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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06. 2020

학부모의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

 학부모의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은 교육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식을 의미하는 전문적 자본과 경제력, 경제적 자본과 함께 아이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학부모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봐야 하겠지요. 먼저 문화적 자본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구글에서 "문화적 자본"을 검색하시면 <문화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관계에 관한 연구 - 서울행정학회>라는 논문이 검색되네요.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 읽어보실만합니다.


 사회계급간의 불평등은 특정계급에게 경제적 자본의 소유가 편중되는 것에서 유발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근래에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사회계급간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의 불균등한 배분도 계급불평등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에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부르디외는 현대사회에서 사회계층이 어떻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지, 피지배계층이 어떻게 자신들의 지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설명을 문화에 관한 분석을 통해 제기하였다. 부르디외는 문화적 취향이 계급의 지표이며(Bourdieu,1995: 21), 계급간 문화적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조돈문, 2005: 4), 개인들은 무엇이좋고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견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술적 능력이나 고급예술취향은 문화자본을 풍부히 갖고 있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송영국, 2003: 124), 예술적 능력 내지 미적 취향은 문화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가족 안에서 시작하여 긴 가르침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보며, 인간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재산을 근거로 행해지기 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홍성만, 2004 재인용).


문화적 자본을 기를 수 있느냐 하면,

 사실 조금 절망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극단적으로 말해서 "길러서 갖출 수 있으면 문화적 자본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지."라는 입장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뉴요커의 문화자본을 배우거나 익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해서 부를 대물림하고자 하는 상위계층에게는 그들만이 공유하며 전수하는 고유한 습속이 있고, 그것은 대개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일상에서 향유하는 문화-언어, 교양, 생활수준-등을 통해 아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죠. 그리고 바로 그것이 교육의 불평등을 만든다는 요소라는 관점입니다. 높은 문화자본을 전수받은 아동은 이미 학교 생활에 적응할 준비를 마친 상태이고, 또래보다 높은 교양 수준으로 쉽게 학교 내부의 교육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문화적 자본은 명백하게 학력에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평등의 원인이라기보다는 학력격차를 정당화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인성과 교양이 우수한 학생이니 성적이 높은 것이 당연하다는 합의는 고민 없이 쉽게 이루어지지요.


 문화적 자본의 차이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 학력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고 다른 가정의 아이들도 높은 문화적 자본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숙제입니다만, 차별을 없애는 방법이 그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반드시 어디 명문가, 자녀를 모두 명문대에 입학시킨 가수 이적 씨의 어머님처럼 그런 분들이랑 똑같은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화적 자본의 중요성을 되새기면서 천천히 어떤 문화를 가정 내에 형성하여 아이와 나눌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어려운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그 전에 정리를 하자면,


(1) 실제로 상위층이 향유하는 문화자본은 일반적 가정이 극복될 수 없는 격차다. 극복될 수 있는 것은 문화적 자본이라고 부르지 않는 관점도 존재한다.


(2) 문화적 자본은 교육에 영향을 미치고 부의 격차가 학력의 격차로 드러나는 것을 합리화한다. 이 차별은 극복되어야 한다.


(3) 경제적, 문화적 상위층과 같은 수준의 문화자본을 목표로 하지는 않더라도, 일반 가정의 학부모로서 보다 나은 문화자본을 갖추도록 하는 노력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그럼 보실까요.


실천 가능한 일부터

 시중에 "~하는 엄마가 ~한다" 하는 식의 책들이 있지만 그런 책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서에서나 할법한 실천들이 "우리 아이의 교육을 위해!"라는 마음가짐으로 인하여 어느날 뚝딱 하고 내 몸에 습관처럼 달라붙을리는 없습니다. 극복하기 쉬우면 문화적 자본이라고 부르지 않으니까요. 넓게는 그런 습관화와 실천의 태도 역시 문화자본에 속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높은 문화적 자본을 기르자"라는 목표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또 문화적 자본이 필요한 셈입니다. 알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로 보입니다. 이런 고민을 안해도 되니 또 높은 문화적 자본을 가진 집이 새삼 부러워지네요.


 영화는 어떨까요? 아이 때문에 꽤 많이 영화를 보게 됩니다만 영화를 보고 리뷰를 읽거나 감상평을 남기는 사람이 제 주변에도 손에 꼽습니다. 습관이 되어있지 않고 필요나 효용이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런 점에서도 문화자본의 차이는 여실히 드러납니다. 영화는 대중문화의 총체죠. 없는 장르가 없고 없는 재미가 없습니다. 액션, 동화, 드라마, 반전 등등요. 아이와 대화를 나누기에도 정말 좋고요. 아이와 감상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될 정도가 그때부턴 같이 보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도 꽤나 괜찮은 문화적 자본 함양 방법입니다. 아이가 어려서 그럴 단계가 아니라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아이에게 문화적 자본을 전수해줄 때까지 시간이 아주 많다는 이야기니까요.


 괜찮은 영화의 경우 꽤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우리말큰사전 편찬 과정을 다룬 <말모이>라는 별로 성공은 하지 못한 영화가 있는데 내용이 워낙 뻔한데다가 신파까지 조금 있어서 영 입소문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화를 보고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우리말 큰사전에 실을 대표 단어(표준어)를 정하기 위해 팔도 사투리를 모두 비교해서 들어본 뒤에 절충점을 찾는 과정이 한글의 민주주의적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기도 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서고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한글 민주주의>란 책도 써서 읽어보았습니다. 아 근데 글쎄, 이 <한글 민주주의>가 또 꽤나 재밌는 책이지 뭡니까.


