 자극과의 관계맺음, 즉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모든 사물과 커뮤니케이션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지 발달의 과정입니다. 루소는 이걸 굉장히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아이가 불을 만져보고 뜨겁다는 걸 스스로 느껴보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이건 뜨거워, 만지지마." 이렇게 개입을 한다면 아이가 사물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을 막고, 아이의 자극-판단-지식 형성을 방해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극단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아동의 자극과 경험의 관계는 이견 없는 교육학적 진실입니다. 그때문에 최근에는 캠핑, 촉감놀이 등 신체발달에 맞는 자극을 풍부하게 주는 교육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죠. 그런데 이 자극과 아동의 관계맺음에는 또 한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고"입니다.
아이가 불 가까이에 손을 대 보고 뜨겁다는 것을 느낀 다음에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들의 경우라면 다시는 절대로 불에 가까이 가지 않겠죠. 우리 인간은 지성이 있는 터라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밝은 불빛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기에 나뭇잎을 넣어보면 나뭇잎이 타는 것을 알게 되고, 나뭇가지를 넣어서 불을 옮겨붙게 한 다음에, 그것을 들고 땅바닥에 글씨를 쓰죠. 사고의 작용을 통해 자극이 더 많은 경험으로, 더 많은 경험이 더 많은 자극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루소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교육학자 듀이는 바로 이 사고 작용이 교육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고 작용의 부재가 우리 교육에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다시 삼각함수로 돌아가볼까요. 아이는 처음 불을 발견했을 때처럼, 삼각함수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단 앗뜨거! 하겠죠? 충분한 시간, 적절한 연결고리(나뭇잎과 나뭇가지 같은)가 있다면 삼각함수와 천천히 관계를 맺어가며, 사고 작용을 통해 차츰 차츰 경험과 자극의 순환고리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삼각함수 말고도 공부할 것이 너무나 많고, 대부분의 학습과제는 아이에게 "사고"의 틈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다른 아이는 벌써 뭘 끝냈고 뭘 끝냈고...우리 아이도 일단 학습량을 높여야 하죠. 그렇게 아이의 공부자극은 관계와 사고 없이 소모됩니다.
그것이 언어 자극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아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글을 평생 읽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은, 아이와 적절히 관계맺음을 하지도 못하고, 아이의 사고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자극으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다 읽었어? 문제 풀었어? 다음 책 읽자." 이것이 아이들이 경험하는 언어자극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아이의 언어에 대한 관점을 심각하게 왜곡합니다.
아이는 언어를 왜 습득할까요? 아이에게 언어란 무엇일까요? 생존이고 삶의 핵심 매체죠. 아이는 학령기 이전까지의 평생 동안 언어를 생존을 위한 관계맺음의 도구로 인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글을 떼자마자 언어가 아이와 갖는 관계가 사라져버립니다. 무언가를 읽었는데, 그에 대해 충분히 사고를 하기도 전에 다른 걸 읽어야 해요. 그리고 또 읽고, 읽고, 읽은 다음에 외웠냐고 따져묻죠. 아이가 스스로 사고를 하고 자극과 경험을 만들 틈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언어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언어를 통해 타인과 관계하는 경험도 왜곡됩니다. 공부억압으로 인해 아이에게 언어가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으니, 이제는 언어를 통해 타인과 관계하는 감각을 잃는 것이죠. 아이가 담임선생님에게 조잘조잘 떠들지 않게 되고, 교실에서 침묵하고, 손을 들지 않게 되는, 우리가 늘 바라보던 익숙한 교실로 돌아가는 현상에는 이와 같은 언어와 관계의 이중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사고 +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이중언어 아동이 높은 지적능력을 조기에 갖는 이유는, 아이의 언어자극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두배나 많이 주어지기 때문이죠. 아이는 두 언어 사이를 사고하며, 두 자극을 비교하고,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싹틔워갑니다. 언어와의 관계, 언어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의 의미가 변질되지 않고 자란 아동은, <굿모닝 베트남> 속 크로나워처럼 더욱 더 많은 언어 자극과 경험을 만들어내죠.
그래서 높은 지적 능력을 위하여 풍성한 언어자극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언어가 갖는 의미(특히, 아직 생존에 크게 기여하는 학령기에)를 부모님들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관계를 해칠 수 있는 모든 부정적 언어자극은 아동의 성장을 저해합니다. 관계가 곧 언어고, 언어가 곧 관계인데, 관계가 망가진 상태에서는 언어 소통이 함께 망가지고, 그것은 아이의 지식 습득을 방해하게 되겠지요.
"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네가지 언어기능임을 알고, 이를 촉진하고 풍성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네가지를 왕성히 하라고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니,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관계성 역시 하나의 역량입니다.
표에 보셨죠? 자. 관계성이 높은 아이는 장벽이 없습니다. 싫고 좋은 구분 없이 폭넓게 외부 자극을 경험으로 치환하고, 충분히 사고를 할 여유를 얻습니다. 또한 좋은 언어능력으로 관계성을 함양하면 그 자체로 학습에 기여하는데, 한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학습과제와의 관계죠.
관계와 학습
좋은 관계성을 지닌 아이는 학습과제 자체에 공감을 하고 친숙함을 느낍니다. 역사 과목이 가장 명확한 사례죠. 관계성이 나쁜 학생들은 나와 민족, 국가와의 관계에 무관심해서 역사과목을 암기과목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러나 관계성이 좋으면 역사 과목은 곧 나의 이야기죠. 국어도 어학도, 심지어 수학과 과학도 그렇습니다. 모든 지식과 배움이란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관하다고 착각하는 학습자와 학부모가 있을 따름이죠.
좋은 학습자는 나와 학습과제와의 관계를 찾아내서 흥미를 갖고, 사고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확장되어, 학습과제에 내재한 관계망을 찾아냅니다. 르네상스가 유교의 유럽 전파로 인해 발생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유럽 문명에 미친 중국의 영향이 설마 그것 뿐일까요? 그보다 3,400여년 전 칭기즈칸이 유럽에 끼친 영향을 논하게 될 것이고, 종이의 전래, 활자의 전래, 정화 함대의 원정까지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단계가 아이의 자발성이 극대화되는, 우리 이야기의 종착역입니다. 이제 아이는 모든 학습과제를 자신과 연결시키고, 학습과제의 내부 관계망을 추적하며 무제한의 자극과 경험을 스스로 탐구합니다. 이 단계의 학습자의 언어 감각은 아동의 자발성, 호기심에 거의 근접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존에 연결되고, 세상의 구조와 연결되죠. 영재 아동은 이렇게 탄생됩니다. 어렵사리 다섯번째 꼭지에서, 글을 다시 반으로 나누지 않고 교육과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