 물론 이런 과정도 제가 갖춘 문화적 자본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누구나 자기 몸에 익힐 수 있는 쉬운 활동이기도 합니다. 우선 해볼 노릇이죠. 그리고 영화의 정말 좋은 점은 아주 깊이 있는 텍스트와 아주 간단한 텍스트까지 모두 갖추어진 문화상품이니까요. 실천은, 가능한 일부터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요.


 문화적자본에서 상술한 부르디외는 사회적자본을 “상호간의 안면과 인식에 의하여 형성된 제도화된 관계의 연결망 또는 그 관계와 연계된 실질적 잠재적 자원”으로 보고 (Bourdieu, 1985: 248), 결혼이나 클럽을 활용하여 유용한 연계를 확보하는 재생산과정을 사회적자본의 핵심요소로 지적하였다. 이는 사람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자본이 일종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있음을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Bourdieu, 1986). 콜만은 “기능에 따라서 다양한 구조에 속한 개인으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Coleman, 1990: 302). 부르디외와 콜만은 신뢰를 사회적자본의 핵심으로 보았다(이규환・이상우, 2008: 209). 후쿠야마는 “사회 혹은 사회 일각에서 신뢰가 충만되면서 발생하는(지역사회의) 능력”이라고 보았고(Fukuyama, 1995: 26), 우스래너 역시 사회적자본이 주로 신뢰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Uslaner, 1999: 122). 푸트남 역시 행동을 조율하여 사회의 능률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신뢰, 규범 및 네트워크와 같은 사회적 조직의 특징을 사회적 자본으로 정의하였다(Putnam, 1995: 67).


아주 조금의 다른 상상력

 마지막에 밑줄 친 푸트남이 중요한 학자인데요, 바로 이 사회적 자본을 중심으로 괴애앵장한 저술을 해냈습니다.(https://brunch.co.kr/@coexistence/155) 상류층과 중류층 사이에 굉장히 큰 사회적 네트워크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학습조건과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연구 결과입니다.


 이것도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죠. 서로 다른 계층과 집단간에 형성된 사회적 네트워크를 어떻게 껴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이미, 특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공고히 형성되어서 그 안에서 교육정보가 활발히 오고갑니다. 그러다가 돈을 모아 아끼고 아껴, 강남 8학군에 들어가서 나도 아이도 한국 최고의 사회적 자본을 지닌 계층에 속하는 것이 경제 호황기에 우리 국민들이 공유했던 욕망이기도 하지요.


 계층이나 집단, 생활반경, 주거 조건 등의 문제와 한계로 인해 드릴 수 있는 말이 많지는 않지만, 글쎄요, 제가 볼 때는 필요한 것은 딱 하나, "다른 상상력"일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의 선택지를 그토록 제한하고 오로지 사교육으로, 강남을 상징으로 하는 좋은 초등학교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또한 그러한 목표를 위해 아이와 함께 키가 맞지 않은 2인 3각, 혹은 3인 4각을 하면서 놓치고 있는 것이 꽤 많지는 않은가요?


 요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백안시할 일이지만 저희 부모님은 지금도 저를 집단 경조사에 빠짐없이 데리고 다니십니다. 저는 저희 아내까지 덩달아 끌고 가죠. 당연히 요즘사람인 아내는 투덜거립니다만, 명절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과, 명절 때마다 꼴도 보기 싫을 지언정 그 친척들이랑 부대끼는 것이랑, 아이에게 더 좋은 사회적 자본을 갖추어주는데에는 어느쪽이 도움이 될까요? 물론 양가가 평화로운 가정들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외조부모나 조부모를 불편해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면 애초에 사회적 자본을 논할 수조차 없겠지요. 다들 넉넉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정상적인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저희 부모님의 경우엔 책무를 다하고자 하셨고 그런 습관, 문화적 자본은 자녀인 저의 사회적 역량으로 전이되었습니다. 어떤 명절이 더 좋을까요? 아 물론, 굳이 명절이 아니어도 친척을 만날 순 있긴 합니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부모님의 인적 네트워크가 "아이를 공부시키는 데" 짜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른들"을 많이 만들어주도록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 봉사에 나서는 분들도 많죠. 약간의 수고만 들이면 주변에서 찾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공부할 시간을 쪼개서 아이와 함께 나서는 것이 나쁜 투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셨을 뿐이죠. 조금의 다른 상상력만 발휘해보자면, 아이에게 길은 열립니다.


 문화적 자본이나 사회적 자본이 꼭 필요한 것인가 하면- 글쎄요, 아이의 학습효율은 어느 시점에서 벽에 부딪힙니다. 금방 금방 익히고 배우는 시기를 지나서, 그저 수업을 따라가기만 하는데에도 하루 몇시간씩 공부를 해야 하고, 나중엔 아무리 공부를 해도 따라잡기 버거운 때가 오죠. 그런 것에 비하면 문화적 자본이나 사회적 자본의 영역이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가정일 경우, 벽에 부딪힌 아이의 학습효율에 과잉투자되는 시간과 노력을 다른 방향으로 틔워줄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죠. 아이의 성장은 언제나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굳이 아이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외면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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